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07월호, 통권201호 I 지상에서 길찾기] 아내라는 친구 - 안유환
"한때는 우정이란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제는 아내에게 더할 수 없는 우정 같은 것을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 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직도 남자들은 가부장적 자리에서 쉬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간디가 해설을 붙인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우정은 동등한 사람 사이에서만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참된 친구란 높고 낮음이 없다. 우정에는 가난함도 부유함도 힘을 발휘해서는 안 된다. 부부가 친구가 되려면 적절히 역할을 공유해야 한다. 어떤 때는 내가 세탁기를 조작하고, 탈탈 털어서 빨래를 널기도 한다. 그러나 아내라는 친구는 늘 어머니처럼 나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아내라는 친구 - 안유환
“송아지는 제 어미를 팔아서 친구를 산단다.” 내가 어릴 적 할머니로부터 들은 말이다. 며칠 사이에 같이 태어난 이웃집 송아지가 놀러오면 우리 집 송아지는 제 엄마를 두고 친구를 따라갔다. 우리 집 송아지가 그 집으로 놀러가기도 하고 두 마리가 함께 어울려 들판을 뛰어다니며 놀기도 했다. 할머니의 이 말을 곱씹어보면 사람에게도 부모보다 친구가 더 좋다는 의미를 일깨우는 것 같다. 실제로 자라는 아이들은 엄마 아빠에게 하지 않는 얘기를 친구에게는 털어놓는다. 이것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다. 친구에게 걱정거리를 내놓고 해결방법을 찾거나 위로를 받기도 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데는 친구가 제격이기 때문이다.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우리가 자주 들어왔고, 자라는 세대에게도 들려주는 말이다. 언젠가 어느 스승으로부터 “인생을 잘살아 가려면 세 사람의 친구는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도 어찌 보면 친구의 중요성을 강조해주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의견이나 충고보다는 두 사람, 세 사람의 도움이 더 원만한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친구를 위해 내 모든 것을 희생할 만큼 가까운 친구를 둔 기억이 없다. 게다가 꼭 친구를 사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 내가 중학교 때 방학을 맞아 우리 집에 놀러온 그 친구가 이튿날 돌아가려고 할 때 나는 하루만 더 있다 가라고 붙들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나는 그저 좋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무슨 사정이 있는지 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돌아갔다. 나는 그를 떠나보내고 서러움에 겨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 부모님과 형제들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멀리 있었고 나만 홀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고향에 살았다. 그것은 진한 우정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외로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우정을 오래도록 지켜가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학창으로, 군문으로 흩어지고, 직장을 따라 타향살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학창과 직장에서 사귄 친구들 가운데는 멀리 있어도 소식을 주고받곤 하지만 옛 친구의 정은 느껴볼 수 없다. 더욱이 결혼을 하면 가까이 있는 친구도 이런 저런 이유로 만나보기 어려워진다. 인생은 살아갈수록 옛 친구와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친구가 멀어지면 가까이 있는 친구를 새로 사귀어야 한다. S. 존슨은 “인생을 살아감에 따라 새로운 친구를 만들지 않으면 곧 고립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리라. 우정은 끊임없이 손질하면서 지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귀어보아도 옛날처럼 쉽게 친구가 되지는 않는다. 깊은 얘기를 정답게 나누지도 못한다. 언젠가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요즘은 무얼 하며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매일 아내와 함께 놀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아내가 친구라는 말이다. 나 역시 나이 들어서 아내와 함께 노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내에게 ‘친구’라는 이름을 붙일 줄은 몰랐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그 누구보다도 절친한 친구가 아내임을 그는 일깨워주었다.
아내보다 친구의 조건을 더 잘 갖춘 사람이 있을까? 두 사람의 다른 의견을 쉽게 하나로 조율할 수 있다. 서로가 고집을 피우다가도 오랜 삶의 경륜을 통해 어느 쪽이 한걸음 물러설 줄도 안다. 언젠가 TV 채널을 두고 충돌할 때가 있었다. 아내가 연속극을 보는데 내가 갑자기 스포츠 채널로 돌렸기 때문이다. 이런 무례를 다른 친구에게 범했다면 아마 절교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 읽고 있는 신문이나 책을 통해 대화를 이어간다. 함께 나들이를 하고, 마트에도 같이 가고, 공원 산책길을 나란히 걷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내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을 것 같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친구로 만들어주신 것이다.
살다보면 부부는 취미가 서로 닮아 간다. 아내와 나는 오래도록 등산을 같이했다.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정상을 올랐고, 제주도를 한바퀴 도는 올레길은 이제 세 코스만 남겨놓고 있다. 처음 얼마 동안 아내는 등산을 무척이나 힘들어 했다. 그래도 이끌어주며 꾸준히 함께 걷다보니 이제는 아내가 나보다 더 잘 걷는다. 어쩌다 몸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내가 오히려 아내를 따라가기 힘들다. 그때는 “당신도 3년만 더 있어보라.”고 나이 핑계(?)를 대며 웃는다. 아내는 밖으로 합창, 라인댄스 등 서너 개의 동호회에 참여하지만 일주일에 두 차례는 아파트 탁구장에서 나와 함께 탁구를 친다. 처음에는 교회의 지하 탁구장을 이용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여의치 않아 깨끗이 잘 청소된 아파트 시설을 이용한다.
친구는 서로 도와야 한다. 결혼 초에는 내가 아내에게 여러 가지 심부름을 시켰으나 이제는 아내가 내게 심부름을 시키기도 한다. 때를 따라 하는 집안청소는 내가 전담한다. 그러나 음식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내가 할 수 없었다. 어떤 때는 설거지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한다. 혼자서 구푸려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는 것을 내가 받아 넣어주면 한결 수월해진다. 때로는 역할을 바꾸어 내가 싱크대의 그릇을 대충 훔쳐주면 아내가 의자에 앉아서 세척기에 받아 넣는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처럼 수월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한때는 우정이란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제는 아내에게 더할 수 없는 우정 같은 것을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 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직도 남자들은 가부장적 자리에서 쉬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간디가 해설을 붙인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우정은 동등한 사람 사이에서만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참된 친구란 높고 낮음이 없다. 우정에는 가난함도 부유함도 힘을 발휘해서는 안 된다. 부부가 친구가 되려면 적절히 역할을 공유해야 한다. 어떤 때는 내가 세탁기를 조작하고, 탈탈 털어서 빨래를 널기도 한다. 그러나 아내라는 친구는 늘 어머니처럼 나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