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06월호, 통권200호 I 세상 마주보기] 청춘합창단의 옛사랑 - 이지원
"나는 잠시 ‘옛사랑’에 젖었던 마음을 거두고 꽃잎 흩날리는 밤길을, 같이 늙어가는 남편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현실부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청춘합창단의 옛사랑 - 이지원
꽃 만발한 봄밤, 퇴근길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느닷없이 음악회에 같이 가자며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평소 나와 정서가 다른 사람이라 다소 의아했지만, 같이 가야 할 자리인가 싶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외출 준비를 했다.
문예회관 소공연장 로비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남편은 지인이 단장으로 있는 합창단 정기연주회에 초대를 받은 것이었다. 합창 동호회에서 매년 정기발표회를 가졌고, 올해가 다섯 번째라 했다. 곧 공연이 시작된다는 안내방송을 들으며 우리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음악 감상이 취미인지라 공연장을 자주 찾는 편이지만 합창단 공연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주로 악기 위주의 연주회를 많이 다니는데 전날에도 요즘 잘나가는 젊은 피아니스트의 독주회에 다녀온 터였다. 하지만 음악 애호가들이 맨 마지막으로 심취하는 것은 성악이라고 한다. 아름답게 정제된 사람의 목소리는 그 어떤 악기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일 게다.
청춘합창단은 50세를 넘어선 사람들에게 회원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그들이 들려줄 노래들이 내심 궁금해졌다. 무대에 불이 켜지자 진행을 맡은 사회자가 목련처럼 눈부신 드레스 차림으로 등장했다.
“여러분들, 꽃 피면 설레고 꽃 지면 애틋하다지요? 아름다운 봄밤입니다. 오늘 이 공연을 보기 위해 표 구하시느라고 힘드셨죠? 비싼 암표도 산 분이 계시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조용필도, 빅뱅도 울고 갈 큰 박수를 보내주셔야 합니다.”
위트 넘치는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자 단원들이 차례로 나왔다. 남성단원들은 이마가 벗겨지고 배가 불룩 나왔으며 여성단원들도 긴 드레스에 감춰진 몸매는 대부분 허리가 실종된 H라인들이었다. 하지만 번데기처럼 쪼글쪼글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한껏 차려 입은 청춘합창단의 모습은 꽃 흐드러진 봄밤보다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호리한 청년들 이상이었고 S라인 아가씨들에 버금갔다.
여는 곡은 미사곡이었다. 처녀시절 성가대에서 활동한 적 있어 라틴어로 부르는 곡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미사곡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이십대 청춘시절로 되돌아갔다. 성가대 지휘자를 짝사랑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청춘합창단은 내 청춘을 일깨우고 있었다.
혼성합창이 끝나고 여성합창이 이어졌다. <뚱보새>라는 곡을 부르기 전 멘트가 재미있었다. 피자와 치킨을 조금밖에 먹지 않았는데도 뚱보가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낭창낭창 나뭇가지 끝에 앉아있는 참새 한 마리/ 뚱뚱보가 될까봐 남들이 놀릴까봐/ 걱정이 태산 같아요/ 먹는 것도 없는데 언제 이렇게 몸이 불었지” 객석에서는 공감의 웃음소리가 봄꽃처럼 피어 올랐다.
여성단원들의 목소리는 지금의 몸매와 반비례했다. 삶의 이력이 배여 있는 목소리는 어찌나 맑고 애잔한지 진짜 청춘들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고운 소리였다. 전날, 절정에 오른 젊은 피아니스트의 화려한 기교와 섬세한 감성에 매료되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지만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청춘합창단의 공연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청춘 시절을 지나 중년을 거쳐 이제 인생 후반기를 걸어가는 청춘합창단을 보면서 마음 밖으로 가출했던 감성이 다시 돌아와 촉촉해지고, 잊고 지냈던 추억이 방울방울 맺혀 눈시울이 붉어졌다.
찬조 출연한 현악사중주의 감미로운 연주와 색소폰 주자의 격정적인 연주로 무대는 한껏 달아올랐다. 이어진 순서는 남성합창이었다. 남성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는 과연 청춘이었다. 하지만 선율에 애절함이 배어 있어 마음이 아릿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지만 지나왔기에 더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청춘!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가. 눈 한번 깜빡 했을 뿐이고, 잠 한숨 잔 것뿐인데…….
이울어가는 봄밤, 연주회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혼성합창으로 이문세의 <옛사랑>을 듣는데 갑자기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 빈 하늘 위 불빛들 켜져 가면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 보네/ 이젠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들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
무연히 만난 청춘합창단에 취해 선뜻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객석 어디선가 “할머니~~.”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연장에 와르르 웃음꽃이 만발했다. 엄마와 함께 연주회에 온 꼬마가 무대 위 할머니를 발견하고 부른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청춘이고 싶어도 아니, 청춘이라 우겨도 할머니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잠시 ‘옛사랑’에 젖었던 마음을 거두고 꽃잎 흩날리는 밤길을, 같이 늙어가는 남편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현실부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