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수필과비평』[2018년 09월호, 통권203호 I 지상에서 길찾기] 동동주의 체온 - 정영숙
“내 체질에 맞는 술이 있듯이 사람도 그런 느낌이 있다. 만나면 즐겁고 따뜻한 사람, 그런 향기 좋은 사람들과 동동주 한 잔 나눈다면 사랑은 눈을 속삭이고 별은 더없이 반짝이겠다."
동동주의 체온 - 정영숙
‘나도 술을 잘 마실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었다.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면 다들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즐거워하는데 나만 그 기분을 모르고 있는 듯해서 좀 억울했다. 맥주 한 잔도 잘 못 마시니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인들 즐겁겠는가.
어느 날 술을 좀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남편이 포도주를 사 왔다. 음악을 깔고 식탁에 마주앉아 쨍~ ‘위하여!’ 출발은 제법 그럴 듯했다. 쉬엄쉬엄 한 잔 정도는 그런대로 넘어갔는데 그 이상은 마실 수 없었다. 내 몸이 욕망을 거부하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번엔 맥주, 그 다음에는 소주, 남편은 자주 술을 들고 들어왔다. 나는 그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마셔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한 모금씩이나마 채 두 잔도 마시기 전에 목젖이 내려와 딱 막아선다. 어느 날은 매실주를 사와서 마셔보라고 했다. 새콤한 맛이 제법 넘길 만하여 두어 잔 마셨다가 얼굴과 목에 불이 나고 어지러워 정신이 없었다. 뒷머리가 아프고 온몸에 힘이 빠져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곤 남편이 딱 잘라 말했다.
“너는 아무래도 술 체질이 아닌 것 같다. 그만 포기해라.”
이십 대 때 맥주 한 잔에 정신을 잃었던 경험이 있어 그 뒤론 술을 마셔 볼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누가 술을 권하기라도 하면 두 손을 내저으며 큰일이라도 나는 양 했었다. 그러나 이 나이에 또 포기하기엔 왠지 섭섭했다. 저만치 달아나는 낭만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마셔볼 요량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분위기에 맞춰 긴장을 놓아보려고 애를 썼다.
옛날 어느 문우는 술에 취하면 횡단보도가 계단처럼 보여 계단을 올라가듯 걷고, 또 가만히 걷고 있는데 전봇대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마를 때리곤 한다면서 실수담을 무슨 자랑처럼 이야길 한 적이 있다. 술을 얼마나 마셔야 그럴까. 취해보지 못하는 나는 궁금하기 짝이 없다.
언젠가 전통주 파는 곳에 묻어간 적이 있었다. 동동주를 시켰는데 그 동동주 맛이 새콤하면서 시원하게 잘 넘어갔다. 그 향이 싫지 않았다. 무려 석 잔이나 마셨다. 어라! 동동주 체질인가. 나도 남들처럼 취해볼 수가 있겠다. 희망이란 얼마나 찬란한가.
따뜻한 사람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서 조곤조곤 세상사 나누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즐겁다. 평소에 하지 않던 대화도,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편안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슬프거나 우울할 때, 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한잔 술에 웃으며 떨쳐버릴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지 않은가. 한 번쯤 나도 취한 기분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그러면 아이들이 소풍 나온 봄동산만큼이나 세상이 아름다울까. 취한다면 내 무의식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할까. 잠시나마 내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면…. 더러는 술이 사람을 먹어버리기도 한다니 그런 낭패를 당할까 걱정이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래도 술은 분위기로 마시는 모양이다. 같이 있어도 부담 없는 사람들과 나누는 자리, 그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나는 술이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난다는 것을 알았다.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기분이 점점 고조되는 것을 느낀다. 그럴 때면 평소에 하지 않던 이야기도 술술 잘도 나온다. 그것이 내 취한 모습일까.
술은 다 같은 술인데도 이름에 따라 맛과 느낌이 다르다. 찬 것이 싫은 나는 맥주는 너무 차갑고 소주는 입에 와 닿는 순간 쓰고 독하다. 포도주나 매실주는 향기로운 맛에 마시긴 쉽지만 어쩐지 머리가 많이 아프다. 그런데 동동주는 어디선가 그 어느 땐가 마셔본 듯한 친근한 맛이 난다. 어릴 때 시골 방에서 맡았던 새곰한 술 익는 냄새. 잔칫날이면 온 집안을 흥겹게 만들던 그 냄새.
사람에게도 독특한 맛과 향기가 있다. 맥주처럼 너무 차가운 사람은 가까이 하기엔 부담스럽다. 소주처럼 독선적인 사람은 만나면 피곤하다. 앞에서는 다정하지만 뒤에서 남 험담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달콤한 과실주 같다고나 할까.
내 체질에 맞는 술이 있듯이 사람도 그런 느낌이 있다. 만나면 즐겁고 따뜻한 사람, 그런 향기 좋은 사람들과 동동주 한 잔 나눈다면 사랑은 눈을 속삭이고 별은 더없이 반짝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