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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5월호, 통권199호 I 다시 읽는 이달의 문제작 작품론] 서사의 모티프, 은유로 드러내기 - 허상문

신아미디어 2018. 7. 11. 23:52

세 편의 '이달의 문제작'에 대한 허상문교수의 작품론을 통해 애정어린 관심을 바랍니다.

 

  조춘호  <살아야 해요>
  유병근  <legato와 stacato>
  차은혜  <선 지키기>









   서사의 모티프, 은유로 드러내기     -    허상문



들어가며

   수필에서의 서사적 모티프는 작가 자신의 체험을 표현하는 해석학적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해석학적 방식이란 이야기의 구성과 표현을 다양하게 변주하고 다채로운 담론을 창출하는 원동력이다. 이를테면 삶과 세계 이해의 방편으로서 은유적 표현방식은 서사 텍스트의 창출에 관여되는 과정에서 그 효력을 극대화한다. 은유적 표현방식은 서사의 모티프로 채용됨으로써 수필의 서사 공간의 동력으로 작용하거나 구심을 이루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아무리 범상한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해석의 관점과 표현의 방식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구현할 수 있다. 반면 아무리 좋은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사유의 여과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올바른 표현을 이루지 못하는 작품은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런 만큼 경험을 통한 감정이나 사유, 그리고 올바른 표현과 같은 문학적 수행은 어떤 식으로든 텍스트로 되돌려지게 되고, 이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문학작품으로서의 유효한 의미망을 획득할 수 있다. 이렇게 개인의 경험이란 해석과 표현의 공정을 통해 사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문학적 층위에서 삶의 의미를 제시할 수 있는 계기로 변환된다. 다시 말해 작가가 수행하는 일상적 삶의 국면은 그 자체로서 해석학적 순환을 이루면서 문학적 변용을 가지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가들이 삶의 경험을 축적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모색은 일종의 창작 수행의 출발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경험을 흘려버리지 않고 의미심장한 결정結晶으로 환원하기 위해서 다양한 표현과 해석 공정을 발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작가의 체험에 일정한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사유와 느낌과 감정을 담아 일정하게 형상화된 방식을 통해 텍스트로 변환되어야 한다. 삶의 경험과 문학 텍스트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서사문학의 본질적 의미를 추적하는데 중요한 관심을 환기한다. 이야기로써 경험을 나누고 세계를 이해하며 삶의 예지를 축적하여 전하는 것이 바로 서사 문학의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색다른 해석과 표현을 통해 경험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다른 경험을 재구성하여 자기 경험의 확장을 꾀하는 문학적 수행의 역동적 국면은 서사문학의 역할과 수행에 밀접히 맞닿아 있다. 문학적 표현 방식은 진전된 삶의 영역을 열려는 방편인데,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기 위해서 남다른 해석과 표현을 통한 창발적 인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라도 다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서사론의 기본 명제는 흥미롭다. 같은 소재와 주제라고 하더라도 어떠한 표현방식으로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양태의 서사구조로 변환될 수 있으며, 비슷한 구성이라도 표현하기 나름대로 다채로운 문체가 파생될 여지가 열린다. 서사의 가치는 참신한 소재나 번뜩이는 주제 의식에서는 물론 창의적인 구성이나 영향력 있는 문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서사 문체를 다채롭게 창출하려는 모색을 통해 문학 텍스트가 진전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서사 언어의 문체를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유효한 방식은 은유와 상징과 같은 묘사일 수 있다. 은유는 작가의 체험을 새롭게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게 하는 해석학적 순환 공정에서 대단히 유력한 기제이다. 은유는 이야기 구성의 변용과 다채로운 이야기 담론의 창출을 돕는 원동력의 역할을 한다. 은유에 힘입어 문학어와 일상어의 경계를 넘나들며 세계 안의 범위에서 현존재가 겪은 삶의 체험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하고 이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현존재의 세계 이해의 방편으로서 사용되는 은유의 인지 공정은 서사 텍스트의 창출에 관여되는 과정에서 효력을 크게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문학적 표현의 서사적 인지 공정에서 인지소로서 서사에 대입된 은유의 양상은, 일상적 담화에 편재한 개념을 새롭게 표현하거나 시적 담화에 편입된 다른 공정을 통해 빚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서사적 구성과 모티프에 중요한 인지소로서 대입된 은유는 삶의 경험과 사유를 해석하여 의미망을 편성하게 된다. 이를 표현한 텍스트를 통해 삶의 의미 확장에 환류함으로써 문학적 의미 확충을 이루게 되고, 더 나아가 세계의 지평을 확장하고 진전된 삶의 의미를 새롭게 단초지우는 창의적 모색은 수렴된다.
   작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서사적 인지소를 이루는 은유의 방식을 앞세워 삶의 층위와 텍스트 사이를 넘나들며 창의적인 사유를 돕는 인지 공정을 구동코자 한다. 그 과정에서 문학적 수행을 횡단하는 서사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게 된다.


조춘호, <살아야 해요>

   <살아야 해요>는 화자의 남편이 키운 완두콩에서 나온 벌레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출발한다. “완두콩 꽃이 지면서 열매를 맺는 순간 동시에 알을 까서 함께 꼬투리 속에서 자란 것일까.”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해서 화자는 집요하게 벌레의 모습을 추적하며 그 의미를 밝혀내고자 한다.


   생물 시간에 공부를 해본 적도 없고 상식도 없어서 의문의 날개를 단 채 벌레에만 관심이 바짝 모아졌다. 먼저 구멍이 크게 뚫려 있는 탱탱 여문 꼬투리를 조심스럽게 쪼개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휴, 무서워. 징그러워!”
   꼬투리 안에는 토실토실 살찐 하얀 벌레가 자기가 싸 놓은 똥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어릴 적 보았던 기침 해소제 ‘용각산’ 미립자와 같은 회색 똥이었다. 잘 여문 일곱 알갱이 중 반 이상씩 흠집을 내고 있었고 그렇게 갉아먹은 탓인지 배설물도 엄청 많은 양이었다. 몸의 크기로 보아 성충이 다 되어 금방이라도 번데기가 될 것 같았다.


   작품에서 작가는 벌레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서서히 그 생명과 존재의 의미를 일구어내고자 한다. 벌레는 비록 미물이지만 생명력을 보여주기 위해 동원되는 ‘존재’에 대한 이미지를 환기하고, 그것이 생존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적시한다. 이렇게 작품에서 벌레는 하나의 은유로 작용하면서 존재의 생명력과 삶에의 의지를 응축한 영혼을 담은 물건이 된다. 벌레는 자신의 생명과 죽음을 보여주는 과정에 부쳐지고, 이로써 벌레 이미지가 인출될 은유의 문맥이 조성되는 것이다. 흡사 벌레로 ‘변신’한 카프카의 그레고르 잠자와 같은 존재론적 모습에 대한 규명은 벌레가 가져오는 의례적 표상이 의미심장하게 적용될 수 있는 효력을 발하게 되면서 전환적 인식 과정을 이루게 된다. 이제 벌레는 단순히 땅 위를 기어다니는 생물이 아니라 생명과 존재의 의미를 추적하고자 하는 인식망에 포착되어 총체적인 삶의 의미를 환기하는 역설적인 이미지를 응축한 매개가 된다.
   벌레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예사롭지 않다. ‘완두콩에서 나온 벌레’가 이 작품을 구성하는 서사적 인지소로 작용한다는 가설은 독자에게 이채로운 의미를 제공한다. 그러한 의미망 조성을 위한 작가의 시선은 면밀하며, 이를 통해 포착되는 서사적 양상은 밀도 있게 전개된다.


   제 말대로 어딘지 모르는 채 풀밭 반대쪽으로 한참을 기었다. 그러더니 웬일인지 몸의 반 이상을 번쩍 쳐들었다. 둘레둘레 좌우를 쳐다보았다. 살 곳을 찾아가는 길의 방향을 나름대로 판단하며 모색하는 것 같았다.
   “무엇이 보이니? 머릴 들어서 가야 할 향방을 찾는 거야?”
   ‘여기가 어딘지 막막하고 알 수가 없네요. 그러나 나는 살아야 합니다.’
   직진하던 길을 멈추고 다시 또 우회전을 하였다.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참 기어가다가 이제 우회전 코스도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 뒤로 돌아 기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출발할 때의 힘찬 돌진력은 이제 소실되어버린 듯했다. 그 힘 빠진 동작을 보자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지친 몸으로 여기저기 방향만 바꾸며 흙바닥을 긴들…….


   “목적지는 알지 못하며 수없이 길만 바꾸고 있으니 얼마나 힘드냐.”는 벌레에게 주는 물음에도 잘 드러나듯이, 은유적 표상을 해석하기 위해서 벌레를 동원하는 작가의 시선은 벌레를 통하여 삶과 존재의 의미를 규명하고자 하는 개념적 전제로 세워진다. 이런 표상을 구성하는 이미지 도식과 그에서 생성되는 감정이 독자에게 공유될 때, 벌레에 대한 추적은 작가는 물론 독자의 삶에서 존재의 의미를 묻게 하는 유효한 기제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은유 표상을 둘러싼 담론이 확산되면서 존재의 의례 과정에 얽힌 문학적 수행의 여지는 더욱 넓어지게 되는 것이다.
   “힘들어도 내 살 곳만 가면 돼요. 그 길을 찾는 겁니다.”라고 대답하며 오직 자신의 갈 길을 향해서 나아가는 벌레의 모습은 작가의 말대로 흡사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를 연상시킨다. 먼 길을 고행하듯 혼자서 걸어가는 벌레는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고 정상 근처에 이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를 되풀이하는 시시포스의 모습과 같다. 그러나 벌레에게는 오직 살아야 한다는 강인한 의지와 희망과 목표가 있다. 벌레는 기어가면서 몸을 틀어 움직이며 다시 외친다. “나는 살아야 해요! 내 한살이를 마쳐야 한단 말예요.”
   ‘벌레’를 통하여 화자는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본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를 범하면서 살아온 인생의 모습은 바로 자기 삶의 모습이다. “너의 생을 향한 불굴투지 장했단다! 너는 친구들처럼 단숨에 죽어간 버러지가 아니었어. 벌레였어. 이제 이곳에서 힘차게 살아 번데기, 나방이 되는 한살이를 잘 살아라.”는 이 완두콩 벌레에 대한 격려는 곧 화자 자신을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살아야 해요>에서 벌레의 ‘살아야 해요.’라는 절규는 인생길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실존적 절규와 같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서사적 치유의 모색이 은유 형상의 대조를 통해 정서적 교감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존재를 무겁게 짓누르는 세상과 삶에 맺힌 응어리와 고통을 풀고자 하는 서사적 대응은 이렇듯 이루어진다.


유병근, <legato와 stacato>

   레가토legato와 스타카토stacato란 현악기의 연주법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레가토란 음과 음 사이를 끊지 않고 원활하게 연주하는 기법을 말하며, 스타카토란 음을 하나하나 짧게 끊어서 연주하는 기법을 말한다. 악기의 상반되는 연주법을 통하여 작가는 인생의 모습과 양상을 읽어낸다. 이 같은 연주법을 보여주기 위한 은유적 표현으로 작가는 서해에서 레가토의 연주를 읽고, 동해에서 스타카토를 읽는다. 서해는 고요하고 잠잠하게 원활하게 연주하는 레가토의 연주와 같다. 작가는 서해를 이렇게 묘사한다.


   하루는 또 서해안 바닷가에 선다. 바닷물이 보이지 않는다. 술래놀이처럼 바닷물은 개펄 속으로 몽땅 자취를 감춘 듯하다. 바닷물의 발자국을 찾아 나서는데 발자국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개펄 속에 묻혀 찰진 개펄과 한 몸이 된 듯하다. 바닷물을 다 빨아들인 개펄은 엉큼하게도 사막놀이라도 하는 것 같다. 끈적거리는 썰물개펄이다. 작은 게들이 기어 다니고 망둥어가 톡톡 튀는 개펄은 개펄 전체가 바닷물이 떠난 적막으로 범벅이 된 무변사막이다. 발바닥에 걸린 모래알 같은 것이 여기저기서 일어서는 환상에 뜬다.


   서해는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개펄로 하릴없이 쓸쓸해 보인다. 그 쓸쓸함과 함께 아득함이 무한정 뻗어가는 서해에서 작가는 은근한 레가토legato라는 말을 떠올린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체념과 무상의 삶을 다 알고 있는 듯, 그야말로 서해는 세상의 희로애락을 모두 체득하고 있는 초로의 우울한 여인과 같은 바다이다.

   이런 서해와 달리 “동해안의 파도는 해안을 물어뜯는 허연 이빨이 사나워 보인다. 그 기세가 당차게 우렁차다. 포효하는 짐승이다. 암벽에 몸을 부딪치면서 떠는 동해안의 파도를 소리로 치자면 탁탁 끊었다 놓는 스타카토stacato와 같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의 말대로 흡사 서해와 동해는 음악에서 레가토가 부드러운 여성과 같이 비유될 수 있다면, 스타카토는 격렬한 남성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작품에서 바다는 그 형상 자체가 은유적 이미지로써 구성된다. 삶의 장에 편재하는 은유의 자질을 고려해 보면, ‘서해’와 ‘동해’에 대한 관념과 담론을 낳기 위해서 작동하는 은유 회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은유는 삶의 모습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된 담화의 전략이며, 그로 인해 소통을 원활하게 하여 그 효력을 높일 방안을 창안하도록 돕는 담론 패턴이다. ‘서해’는 쓸쓸함과 함께 아득함이 존재하는 바다이며, ‘동해’는 격렬한 생명력이 일렁이는 상황에서 새로운 담화와 담론의 개념을 산출한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작가가 이런 은유적 담론 전략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코자 하는 또 다른 의도가 있다. 음악에서 레가토와 스타카토의 어울림에서 웅숭깊은 음곡을 이루듯이, 우리의 인생에서도 서해의 부드러움과 동해의 격렬함이 이루는 조화와 종합이다. 작가는 이 같은 삶의 조화와 종합적 지혜를 간과하지 않고 있다. 조화와 어울림으로 인해 “바다는 바다만이 아닌 웅대한 신전神殿, 숭엄한 제전祭典“을 이루게 된다. 흔히 인생은 자연에서 많은 지혜와 교훈을 얻고 있고, 많은 문학작품의 모티프에 대해 영감과 상상을 자연현상으로부터 빚지고 있다.
   인간은 땅과 하늘과 바다를 만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얼굴에 붉은 노을을 물들이면서 하루를 마친다. 땅에서 솟아나는 꽃과 나무를 보고,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을 만나고 바다의 파도를 바라보면서, 회색빛 도시와 삶에서 피폐해진 정신과 영혼을 달랜다. 자연은 인간과 삶에 떨림을 주고 문학적으로 은유하게 한다. 작가들은 은유의 감성과 느낌들을 함축시켜 문학작품을 만든다. 그것은 땅의 꽃일 수도 있고 하늘의 별일 수도 있고 바다의 파도일 수도 있다. 문학은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표현하는 것이다. 문학은 자연 속에서 보이는 것과 그 너머를 통하여 은유의 세계를 본다. 자연과 마주하면서 느끼는 것은 화려함이나 숭고함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겸손과 사랑과 같은 삶의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legato와 stacato>에서도 작가는 레가토와 스타카토의 어울림과 같은 서해와 동해를 바라보면서 숭고한 삶의 진리와 지혜를 얻고자 한다.


   레가토와 스타카토의 어울림에서 웅숭깊은 음곡을 떠올릴 수 있는 건 뜻밖이다. 서해와 동해의 조화는 웅장한 한 판 아악마당 아닌가. 개펄이 발산하는 은은한 울림과 깊고 거친 듯한 파도 소리로 조화를 이룬 바다는 바다만이 아닌 웅대한 신전神殿, 숭엄한 제전祭典을 방불케 한다. 그윽하고 장엄한 울림소리를 하는 신전. 개펄이 있는 곳에 신전이 있다. 날카로운 이빨 같은 파도가 물어뜯는 바닷가 바위 끝에도 당당하고 오롯한 신전이 있지 않겠는가. 당堂이 있어야만 신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당이 있고 없고가 아니다. 우러러 기도하고 생각하는 곳이 신전이며 그 당이다. 개펄은 서해안의 신전이다. 덩달아 거친 파도 소리는 동해안의 신전이라고 말하고 싶다. 장엄미와 엄숙미의 절정인 신전. 장쾌한 자연의 질서이며 도저한 엄숙미와 그 아릿함이다.


   서해와 동해가 레가토와 스타카토를 통하여 이루어내는 장엄미와 엄숙미는 바로 장쾌한 자연의 질서이며 도저한 인생의 의미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작가는 “서해에서 개펄을 보고 비로소 서해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진흙처럼 엉겼던 생각이 풀린다고 말할 수 있다. 침묵이며 영원한 적막의 어머니인 개펄, 보고 있어도 또 눈에 삼삼한 개펄이라고 말하는 내 안에 적립積立되는 개펄을 찬찬히 본다.” 서해 개펄을 바라보면서 작가는 비로소 삶과 세상에 대한 ‘생각 풀기’를 이루게 된다.
<legato와 stacato>는 음악에서 레가토와 스타카토의 조화와 종합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듯이, 인생에서 어둠과 빛, 여성과 남성, 높음과 낮음의 조화와 융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차은혜, <선 지키기>

   <선 지키기>의 모티프는 ‘선’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선을 지킨다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눈에 보이는 선은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쉽게 무시하거나 함부로 넘어섬으로써 갈등과 곤경에 처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화자는 네 살배기 손자가 그어놓은 선을 통하여 그 의미와 중요성을 새롭게 깨닫는다.


   네 살배기 손자 녀석도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단호했다가도 더러는 유연한 손자 녀석의 모습을 바라보며 엉뚱한 생각으로 고개를 들게 한다. 선, 선, 선, 선…. 이 선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제어하는 것인지 녀석은 알기나 할까. ‘선’을 안다는 것은 자기의 세계를 안다는 것이고, 또 나와 남을 의식하고 산다는 것이며, 많은 것들을 막고 있는 것을 알까. 네 살밖에 되지 않는 손자가 벌써 이 골치 아픈 문제에 빠져들고 있다는 데에 소름이 돋는다. 상대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영역을 지키려 함은 소유의 개념을 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화자의 말대로 “‘선’을 안다는 것은 자기의 세계를 안다는 것이고, 또 나와 남을 의식하고 산다는 것”이다. 화자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것도 선을 함부로 넘어서 생긴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상대는 도로 바닥에 하얀 선을 그으며 화자를 향해 ‘중앙선 침범’이라고 눈에 힘을 준다. 중앙선을 넘는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과 규범으로 정해진 선을 넘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든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서든 선을 침범하고 선을 위반함으로써 많은 갈등과 불행은 초래된다. 지금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는 ‘미투 운동’이라든가 정치가들이 겪는 이런저런 불행들도 모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 생긴 일이 아닐까 한다.
   그렇지만 선이 개인적 사회적 규범으로 존재해야 하지만, 그것은 때로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필요악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지나친 ‘선 긋기’가 가정과 사회를 규범과 규율이 지배하는 경직된 사회로 만들기도 하지만, 일정한 선 긋기가 모자라면 또 다른 갈등을 낳게 된다. <선 지키기>에서 가족 간의 갈등도 분명한 선 긋기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생기게 된 것이다.


   손주를 안아 보겠다고 하니, 며느리가 막는다.
   “손 닦고 옷 갈아입고 만지세요.”
   자매 딴에는 단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니 딸처럼 지내겠다고 생각한 것이 문제였다. 둘 사이의 선이 명확하지 않아 불신의 아픔이 컸던 것 같다. 밀착되어 지내면 좋지만 간격이 없다 보면 상대에 대한 배려를 잊을 때가 있음을 까맣게 잊게 된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서로 배려하는 것이 신뢰를 지속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삶도 조금은 밀쳐놓고 이만치서 선을 지키며 바라볼 수 있는 거리라면 부딪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사라고 하더라도 선이 명확하지 않아 불신의 아픔이 생기기도 하고, 간격이 없다 보면 상대에 대한 배려를 잊을 때도 있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서로 배려하는 것이 신뢰를 지속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삶도 조금은 떨어져서 선을 지키며 바라볼 수 있다면 서로 부딪치거나 갈등하는 일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화자의 말대로 슬기롭게 선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면서 어려운 일이다.
   <선 지키기>는 ‘선’이라는 개인적 사회적 관념을 구성하는 요소를 수렴시켜 서사적 인지소로 채택함으로써  텍스트의 중심 모티프로 작용하게 만든다. ‘선’이라는 관념의 표상에서 비롯된 선의 서사적 모티프는 하나의 인지 대상의 양태로 작용하고 있다. 작품에서 제시되는 ‘선’의 은유적 도식은 에피소드에서 반복해 환기되면서 서사 진전의 동력이 되는 인지소로서 기능한다. 또한 ‘선’으로 환치된 은유적 도식은 개인적 사회적 의미망을 수행하며, 이를 통해 선의 서사적 구심과 원심의 구도를 가늠할 수 있게 만든다. <선 지키기>는 할머니와 손자 사이의 선을 둘러싼 작은 에피소드에서 출발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와 세상이 생각해야 할 거대담론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 수필을 통한 서사적 담론은 개인적 상념이나 정서를 단편적이거나 직관적으로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일정한 공적 담화 형태를 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대화적 소통 상황을 전제하는 서사에서는 어떠한 경험이나 감정이라도 그것이 사적인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공적이고 사회적 담론의 형태로 발전하는 이야기가 됨으로써 유효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따라서 수필에 쓰인 은유는 시에서 쓰이는 그것보다는 더욱 구체적인 삶의 방편으로서의 은유에 근사한 양태이어야 한다. 삶의 보편적 진리나 실재를 더욱 구체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작품의 자장 내에서 창출되는 서사적 은유의 양상은 더 풍요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노력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일상성과 개인성에 빠진 우리 수필은 높은 단계로 진화할 수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선 지키기>는 일차적으로 사적 은유라는 소극적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사회적 은유를 위한 적극적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선을 통한 서사 모티프를 떠받치는 중심축으로서의 선을 통한 공적 사회적 은유의 전략들을 주목할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을 통해 드러나는 은유의 형상들은 삶의 과정에서 지켜야 할 개인적 차원은 물론, 사회적 문화적 규범의 전제로서의 의미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문학작품에서 은유적 전략은 흔히 채택되고 있지만, 그것이 사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공적 사회적인 은유적 담론으로 구성될 때에야 더욱 깊은 의미를 낳을 수 있게 된다.


나오며
   수필은 삶의 이야기를 통해 타자와 소통을 나누고자 하는 한 편의 서사이다. 사람들은 서사를 통해 삶의 경험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어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되며, 그 문학적 자질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교감을 활성화하는 방편으로 감성과 상상이 관여되는 은유에 주목하게 된다. 은유는 응집된 감성과 사유의 면면을 다른 대상이나 개념에 투사하여 의미체로 변환하려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런 문학적 기제를 통해 소통을 도모하는 심상과 상상에 조응하면서 서사적 소통의 경로는 확장된다.
   은유는 인간의 마음 상태를 엿보고 마음을 나누어 기본적인 소통 기제를 활성화하려는 서사적 전략이다. 그런 전략을 통하여 소통 국면을 섬세하고 정교한 기술 양태로 제시하여 감성에 접근할 경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게 된다. 서사는 은유를 통하여 감성과 상상의 기제를 위한 소통 국면을 최적화할 수 있다.
   요컨대 인간의 마음에 관여된 현상과 정신적 활동은 은유의 도입과 활용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진전을 이루는 문학적 조건을 형성하게 된다. 실존적 한계에 봉착한 현존재가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고 현상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감정과 사상을 통해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삶의 지평을 열고자 모색하는 문학적 활동은 은유를 통하여 보다 풍요롭게 기능할 수 있게 되고, 이때 은유로써 문학작품의 모티프의 의미와 공간은 더욱 확장할 수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수필에서 은유의 활용은 삶의 경험을 새로운 차원으로 구성하고 제시하는 효과적인 문학적 전략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