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수필과비평 2018년 08월호, 통권202호 I 세상마주보기] 소년의 음악 여정 - 김유정

신아미디어 2018. 10. 17. 17:29

이젠 완벽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칠십을 훌쩍 넘긴 피아니스트는 무심한 듯 대답했다. “음악엔 완벽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완벽하기 위한 여행을 계속하는 거죠.”  거장은 겸손했다. 그의 음악 여정에 잠시 나도 동행했다. 내가 처음 만났던 열 살 소년의 두려움과 노력이 연민으로 교차되었다."







   소년의 음악 여정    -    김유정


   동네 아트홀에서 영상으로 백건우 피아노 리사이틀을 보았다. 짬을 일부러 내었다. 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나고 싶어서였다.
   그를 처음 본 것은 부산 동래온천장에 있는 금정국민학교 육학년 때였다. 내가 시골에서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무렵이었다. 아침 조회 시간이었다. 운동장에 모인 전교생 앞에 교장선생님이 조그만 학생을 소개했다. 피아노 공부를 더 하러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아이였다.
   6·25 전쟁이 끝난 지 이 년인가 넘었을 때니 ‘미국유학’이란 참 생소한 단어였다. 우리는 모두 힘껏 박수를 쳤다. 아버지와 같이 간다더니 얼마 안 되어 아버지는 동네에서 보였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동네에서 하나뿐인 유치원 원장이며 피아노 레슨을 하는 신여성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와 음악인 부부로  당시 조그만 동네에선  보기 드문 인텔리였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든 친구 동생 손을 잡고 베레모를 쓰고 걸어가는 그의 아버지 모습은 참 멋있어 보였다. 전쟁 통에 서울에서 피난 온 것이었다.
   서울이나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은 금정산 아래에 천막을 쳐 처음엔 집단생활을 하며 교회에 다녔다. 초등학교도 세워 따로 공부하는 모양이었다. 후에 우리 학교에 편입하였다.  
   당시 어린 나이에 부모도 떨어져 머나먼 곳에 공부하러 간다니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어찌되었을까, 가끔 궁금하였다. 물론 이미 열 살 때 한국 국립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협주곡으로 첫 콘서트를 가진 영재이긴 했지만. 세월이 흘러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는 소문에 안심되고 기뻤다.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족한 송금으로 그 또한 얼마나 고되었을까. 공연히 내 마음이 짠하였다.
   외국에서 공부하여 성공한 사람들 모두 힘들고 눈물겨운 얘기가 있겠지만 유독 어린 소년이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에는 인내와 고독이 함께했으리라 본다. 지금이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이 많지만 당시 전쟁의 상흔이 끝나지 않은 조그만 나라의 소년이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었는지 상상이 잘 안 된다. 얼마 되지 않아 희대의 여배우 윤정희 씨와 결혼 소문이 들렸다. 애쓴 그의 어머니 소식도 유치원 자모였던 동서가 전해 주었다.
   그는 미국 줄리어드 음악대학 대학원을 나왔다. 한불문화상과 은관문화훈장도 받았다. 파리에 살면서 세계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베를린 페스티벌에선 동양인으로서 처음으로 라벨 전곡을 연주하여 라벨 음악 해석에 큰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92년 스트라빈의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디스크를 내어 프랑스 디아파종상을 받았다. 그는 2000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기사’ 훈장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섬마을 주민을 위한 ‘섬마을 콘서트 투어’, 세월호 사고 100일 추모공연 ‘백건우의 영혼을 위한 소나타’ 등을 선보여 뜨거운 성원을 받았다.
   그는 작곡가들을 하나하나 섭렵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하는 연주자로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작품의 본질을 꿰뚫는 해안으로 청중을 전율에 이르게 한다고 한다.
   남편이 영국에 근무할 때 그가 여러 차례 연주하러 왔다. 직접 음악을 들으며 그의 성공이 내 친척의 일인 양 기뻤다. 그때 만난 윤정희 씨는 배우의 모습이라곤 찾을 수 없이 소박하고 남편의 음악에 취해 사는 아낙이었다. 겉모습에 신경 쓰지 않은 것같이 수수하고 친근하였다. 곧 그녀는 영화 <시>로 잠깐 우리 곁에 왔다. 어느 시낭송 대회에서 시를 읽어준 낭랑한 목소리를 남기기도 했다.
   영상이지만 오랜만에 그의 연주 모습에 한껏 취했다. 고희가 넘은 그는 더욱 무거워졌다. 역시 잘 웃지 않았다. 본인보다 더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잘 나이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젠 완숙한 모습이다. 긴 악장을 다 외워 두드리는 손엔 그냥 음악에 녹아들어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연습하고 음악 속에 살아 왔는지 보여주었다. 제스처도 흔들림도 없지만 젊은이 못지않은 강한 손의 움직임을 화면은 클로즈업시켜 비추어 주었다.  
   피아노는 온도와 습도에 따라 금방 소리가 달라진다고 한다. 잘 조율해 놓아도 주위의 상태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그는 피아노의 미세한 음차를 마치 자기 몸처럼 가장 잘 안다고 한다. 그 많은 연주회를 하면서 그가 만족한 피아노 상태는 딱 한 번이었다고  했다. 작곡가의 의도를 잘 표현하고 싶어 얼마나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을까. 신앙생활이 힘과 위로가 되었을 것 같다.
   이젠 완벽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칠십을 훌쩍 넘긴 피아니스트는 무심한 듯 대답했다. “음악엔 완벽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완벽하기 위한 여행을 계속하는 거죠.” 
   거장은 겸손했다. 그의 음악 여정에 잠시 나도 동행했다. 내가 처음 만났던 열 살 소년의 두려움과 노력이 연민으로 교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