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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8년 09월호, 통권203호 I 사색의 창] 도시락 - 이에스더

신아미디어 2018. 11. 23. 14:34

아침 햇살이 초록 빛 바람을 데리고 왔나 보다. 바람을 따라온 나뭇잎들이 소풍 가는 아이들 같다. 맑은 얼굴 반짝이며 재잘거리는 그들의 보폭에 발을 맞춘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즐겁다. 아름다운 세상이다."







   도시락    -    이에스더


   보자기를 풀었다. 커다란 찬합이 넉넉한 모양새를 드러낸다. 뚜껑에 새겨진 잔잔한 꽃들이 하나 둘 피어나 식탁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들꽃 향기날리는 언덕에 도시락 들고 소풍 온 기분이다. 뚜껑을 열었다. 오이소박이, 명란, 두부부침과 고추멸치볶음이 맛깔스럽게 담겨 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종일 장을 보고 나면, 점찍은 듯 먹은 점심은 그야말로 점처럼 금방 사라지고 만다. 허기가 밀려오던 그때 뜻밖에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들어가는 길에 잠깐 자기 집에 들렀다 가라 한다. 저녁을 준비하는데 내 생각이 나서 도시락을 싸두었다고, 힘든데 밥 하지 말고 한 끼라도 편히 먹으라 한다.
   그녀는 현관문을 활짝 열어둔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집 앞에 서자마자 그녀가 도시락을 들고 달려 나왔다. 흰 보자기에 싸인 커다란 도시락을 손에 쥐여 주며 빨리 가라고 밀어내는 손짓에 쫓기듯 그 집을 나섰다.
   사랑과 정성이 깃든 도시락, 임금님의 수라상과도 견줄 수 없는 성찬이다. 그녀의 마음 한 톨이라도 흘리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뗀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퍼지는 밥맛에 하루의 피로가 싹 달아난다. 남편과 이야기 한토막 나눌 참도 없이 젓가락을 바삐 움직인다. 어느덧 젓가락 속도가 느긋해진다. 어지간히 시장기가 가셨나 보다.
   찬 통에 가지런히 몸을 누인 오이소박이. 몸통 한가운데 십자 모양으로 칼집이 나 있다. 잘게 잘린 부추를 가슴에 품기 위해 예리한 칼날에 제 몸 내어주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나 보다. 하얀 소금에 숨죽이며 말간 피를 내어주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에 쓰리고 매운 아픔을 제 심장인 양 받아들였던게지. 그렇게 몇 날을 지낸 오이가 마침내 오이소박이로 거듭나 지친 나의 하루를 어루만지고 있다. 아삭함 속에 시간의 깊은 맛이 배어 있는 오이소박이가 좋다. 몸을 낮추고 제 속을 내어 준 오이의 마음이 맛의 깊이를 더한 탓일까. 오이소박이를 먹으면 내 삶에도 아삭아삭한 깊이가 더해질 것 같다.
   만만한 게 두부였다. 무엇과도 잘 어울리는 무던하고 부드러운 식감과 부담 없는 가격 탓에 두부는 우리 집 단골 메뉴이다. 오랜 세월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주었던 착한 두부는 때로는 화려하게 때론 소박하게 변신을 거듭하며 여전히 식탁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그런데 만일 콩들이 반란이라도 일으켜 물에 잠기기를 거부하거나, 무거운 맷돌과 끓는 물의 아픔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어찌 고소하고 부드러운 두부의 맛을 알 수 있었을까.
   노릇노릇 구워진 두부를 한 입 먹는데 문득 어머니가 떠오른다. 속이 문드러진다고 혼잣말을 내뱉으시던 어머니. 물에 퉁퉁 불어 이미 껍질이 벗겨진 가슴만으로는 부족하여 그마저 맷돌에 쏟아 부어야 했을까. 그때 밥상에 올랐던 두부는 어머니의 가슴이 빚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부에 한 점 올려놓은 양념장이 내 어머니 누우신 곳에 피어 있는 붉은 꽃 같다.
   멸치와 고추가 어우러져 구수한 맛을 내는 게 밥도둑이 따로 없다. 잔멸치 부스러기 하나라도 남김없이 알뜰하게 먹겠다고 젓가락질을 하는 사이 밥그릇도 바닥을 드러낸다. 참기름을 두른 명란젓이 입에 착 달라붙는데, 마지막 밥 한 술로 입맛을 다독인다. 깨끗하게 비워진 찬합 속에 작은 행복과 감사가 차곡차곡 채워진다. 찬합에 무엇을 담아 보낼까 생각 중이다. 내 솜씨로 음식은 가당치 않을 터, 마음을 담아야겠다. 서랍장에 있던 색이 고운 보자기를 꺼내어 펼쳤다. 먼저 깊은 감사와 그녀를 위한 기원을 꼭꼭 눌러 담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책이 좋은 답례가 되겠지. 책 두 권과 그녀의 마음 닮은 흰 보자기를 반듯하게 접어 찬합과 함께 쌌다. 그녀를 만날 때까지 그 안에 넣어둔 감사와 기도가 행여 새어나가지 않도록 든든하게 매듭지어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며칠째 그녀의 도시락을 바라본다. 어느 순간 말 잇기 하듯 도시락, 소풍, 시 한 구절이 잇달아 떠올랐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시가 도시락과 함께 마음 문을 두드린다.
   나는 어떤 도시락을 가지고 이 세상에 소풍 왔을까. 소풍이 끝나면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소리가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나간다. 징소리 같은 울림 한가운데 그녀의 도시락이 놓여 있다.
   아침 햇살이 초록 빛 바람을 데리고 왔나 보다. 바람을 따라온 나뭇잎들이 소풍 가는 아이들 같다. 맑은 얼굴 반짝이며 재잘거리는 그들의 보폭에 발을 맞춘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즐겁다. 아름다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