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06월호, 통권200호 I 월평] 수필문학의 담론화 가능성 - 김지헌
"그 세상을 위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앞에서 살펴본 작품들처럼, 아직 그 정도가 미약할지라도 우리는 개인의 서사가 사회적 담화로 이어가는 역할을 잊지 않는 글쓰기를 할 것이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거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마주해야 할 때, 사랑이 미움보다 월등하게 큰 힘을 지닌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안다. 그런 문학은 매일이 전쟁인 이 현실에서 일상을 잠시라도 끊어내는 숨 돌림 같은 것이 되어 줄 것이다."
수필문학의 담론화 가능성 - 김지헌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은 매 순간 주체와 객관 대상의 부딪침 속에서 진행된다. 이러저러한 현상들 속에서 자아와 세계의 갈등은 끝이 없지만, 그 안의 주체는 작용과 반작용의 변증법적 테두리에서 발전해가려 노력한다. 무엇인가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 의지가 존재의 성숙 가능성을 보장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고난을 헤쳐 나가며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는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면 애써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많이 행복해질 수 있는가의 결과론과는 별도로 그러한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우리를 견인해 간다. 작가들은 그 견인차의 한 바퀴가 문학임을 알고 있으며, 수필을 쓰는 작가들 역시 염두에 두고 글을 쓸 것이다.
≪수필과비평≫ 5월호에 실린 작품을 일독하면서 개인의 일상성이 문학적 사건으로 비등하지 못하고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는 작품들도 만났다. 인생의 패턴처럼, 태어나서 살다가 병들어 죽는 과정의 반복처럼, 문학이 담는 사건들의 맥락 또한 마찬가지다. 더구나 사람 사는 일상의 모습이야 누구든 그리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개개의 존재에게는 모두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고 사건들이다. 문학작품도 그래야 한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그것이 문학적으로 변조되지 않으면 문학일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이 아픈 사람의 이야기는 그 경험이 인생에 무엇을 보게 했는지, 혹은 자신의 경험담이 독자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는지, 그 작가만의 특별한 무엇을 독자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사랑한 경험이 작품화 된다면 작가는 자신의 사랑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미적경험과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글이 탄생되려면, 작가는 누구나 다 아는 경험이지만 누구도 모르는 특수한 상황이나 방법, 정서적 환기 등을 통해 보편적 소재를 넘어서는 특수한 상황을 풀어내는 존재여야 하고, 그 존재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며 쓰여진 글은 문학으로서의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적 현상까지 시선을 돌려, 주체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를 담론화 하는 여력을 갖게 된다.
문학은 보편화되고 공인된 이데올로기를 전달하여 지배이데올로기의 확대 재생산에 봉사하는 공식언어가 아님은 명백하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데 운용되어 공식 언어에 대한 대항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비공식언어인 문학의 역할이 엄연히 존재한다. 따라서 문학은 존재가 위치하는 사회적 모순을 외면하지 않아야 할 책무를 지닌다. 그것은 작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호 월평은 개인의 일상적 경험을 확장하여 사회적 담화로까지 나아간 작품들을 살펴보려 한다. 문학이 현실 참여에 몰두하여 지나치게 건조해지거나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때로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문학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건강한 작가 정신이기도 하다. 자신이 처한 현실적 삶의 불합리함이나 부조리성을 피할 수 없다면, 작가는 작품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경험적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수필문학의 본질인데, 왜 사회적 문제를 말하기에 주저하는가. 다만 위에서 언급한 문학의 범주 안에서 이야기된다면 금상첨화라는 욕심을 부리며 이 글을 시작한다. 어쩌면 이번 호 월평은 문학을 이야기하며 느끼는 아름다움보다는 우리가 처한 현실의 고통을 함께하며 그에 공감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대해야 할 것 같다.
서경림, <불턱을 엿보다>
작품 <불턱을 엿보다>에는 해녀들이 그들의 삶을 합리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공동체 사회를 이루고, 본능적으로 정치적 시스템을 만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불턱’이라는 공간은 오랜 시간 제주 사람들의 문화가 되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바다의 삶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제주에서 해녀들을 위해 생겨난 문화가 ‘불턱’일 터인데, 그곳 여인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매우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라는 데 새삼 놀라웠다. 관점에 따라 근대가 발견한 것 중에서 여성과 아동을 중요하게 꼽는 경우가 있는데, ‘불턱’에서의 여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동체사회를 이루어 함께 잘 살길 실천해온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재는 문학에서도 사회학적 구조나 정치성이 내포된 이야기가 아름답게 도입될 수 있다는 단초를 제공한다.
작품에서도 드러나지만 ‘불턱’의 원 의미는 “불씨가 있는 곳”으로 “모닥불이나 화톳불과 유사”하지만 오늘날의 기능은 “해녀의 집”으로 표현된다. 해녀들이 물질을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거나, 무자맥질해서 작업하다가 언 몸을 녹이기 위하여 찾아오는 곳이 불을 피워 놓은 ‘불턱’이라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도 하고, 가정과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기도 하는 마을 공동체 공간이었다. 지금은 현대식 탈의장이 생기면서 ‘불턱’은 사라지게 되어 하나의 문화유산이 되어가고 있다.
이 왁자지껄함 속에 사소한 집안일에서부터 누구 집 대소사까지 온갖 새 소식이 오간다. 마을의 발전이나 학교의 발전기금을 위한 의논도 일어난다. 공동 작업으로 채취한 톳이나 우뭇가사리 수익금은 학교나 마을을 위해 쓰자고 결의한다.
혼자서 떠들고 결정하면 독재가 되고 여럿이 떠들고 합의하면 민주의의가 된다. 시끄럽게 떠들어도 불턱에는 질서가 있다. 물질을 가장 잘하는 해녀를 ‘상군’ 또는 ‘상잠수’라고 하고, 상군 중에서도 최고참이 웃어른으로 받들어진다. 물질을 한 지가 오래되어도 기량이 부족하여 얕은 바다에서 조업하거나 물질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잠수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하군’에 속한다.
‘불턱’에 모이는 해녀들에게도 엄연한 질서가 있고, 그들은 그 질서를 엄격하게 지킨다. 이를테면 화톳불에 모여 불을 쬐더라도 상군은 풍랑을 등지고 앉고, 하군은 풍량을 마주하여 앉기 때문이다.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는 상군, 중군, 하군 순으로 발언권이 주어지는데 그러한 관습을 통해 질서를 유지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역량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누어지지만 “회의와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만 구분”하고, 당사자들 앞에서는 구분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통해 조직원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해녀들의 의식을 알 수 있다. 즉 질서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지위 구분을 하지만 인격적으로는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꽃피고 있다는 현대보다 더 진화된 형태의 ‘민주성’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또한 ‘불턱’은 해녀들의 특수집단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의사결정은 물론 삶이 고스란히 담기는 장소다. 그런 이유로 ‘불턱’은 “물질하는 기술과 바다의 생태를 전수하는 문화 전승의 공간이” 된다.
해녀들은 혼자 물질을 나가지 않고 반드시 무리를 지어 함께 나간다. 물질하면서 서로의 안위를 살핀다. 동료 해녀가 안 보이고 태왁만 동동 물에 떠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윽고 길게 숨비소리를 토하면 물밖으로 솟구치는 해녀에게 ‘저저(빨리빨리) 물 위로 다니라.’며 핀잔을 준다. 이 윽박지르는 소리가 아무리 거칠어도 서로 아끼는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물질을 하면서 생사를 같이하고 있음을 절절하게 느낀다. 어느 불턱이나 가장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해녀 중 누구도 물질 중에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그것을 가장 명예롭게 생각한다. 물질친구들은 마을마다 해녀회에서 수평적 합의를 거쳐 어장 관리와 물질에 관한 일을 결정하면서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굳게 다진다.
‘불턱’이라는 공간을 통해 해녀들이 협동심과 결속력을 다지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물질을 하는 현장에서 생사를 함께하고 있다는 절실한 생각이 그들을 운명체적 동지 의식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나의 위험이 너의 위험이고, 누군가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 될 수 있기에 물질을 하면서도 서로의 안위를 걱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고 없이 물질하는 것은 그들의 자랑거리가 되고, 같은 ‘불턱’ 안의 식구가 아무 일 없음은 그 공동체의 명예가 될 수 있겠다. 바다가 생의 터전이었던 해녀들에게 ‘불턱’은 그들이 보호받고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한 생의 울타리 같은 것이어서 해녀들의 공동체적 삶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러나 이제 위험한 직업이었던 해녀의 수가 점차 줄어들고, ‘소중이(천으로 만든 속옷)’이 대신 고무 옷이 등장하면서, 즉 안전과 편리함이 가능해지면서 ‘불턱’의 역사적 공간도 퇴색되고 있다.
작가 서경림이 “해녀들의 왁자지껄한 이야기도, 구성진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고, 바람 소리만이 쓸쓸하게 불턱을 감돌 뿐이”라고 아쉬워할 만하다. ‘불턱’의 해체와 더불어 그녀들의 사랑과 배려의 아름다운 정신, 생사를 같이 하면서 느끼는 타자와의 공동체 의식도 해체되었을 것이다. 해녀의 직업에서 벗어난 여성들이 이제 안전과 자유로움을 찾았을까. 그렇다면 안심이지만 왠지 또 다른 염려가 솟구친다. 어렵고 힘든 삶의 여건 속에서도 아름답게 지켜져 온 것들이 편리하고 안락한 문명 속으로 들어가 원의미를 잃고 떠도는 것처럼, 현대의 우리 모습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지만 그 시대에 존재했던 것은 그 시대에 필요한 일이었거니 그렇게 위안을 삼을밖에.
박흥일, <업경>
<업경>은 죽음의 세계를 빌려 삶의 세계를 풍자한 수필이다. 사실 작가가 어떤 소재나 주제를 풍자적으로 말할 때에는 그러한 이유들이 있다. 한국 문학사에서도 일제 식민시대나 그 이후 국가적 이념으로 자유로운 글쓰기가 억압될 때, 작가들은 풍자 기법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표현해냈다. 그렇다면 작가 박흥일은 왜 산 사람의 이야기를 죽음의 세계를 빌려 말하고 있는가? ‘업경’은 한 존재가 일생 동안 행한 일을 낱낱이 되비쳐 선과 악의 무게를 가늠하는 거울이다. ‘업경’은 죽음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도구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초월적 능력만 있다면 삶의 세계에서도 존재의 업행을 비춰볼 수 있다. 그 틈이 ‘업경’을 주요 소재로 끌어오는 타당한 이유가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존의 우리에게는 삶과 죽음의 세계는 엄연히 다르게 존재한다. ‘업경’을 통해 영혼은 염라대왕 앞에 가서 심판을 받고, 그의 정신세계에 맞는 곳으로 보내진다. 그렇다면 삶의 결과물은, 생이 완성되는 죽음 이후에나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세계는 단절이 아닌 영속적으로 순환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증명하는 길이, 오늘날처럼 인간의식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든, 신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처럼 태고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이든 상관없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헤라클레스나 오르페우스는 명부를 다녀온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다가 명부로 끌려가 되돌아온 이들의 이야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주지 않던가. 그리고 지금, 작가 박흥일은 “명부로 출석하라는 전갈”을 받고 명부로 출두하여 판관이 비치는 ‘업경’ 속의 행적을 추적한다.
판관은 내가 동네 친구들을 꼬드겨 도깨비불을 잡겠노라 꽹과리를 쳐대며 부슬비 내리는 공동묘지에서 밤을 지새운 황당한 사건, 단골 대폿집 마담의 전화번호와 제때 갚지 않았던 외상 술값 청구서, 영어 단어 외우기가 너무 힘들어 염소에게 억지로 단어장을 뜯어 먹이다가 누나에게 혼나는 모습,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낱낱이 저장되어 있는 업경을 보여주었다.
여기까지의 그의 업은 차라리 아름다울 지경이다. 다시 말해 이런 사건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고, 문학적 사건으로 환치될 수 있어 심지어 미적으로 읽혀진다. 깨알 같은 실수들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을 인간답게 확인시켜줄 뿐이어서 ‘업칭業秤’에 의해 그는 개똥밭 같은 이승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판관의 변명은 “인턴저승사자의 업경판독” 실수 때문이라 한다. 이 가당찮은 죄목?으로 끌려온 그를 돌려보내며 판관은 진짜 해야 할 말을 한다.
요즈음 옷을 벗고 한 일은 옷을 입고 나면 깡그리 까먹는 허깨비들, ‘#MeToo’를 유발하는 주책바가지들이 득실거립니다. 게다가 선택적 기억상실증을 빙자하는 망나니들의 재심청구가 산더미같이 쌓여있어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업경 평가를 무기한 미루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의 일생 업에 대한 판단은 보류상태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 판관은 인간들이 ‘#MeToo’를 외칠 때마다 명부전은 북새통을 이루어 너무 비좁다고 푸념한다. 뿐만 아니라 그간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었던 인물들을 매우 시니컬한 시각으로 되짚어준다. 노벨문학상을 꿈꾸는 시인, 꼴값하는 배우, 사이비 교수, 연극계의 대부, 어느 지방의 수장인 행정가, 그들의 “뻔지레한 변명을 들은 팔도의 노송들이 뿌리를 뽑아 흔들며 발끈했”다거나 “그들이 구린내를 속이며 숨어든다면 당장 날짐승과 들짐승을 데리고 숲을 떠나겠노라고 청기와집 대문에 방을 붙였”다는 것은 변화의 기류가 강해졌다는 의미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 값을 치르지 않는 자는 자연도 그들을 보호해 주지 않아 숨어들 곳이 없음을 말하는 작가의 의중은 확실하다. 거짓은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할 뿐더러 이제는 인과응보의 세상이 되었음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부장적 위계 속에 있는 남성들은 성에 대해서는 서로에게 관대했다. 그러나 세상은 변화했고, 변화해 가고 있기에 ‘노송’으로 비유된 어른남성(원로)들이 드디어 생각을 바꿨다. 노송이 숲을 이루는 재반 요소를 거느리고 숲을 떠나는 것은, 더 이상 묵인하고 보아주는 경계를 넘어섰다는 의미다. 또한 명부로 불려갔던 작가는 ‘명부발전위원회’의 지구별 대표로 뽑혔으니 그에 걸 맞는 의지와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겠다. 이제 명부에서는 “‘죄는 지은 대로, 덕은 쌓은 대로’라고 쓴 주렴을 걸어두고 공정한 선악 감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명부 체험관 신축사업까지 하고 있다.
판관은 호언장담하였다. ‘두 강줄기 수면에 똑같은 아름다운 인생의 참모습이 떠오르게 하려면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했는지를’ 뉘우칠 때까지 반복하여 업경을 비춰보이겠노라고.
명부에 호출된 영혼이 이곳에서 자신의 ‘업경’을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될까. 그렇게 되면 인간은 가없는 욕망을 내려놓고 최소한의 선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사실 ‘#MeToo’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의 권력문제를 포함하여 힘을 더 많이 가진 자가 상대적으로 힘이 적은 자에게 행하는 폭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개별적으로 드러난 사례뿐만 아니라 제도나 관습에서 오는 차별과 편견까지 확장하여야 본질적인 문제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젠더의 문제는 인류가 지내온 역사만큼이나 공고하게 구축된 결과물이어서, 그 틀을 바꾸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래서 더욱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며 용기를 내는 이들에게 ‘#with you’로 화답해야 할 것이다.
<업경>에서 판관은 작가의 대리인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회피하는 젠더(gender)의 문제를 그는 작품화하고 가해자들이 속죄할 때까지 ‘업경’을 비추겠다고 한다. 명부를 통한 방법은 우회적이지만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내용은 직접적이며 단호하다. 작가가 풍자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 자유롭고자 함이다. 그는 판관을 통해 가해자들에게 발뺌만이 능사는 아니며, 인정하고 사과하며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그의 견해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남녀의 차별은 물론, 권력 간의 힘의 논리, 빈부의 격차 등 많이 가진 이가 적게 가진 이들에게 나누고 배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실 요원한 강 너머의 이야기 같지만 작은 불씨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자.
최선욱, <머시 말세인디?>
이미 독자들도 연상작용이 시작되었겠지만, 이 작품의 제목은 영화 <곡성>을 통해 유명해진 문구 ‘뭣이 중한디?’를 떠올린다. 하지만 전라도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투이니 사용의 제한은 없겠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문장이 품고 있는 의미이다. 우리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저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각기 다르고, 그것을 향해 자신의 존재성을 희생하거나 알지 못하는 사이 엉뚱한 것에 빠져 자아를 던져버리는 경우가 있다. 각자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중요한 것의 실체는 깨닫고 나면 햇살에 스러지는 물거품처럼 인생에서 스쳐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일 수도 있는데 그 실체를 알기 전까지는 전 존재를 걸고 빠져들거나 쟁취하려 든다. 결국 그것의 실체를 좇아보면 돈, 명예, 성, 이념, 종교, 복수 따위이고, 이에 눈이 멀어 사람에게 중요한 본질적인 것들을 놓치고 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필 <머시 말세인디?>는 구성은 단순해도 서술된 내용의 무게로 중편으로서의 중량감을 충분히 담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살아오는 동안 경험해온 다양한 이야기를 꿰어 우리 사회의 모순적인 현상들을 진지하게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말세’라는 부분으로 나뉘어 우리 사회가 지닌 각각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는 각기 다르지만 큰 범주로 통칭하면 남성주의적인 권위가 드러내는 아이러니한 현상들이다.
‘말세 1’은 작가가 근무하던 학교에서의 일이다. 화단을 청소하던 학생이 어느 날, 담배꽁초는 쓰레기통에 버려달라는 하소연 담은 쪽지를 선생님들의 책상 위에 전달한다. 출근한 선생님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지만, 그중에서도 “나이 어린 학생놈들이 선생을 가르치려” 든다고 씩씩대는 남자선생님의 모습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심했을 여학생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그래서 더욱 선생님은 희화화 되고 만다.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선생의 권위에 도전했다고 생각하는 선생의 편견은 이제 사라졌을까. 자신의 조카를 모 업체에 입사시키기 위해 그 회사 간부인 후배에게 청탁하는 선생의 모습은 더 가관이다. 노조를 “인간 말종”이라며 사원 뽑는 것조차 사장 맘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은 그들에게 “말세”가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며 노력할 때, 소수의 권위주의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움켜쥐고 노적봉을 쌓으려 발버둥친다. 그러한 역사적 시간을 거쳐 오늘날의 우리 사회가 되었다. 타인의 행위는 쉽사리 ‘말세’가 되고, 당사자들이 말세를 부추기는 행위를 하고 있음을 모르는 이 아이러니함이라니!
‘말세 2’는 가부장적 남성주의에 길들여진 여성의 ‘여성 기만’에 관한 이야기다. 같은 아파트에서 A층 여자가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이 무성한데 그것은 주로 B층에 사는 여자의 “말풍선” 때문이다. 부부 문제는 당사자들이 해결한 듯, A층의 여자는 남편과 팔짱 끼고 외출을 하며 밝기만 한데, B층의 여자가 그들과 같은 통로에 산다는 것이 “우세스럽”다며 “말세”를 외쳐댄다. 바람 피운 여자를 용서하고 같이 사는 남자는 “성인군자”아니면 “병신”이라며 “남들이 우리 아파트 주민들을 뭘로 보겠”느냐로, 자신의 감정을 주민들의 생각과 감정으로 환치시킨다. 왜 그녀는 남의 침실 문제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는가. 타인의 삶에 끼어들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고 있는가. 모름지기 부부는 그들만이 공유하는 삶의 방식이 있고, 그들 또한 그러할 텐데.
작가는 B층 여자가 “유독 수컷의 본능에는 관용적이었”다며, 가부장적 문화에 훈습된 탓으로 돌린다. 그럴 수도 있다. 남성문화권에 들어가 안전하게 보호 받으며 살아가는 여자들은 가부장적 문화에 충실하며, 그 문화를 거부하는 다른 여자들을 혐오하거나 기만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를 옹호해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여자여서 여자를 밀어내고 혐오하는 사례들은 외려 많다. 그런 예를 보면 우리 사회가 아직은 가부장적 남성문화 중심임은 너무도 확실하다. 이럴 때 우리는 여자 남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 한 인간으로서의 남성이길 원한다. 너무 큰 기대일까. 그러나 간절한 기대다.
‘말세 3’은 작가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지만, 그들이 자라 성인이 된 후 밝혀진 사실이다. 6학년 때 전반을 해온 친구의 사연은 담임의 성추행 때문이었다. 담임은 유난히 조숙한 작가의 친구를 부진한 과목을 지도해 준다는 명분으로 불러 ‘몸 더듬기’를 했다. 참다 못 견딘 친구가 전반을 하게 된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했던가. 20여년이 지나 친구의 딸이 입학식을 할 때, 교장인 그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그는 예전에 젊고 세련되고 말쑥했던 것처럼 “미래의 꿈나무들을 내 자식처럼 사랑하고 올바르게 지도하겠으니 믿고 맡겨달라고 학부모 앞에서 결의에 찬 다짐을 했”을 것이다. 작가가 전하는 “단정한 용모에 근엄한 자태, 마음을 사로잡는 말솜씨 등 자녀들보다 더 기대에 부푼 입학식장의 학부모 눈에 그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교장선생님이셨을까”가 남기는 씁쓸한 여운이 다른 해석을 압도한다. 이처럼 직접적인 비판보다 비틀기 형식의 서술은 더 큰 아이러니와 삶의 페이소스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과 내밀하게 숨겨둔 인간의 본능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효과가 크다.
‘말세4’ 역시 성추행과 관련된 종교세계의 이야기다. 정신적인 지도자로 추앙받던, 신도 수 2만이 넘는 대형교회 목사가 여신도 성추행 사건을 줄줄이 드러내면서 감히 성직자를 몰아낸다고 “‘말세로다.’”를 외치며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새로운 비즈니스, 성공모델을 만들어가고 있음”에 대한 작가의 시각은 매우 이성(냉소)적이다. 사실 종교인들이 지도자를 따르는 것은, 그를 통해 종교가 지시하는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의미가 전도된 오늘날의 종교는 하느님의 가르침보다는 종교를 이용한 세 불리기 혹은 자본 축적하기가 목적이 되었다. 바벨탑을 통해 하나님의 세계에 가까워지겠다는 인간의 오만과 욕심이 빚어낸 결과다. 달을 가리키는 손만 보다가 헛길로 빠져 정작 달은 보지 못하고 탐욕으로 퉁퉁 불어 볼썽사나워진 손가락에 휘둘리는 꼴이다. 어디 기독교만 그러겠는가. 어느 종교든 대동소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느 종교의 이념이 문제인 게 아니라 종교를 앞세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인간이 문제라는 점이다. 태초에 그랬듯이,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예수님이든 그분들의 거룩함과 성스러움은 변함없지만 그 분들의 세계를 악용하여 제 욕망을 부풀리려는 성직자들과 그를 추앙하는 이들의 문제다. 그래서 아직 세상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문제를 직시하고 썩은 살을 도려내고 치료하는 일이 필요한 시절이다.
하여 작가는 “혼탁한 세상 속에서 그나마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이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가 타락해도 “싸잡혀 욕을 먹어도 끝내 감수하며 묵묵히 그 길을 가고 있는” 목회자들(타 종교도 마찬가지일 터)이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 최선욱은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는 줄도 깨닫지 못하는 주제에 왈가왈부하는 내 자신이, 사실은 뒤가 켕기고 오금이 저린 까닭에 더욱 ‘말세’가 더디 오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로 돌아가 자신의 성찰로 마무리한다. 불완전한 인간은 조금 더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신에게 귀의하여 자신을 완성해가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은 눈에 보이는 외부 세계에는 밝지만 자신의 문제만은 눈 먼 장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내 안의 문제를 모른다 해서 현실까지 외면하며 살 수는 없다. 존재의 안과 밖은, 세상과 개인은, 현상과 본질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변증법적으로 흘러가고, 시대가 요구하는 현상의 변화는 다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것을 잘 통찰하는 이가 현명한 존재 아니겠는가. <머시 말세인디?>는 4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요즘 우리에게 화두로 작용하고 있는 문제들을 재인식시켜준 작품이다.
박숙자, <흔들리다>
존재는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상들을 만날 때 그 상황에 따라 마음이 흔들린다. 흔들림은 대체로 생각이나 감정에서 오기 십상이지만, 그렇다고 냉철한 이성으로 중무장된 사람은 흔들리는 순간에서 자유롭다는 뜻은 아니다. 주체와 타자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현실에서 존재는 찰나 간에도 이것과 저것을 선택해야 타인들과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자신의 생을 선택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 선택의 기로에서 존재의 마음은 늘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내 자신의 생각과 다른 무엇을 결정해야 할 때, 그것도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내가 얼마만큼은 그것들을 나눠가져야 할 때 갈등도 함께 따라온다. 타인의 아픔을 나눠 갖는 동안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 누가 뭐래도 주체는 자신의 욕망으로 사는 존재인데, 내 것을 내놓고 타자를 배려할 때에는 크든 작든 자기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가로등이 켜지는 저녁 무렵, 외출에서 돌아오는 골목길에 접어들자, 진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스민다. 그동안 나를 화나게 했던 장본인과 맞닥뜨릴 때다. 행인을 가장한 걸음으로 천천히 담뱃불 임자 곁을 스친다.
“야, 오늘처럼 힘들면 못살 것 같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 그는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담배 연기를 흘리면서. 영업성과를 내지 못했나, 혹은 감정 노동자로 속이 상했나,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살기 싫다’는 말을 들으면 늙은 어미들의 가슴은 철렁하다.
딱하다. 많이들 힘들구나. 그래 그렇구나. 불안하게 그의 곁을 지키는 담배가 오히려 든든해 보인다. 저 담배가 도움이 될까, 된다면 …. 흔들린다. ‘대문 앞 금연’을 말하려던 마음이 허물어진다.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 온 작가는 골목 안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건들로 불편함을 겪는다. 골목이 주차 공간이 되고, 소음과 매연을 뿜는 오토바이족의 무례한 질주, 골목을 쓰레기통으로 변하게 하는 판촉물 등도 신경이 쓰이지만 대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는 요인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함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작가 역시 남의 집 대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항의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마침내 기회가 오고, 담배연기로 화나게 했던 장본인과 만났지만 통화 내용을 들은 작가는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인용에서 보여준 것처럼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아간 작가에게 갈등은 수그러들고 오히려 상대가 연민스럽게 생각된다. 그는 이 시대의 노동자들이 열악한 조건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사회문제가 되어버린 갑질 논쟁에서 자유로운 직업이 얼마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약육강식의 승자 독식체제를 내포하고 있으며, 자본에 의해 그 위치는 언제든 역전되고 흔들린다. 직장에서의 상하 조직체계는 생산을 위해, 결과물을 위해 얼마나 고단해야 하는가. 때로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인격까지 저당 잡히고, 몸을 해하는 조건하에서도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삶은 또 얼마나 핍진할 것인가. 그래서 ‘살기 싫다’는 말을 들은 작가는 그들 곁을 지키는 담배가 오히려 든든할 지경이 된다. 힘들게 버티며 일하는 타인을 품기 위해 나의 건강과 불편함과 괴로움을 감당하겠다는 결심은 마침내 ‘대문 앞 금연’을 말하려던 마음을 허물어버린다.
현실을 감당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젊은이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자신의 불편함을 감당하겠다는 이야기는 특별하지도 않을뿐더러, 문학적 과정도 밋밋하지만, 사회적 현실을 고려하여 타인을 이해하고 감싸 안으려는 작가의 태도는 높이 살만하다. 이 작품이 배려를 통해 사회적 문제까지 생각하게 하는 지점은, 문학이 시대성을 간과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삶의 여정에는 실낱같은 희망의 줄이 사라졌다 이내 또 나타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인생에 변화나 흔들림이 없다면, 기쁨이나 슬픔, 괴로움 앞에서도 나무사람처럼 움직임이 없다면, 고정된 틀 안에서 얼마나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삶이 되겠는가.
원정란, <공개수배합니다>
공교롭게도 <공개수배합니다>의 소재 역시 담배다. 이 작품은 속도감 있는 문장과 거침없이 보여주는 장면 묘사의 신선함으로 흥미롭게 읽었다. 여성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이토록 아름답게 보는 관점은 얼마나 신선하던지. 작가는 선배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가는 길에 차량이 많아 정체의 시간을 보내면서 지루함과 초조함을 단번에 걷어내는 한 손을 만난다. 그것은 내려진 유리창 밖으로 나와 있는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의 손가락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왜, 그 타이밍에 손을 내민 걸까요? 커진 동공을 달래며 살펴보니 요염한 손가락 사이에 글쎄, 담배가 끼어있는 게 아니겠어요. 여인의 손과 담배라, 그 담배 때문에 손이 몇 배나 더 고혹적으로 느껴졌답니다.
뇌쇄적인 손이 천천히 들락날락, 립스틱이 묻었을 담배가 손가락과 쌀쌀한 바람사이에서 유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낙엽 타는 냄새가 났어요. 영화보다 더 영화스러운 여인의 도발은 한낮 햇볕을 무색케 했지요. 저 도도하고 시크한 유혹. 나도 담배를 배웠어야 했어요. 내 안의 아니무스가 마른 침을 삼켰습니다.
한낮의 햇볕을 무색하게 하는 여인의 손은, 종종 창밖으로 꽁초를 내던지고 달아나는 남자들의 손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작가는 잠시나마 저 아름다운 손은 여느 남성의 손과는 다를 것이라는 환상을 잠시나마 품게 된다. 상황이 그러하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라 온갖 주문을 외워대며 교통체증이 풀리길 간절히 원하던 그였지만, 이제 차가 막히는 것 정도는 “인생도 가끔 정체가 있듯이. 기존의 가치관도 막히다 뚫리다 그러지 않겠”느냐는 여유로 바뀌고 만다.
저렇게 당당하고 고급질 수 있다면 더 이상 여자의 흡연이 음지로 숨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남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저 모습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봐 줄까요? 매혹적인 손가락과 담배의 공모를 용납하실 런지. 못마땅해 하며 재수 없어 하실 지도, 아님 관능적인 모습에 성적매력을 느끼실 지도, 그것도 아니면 둘 다? 꽤나 궁금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작가를 현혹시키던 그 매혹적인 손은 순식간에 실망으로 돌입시킨다. 그 환상적인 손이 “시커먼 남자들 손”과 같이 꽁초를 창밖으로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환상이 깨진 자리에는 환멸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법. 달리는 차 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차 넘버를 외워 고발하는 것뿐이다. 좀 전의 화려한 수사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작가는 가차 없이 죄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함을 선언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무죄일 수는 없다는. 그래서인지 “그 지루하고 건조한 시공간을 순식간에 화사하게 하는 그녀는 봄”이라고 하던 찬탄의 시각이 “화창한 겨울 햇빛을 조롱하고, 선량하고 순수한 시선들을 희롱하고 그리고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란 믿음과 기대를 우롱한 괘씸죄까지” 얹어, 그녀의 손을 공개 수배하는 지극히 평등한 의식으로 전환된다. 다만 그러한 의식과 시선이 문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공개수배합니다>의 독해법은 이중 혹은 삼중으로 가능하다. 이 작품은 수필에도 다성적 시각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간략하게 언급한다면, 그 첫 번째는 여성이 담배피우는 것에 대한 시각의 해체, 그 두 번째는 담배꽁초를 버리는 손에 대한 수사적 표현을 통해 공공질서를 지키는 시민의식의 환기, 그 마지막은 담배 피우는 여성에 대한 젠더적 담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호 월평의 주제에 따라 두 번째 주제로 돌아간다. 이 작품은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계몽적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즉 개인은 마땅히 사회규약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문학적인 시선으로 완성하는 장점을 지닌다. 문학이 사회를 말하는 방식이며, 작가는 문학을 통해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을 언급하고 함께 나아가자는 낮은 목소리를 내는 계기인 것이다. 재미있고, 가독성이 좋으며 메시지가 명확한 작품은, 작가적 역량의 발로이지 않겠는가.
세상의 파도는 때때로 거칠게 몰아치기도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잔잔하게 흘러간다. 누군가 유명을 달리해도 세상은 시침을 떼고 말간 얼굴로 시간을 향해 달려간다. 그래서일까. 광주는 5월이면 환청에, 환각에, 지우고 싶은 기억으로 시달리는 소녀들이 있고, 70살 먹은 할머니인 제주의 4·3 역시 진행형이다.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는 온전한 사람살이의 삶을 위해 진실로 말하고, 듣고, 소통하여 변화되는 세상을 꿈꿔왔고 꿈꾸고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온전히 누려야 할 인권과 평화, 존엄성이 일상적 가치가 될 수 있을 때까지. 그 세상을 위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앞에서 살펴본 작품들처럼, 아직 그 정도가 미약할지라도 우리는 개인의 서사가 사회적 담화로 이어가는 역할을 잊지 않는 글쓰기를 할 것이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거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마주해야 할 때, 사랑이 미움보다 월등하게 큰 힘을 지닌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안다. 그런 문학은 매일이 전쟁인 이 현실에서 일상을 잠시라도 끊어내는 숨 돌림 같은 것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