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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6월호, 통권200호 I 지상에서 길찾기] 자랑질 - 김새록

신아미디어 2018. 7. 30. 10:51

"허름한 시계방의 소박한 정이 지난날과 오늘 사이에서 시냇물처럼 흐른다."







   자랑질    -    김새록


    우스갯소리로 ‘중2가 제일 무섭다.’라는 말이 떠도는 세상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제 마음대로 감정이 폭발하며 또래들끼리 모여 욕을 남발하는 청소년을 지칭하는 말일 게다. 물론 아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격세지감이 든다.
   ‘베이비 붐’ 세대인 우리는 어린 날 언감생심 어른이나 다른 사람 앞에서 욕하거나 거들먹거리는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들길에 해맑게 핀 한 떨기 이름 없는 꽃처럼 순수할 뿐이다. 길을 가다가 살짝 색다른 것만 봐도 까르르 웃던 사춘기도 모르는 ‘중2 시절’이다.


언니에게 물려받은 손목시계
   하루 간격으로 멈춰 서던 손목시계를 언니한테 물려받아 처음 차 보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때 나는 고장 난 시계와 상관할 바 없이 시계를 지녔다는 만족감에 마음이 붕 떴다. 면 소재지에 있는 중학교를 친구와 걸어다니면서 토끼풀 꽃을 따다가 손목시계라며 만들어 차고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며 놀기도 했다. 당시 시계는 그만큼 귀한 물품이었다. 어느 집이든 해와 달이 시계였다. 해가 흙마루에 내려가면 점심때고, 해가 동산을 넘어가면 저녁밥을 먹고, 새벽닭이 두 번째 울면 옆집에 사는 몽니쟁이 친구 엄마는 새벽 교회를 다니신다고 알려 주시기도 했다.
   시보를 울리는 라디오도 물론 흔치 않았다. 동네에 세 대가 있었는데 우리 집에도 파란 ‘금성 라디오’가 있어 흐뭇했다. 밤에는 <산 낭자의 풀피리>,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연속극을 들으려고 소꿉친구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그랬던 시절이었는지라 시간도 잘 맞지 않은 낡은 시계였지만 보물이라도 간직한 듯 자다가도 일어나 만져 보았다. 때로 학교에 가기 싫은 날이 많은데 그 뒤로는 학교 가기만을 기다렸다. 책가방을 들면 시곗줄이 헐렁해 손목으로 내려와 반짝반짝 빛나는 나의 ‘세이코 손목시계’를 누군가 보아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 시계 찼다.’ 하고 길 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자랑하고 싶었던 게지. 그때는 먹는 것이 먼저고 스타일 따윈 먼 나라의 일인 양 관심 밖이었다. 시계보다 들판에 심겨 있는 곡식에 온통 관심이 쏠렸고, 어디선가 풍겨 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에 정신이 팔리곤 했다. 누군가 볼 사람도 없는데 괜히 혼자서 수시로 고장 난 시계를 가지고 보물이라도 된 것처럼 자랑하던 칠푼이 짓이었지만, 그 속에서 꿈이 자랐다.
   학교 가는 길에 무거운 책가방을 기를 쓰고 시계를 찬 왼쪽 팔로만 들고 다녔다. 그 덕분에 왼팔은 처지고 힘들더라도 오른팔은 언제나 가볍고 상쾌한 듯 신바람 나게 흔들어 댔다. 시계를 차지 않은 오른팔은 편했다. 이처럼 손에 쥔 것 없어도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빈 수레 요란한 격으로 자랑하고 싶었을 터이다. 시곗줄은 요즘처럼 세련된 것도 아니었다. 스테인리스로 된 묵직한 줄이다. 학교에 도착해서는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싶어 시계를 찬 왼팔에 수시로 턱을 괴었다. 그런데 시계는 눈치도 없이 주르르 흘러 소매 안으로 들어가 숨어 버리곤 했다. 그때마다 공부는 뒷전이고 시계를 손목 위로 나오게 하려고 애를 썼다. 친구들 앞에서 뽐내고 싶은 속도 몰라준 시계가 짓궂은 친구 같다. 어쩌다가 용케 시계를 본 학우가 부러운 눈빛으로 몇 시냐고 묻기도 한다. 그럴 때는 왼팔의 아픔도, 옷 속으로 숨는 시계와의 실랑이도 한꺼번에 싹 달아난 듯 유쾌하다. 마치 낚싯대에 큰 물고기가 걸려든 것처럼 의기양양하다.


고장 난 시계 때문에
   그런데 이게 또 어찌된 일인가. 학교에 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시곗바늘이 멈춰 섰다. 고장 난 시계는 내 마음도 고장 내고 말았다. 자랑거리가 있어 신바람 난 소녀와 살고 죽기를 반복하는 시계가 시소게임을 하는 격이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장터에 있는 조그마한 시계방으로 달려갔다. 허름한 공간은 비좁아도 사람 냄새 물씬 풍기던 곳이다. 한쪽 벽에는 추가 달린 커다란 괘종시계가 걸려 있고, 시계방 안에는 온통 작은 벽시계며 손목시계가 진열되어 있다. 주인아저씨는 구석진 곳에서 고장 난 시계를 수리하고 계셨다. 나는 그 귀한 시계들이 째깍거리고 있던 시계방을 면 소재지에서 제일 부잣집처럼 여겼다.
   공책 살 돈까지 다 털어서 시계를 수리했건만, 시계는 일주일쯤 버티다가 또 죽어버렸다. 자랑거리가 사라져 버린 소녀는 소낙비를 흠뻑 맞아 폭 젖은 닭 꼴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 귀한 걸 어찌 버리겠는가. 배곯아 본 사람이 배고픈 걸 안다고 물건의 소중함을 그때 알았다. 하지만 물건에도 인연의 끝이 있을 터, 여고에 들어가면서 그 손목시계는 어느덧 책상 서랍 지킴이가 되어 뒷방 늙은이처럼 서랍 한 귀퉁이를 차지하였다.

나에게 시계란
   그 뒤로 손목시계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만도 못한 관심 사라진 물건이 되었다. 19세기 초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손목시계는 나에게는 그저 시간을 알려 주는 도구일 뿐 그 이상의 것도 아니다. 성년이 되어서도 명품 시계는 잘 모를뿐더러 흥미도 없다. 나에게는 명품 시계가 아니라 명품 시간이 소중하다. 감칠맛이 나면서 풀꽃처럼 잔잔하고 은은한 바람으로 주변에 싱그러운 향기를 발산하는 시간, 더불어 살며 낭만적인 여유를 즐기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걸, 고장 난 시계가 보여 준 셈이다.
   그 손목시계를 떠올리며 핸드폰을 열어 본다. 스마트폰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시계를 대체하였다. 멋과 부의 상징이며 시간만 알리던 손목시계가 아니다. 일 분 일 초도 어김없이 알려 준다. 최근 출시되고 있는 ‘스마트워치’는 손목시계의 미래를 보여 주는 기술의 집합체가 아닌가 싶다. 통화는 물론 심장 박동수, 실시간 위치 확인 등의 다양한 기능을 손목시계에서 사용할 수 있어 손목시계의 장점에 스마트함을 더했다.
   과학의 발달을 거듭하며 달려가는 21세기, 모든 것이 신속하고 편리해졌지만 마음 한쪽이 공허한 것은 왜일까? 40여 년 전 고장 난 손목시계를 처음 찼던, 궁핍 속에서도 충만했던 그때의 정서가 달보드레하다.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기쁨과 감사함이 스며 있다.
   허름한 시계방의 소박한 정이 지난날과 오늘 사이에서 시냇물처럼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