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06월호, 통권200호 I 사색의 창] 봄나물 향기에 취해서 - 최이락
"여러 종류의 나물을 종별로 나누어 살짝 데쳐서 봉지 봉지 싸고는 냉동실에 저장시켜 놓고 나니 내 마음은 부자가 된 듯, 한 끼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은 느낌이다. 이 봄이 다 가고 봄나물 향기가 가셔도 나는 냉동실의 그 귀물貴物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오늘도 코를 벌름거리며 시장 골목을 누비고 있다."
봄나물 향기에 취해서 - 최이락
매화와 개나리는 봄을 알리는 전령사다. 그들이 자취를 감추기가 무섭게 꽃샘추위가 찾아오면서 반갑잖은 미세먼지로 대지의 숨통을 한동안 죄더니 이젠 완연한 봄날이 되었다. 4월 초엔 곳곳이 진달래가 활짝 피어 화사한 봄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봄나물로 5일장 골목을 장식하며 그 향긋한 내음이 침샘을 자극하며 식감食感을 돋운다.
“쓴나물 데운 물이 고기도곤(보다) 맛이 있어…”란 옛 시조의 한 구절이 문득 뇌리를 스쳐 간다.
쑥·쑥갓·냉이·돌냉이·봄동·상추·(쌈)배추·우엉·머구(머위)·엄개(엄나무잎)·두릅·고사리·참나물·씀바귀(도채)·방풍·미나리·곰취(곤달비)·깻잎·작약·가죽나물(참죽나물)·비름나물·도라지·더덕 등에다. 최근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이름 모를 각양 각색의 수십, 수백 종에 이르는 나물, 모종 등 시장 골목은 온통 봄의 향연으로 펼쳐진다.
어느 것부터 구경하고 냄새를 맡아보고 한 움큼씩 사다 먹어볼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저 멀리서부터 사방 골목 좌우로 널어 앉은 봄나물 거리는 곳곳이 자리한 꽃집과 모종 장사치들의 호객 소리와 함께 마치 한 편의 봄향기 스펙터클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이 길게 펼쳐진다. 이들을 낳은 산과 들은 증인처럼 저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다.
평소 육고기보다는 생선과 해조류 채소 나물 등을 잘 먹는 식성이다 보니 봄철만 되면 5일시장에 자주 간다. 가까운 5일장이 두세 군데가 있어 차례대로 찾아가 골목골목 기웃거린다.
집에서 가까운 태화시장에는 평소 가까이 지내던 고향 후배 A씨가 봄이면 모종가게를 한다. 평소 자주 문을 여는 곳도 아니라서 이때다 싶어 찾아가면 반갑게 맞이한다. 해거름 파장 때면 내가 주문한 것을 대충 몇 가지 몇 포기를 싸주고는 가까운 막걸리 집을 찾아 구수한 돼지국밥 한 그릇씩을 시켜놓고 이를 안주 삼아 그날의 시장 정경을 떠올리며 추억 어린 고향 얘기와 덧없이 흘러간 이런저런 인생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파장을 장식한다.
그날 밤은 늦게까지 옛 학창시절의 자취自炊실력을 한껏 발휘하여 회초장·간장게장·묵은지·태양초 고추장·들기름·참기름·올리브유·고추냉이(와사비) 등 찬장에 든 온갖 양념장을 다 꺼내 내 식성에 맞게 무치고 비비고 삶고 데치고 볶고 굽고 별짓을 다해 놓으면 늦게 퇴근한 아내는 이를 보고 신기하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섰다. 다음날부터 끼때마다 이것으로 비벼먹고 쌈장으로 찍어먹고 살짝 데워 국을 끓여도 먹고……. 이렇게 먹고 나면 입안이 향기로 가득 차 향긋한 식감으로 침샘이 솟는다. 밥도둑 이 따로 없다. 이들이 곧 밥도둑의 주범들이다. 밥 한 공기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퍼뜩 먹어치우고는 또 반 공기를 더 먹고도 뒤돌아보이는데 아쉬우나마 보이차 한 잔으로 때우고 식감을 자제하며 멀찍이 물러나 앉는다.
최근 들어 남부지방은 특히 봄 가을이 따로 없어졌다. 4월 초·중순 벚꽃이 만개하여 봄의 향연이 펼쳐지면 늦추위가 시새움을 부려(꽃샘추위) 제법 쌀쌀하다가 자취를 감추기가 무섭게 그 틈새를 주지 않고 재빠르게 초여름 더위가 찾아오면서 계절적으로 입하立夏로 이어지니, 십여 년 전부터 이곳(부산· 울산·경남·전남·광주)은 봄이 없어지고 9월 말까지 더위로 이어져 봄·가을이 없는 하동夏冬 두 계절만 존재한다. 따라서 봄옷으로 정장하고 다닌 지도 먼 추억으로 남는다. 어쩌다 객지에 나간 아들이 애비를 생각해 오랜만에 화사한 봄옷을 사와도 ‘저것 언제 입어보겠나. 이 꽃샘추위가 가고 나면 곧 초여름 더위가 찾아올 텐데. 나같이 일 년에 반쯤은 땀을 흘리고 지내는 사람이…….’란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매생이’란 녹조류의 해조海藻는 전남 완도나 여수·순천·고흥, 경남 통영· 남해 등 남해안의 해양 특산물이다. 몸은 관상(管狀: 대롱과 같은 모양)이고 가지는 없으며 배우자가 접합하여 된 낭상체(囊狀體: 주머니처럼 생긴 형상)로 여름과 가을을 성장하다가 12월부터 이듬해 3월 초순까지 거두어 시중에 나와 식객들의 입맛을 돋우다가 곧 자취를 감춘다. 여름철에도 냉동 매생이가 있긴 하지만 제때 맛만은 못하다.
매생이가 처음 나올 때면 한 봉지(한 움큼)에 5~6천 원 정도이고 냉동매생이는 3~4천 원 정도나 한다. 술꾼들에게는 술국으로 얼큰하게 속을 데워줘 상당한 인기가 있고 일반인들에게도 영양가가 있어 즐겨찾는다. 질박한 뚝배기에 다진 마늘과 청양고추 등을 총총 썰어 넣고 두부·떡국(또는 수제비)·칼국수·묵은 된장·멸치가루 등을 곁들여 보글보글 끓이면 구수한 매생이국이 완성된다. 얼른 보기에는 좀 촌스러워 보이지만 뚝배기보다는 장맛이 낫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이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여느 국이나 마찬가지로 김이 모락모락 나 보이지만 그 국물은 매우 뜨겁다. 옛말에도 “미운 며느리에게 매생이탕 준다.”라고 했다. 천천히 식히면서 먹어야 한다.
이러한 매생이를 매우 즐겨, 나는 매년 2월 말쯤 시장에 나가면 한 움큼에 5천 원쯤 되는 매생이를 수십 개(몇 만 원어치)를 한꺼번에 사다가 몇 개의 봉지로 나눠 냉동실에 저장해뒀다가 여름철이나 가을에 꺼내 먹는다. “또 매생이 사왔소? 냉동실이 꽉 차 다른 것은 못 넣겠네요!” 몇 번이나 하는 아내의 잔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이 매생이가 자취를 감추고 꽃샘추위가 찾아올 즈음(3월 말~4월 초)이면 봄나물이 시중에 자리를 대신한다. 봄나물이 사라질 때(초여름)면 그동안 맛을 못본 것을 생각하다 올봄에 구수한 쑥국 한 그릇 못 먹어본 것이 아쉬워 시장에 나가보니 이미 때가 지나 제법 늙어 있었다. 그나마 부드러운 것을 한 줌 사 총총 썰어 들깻가루와 된장을 넣고 푹 끓여 먹었다.
여러 종류의 나물을 종별로 나누어 살짝 데쳐서 봉지 봉지 싸고는 냉동실에 저장시켜 놓고 나니 내 마음은 부자가 된 듯, 한 끼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은 느낌이다. 이 봄이 다 가고 봄나물 향기가 가셔도 나는 냉동실의 그 귀물貴物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오늘도 코를 벌름거리며 시장 골목을 누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