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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5월호, 통권199호 I 세상 마주보기] 액땜 - 지홍석

신아미디어 2018. 6. 29. 08:59

"이런저런 심란한 생각에 거실의 서랍장을 열어본다. 그곳에는 아직도 액정이 파손된 채로 카메라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판매한 기업의 책임은 과연 언제 어디까지인지 그 해답을 요구하면서."







   액땜    -    지홍석

   관공서에서 날아오는 우편물은 폭발물이다. 좋은 일보다는 좋지 않은 일로 날아오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아서다. 그래서 가급적 법규를 위반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경찰서의 우편물, 교통범칙금 통지서다.
   이번에는 또 어떤 죄목일까. 통지서를 개봉하기 전에 미리 상상을 하면서 지나간 날을 찬찬히 되짚어 보지만 딱히 위반한 내용은 없는 것도 같다. 거기다가 근래엔 건강을 핑계 삼아 서너 정거장을 일부러 더 걸어가, 지상철이나 시내버스를 타고 사무실로 출퇴근했던 날이 더 많지 않았던가.
   그러나 간절한 바람은 언제나 나를 외면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범칙금 통지서다. 위반한 장소는 동대구로의 범어네거리와 두산오거리 사이. 규정 속도 60킬로 도로를 71킬로로 달렸다고 범칙금 4만 원이 부과되었다.
   처음엔 그곳을 다녀왔는지조차 아리송했다. 그랬기에 통지서의 내용에 잠시 의심의 눈초리도 보냈고. 지나간 날을 몇 번이나 더 강제로 소환하고서야 비로소 그날이 생각났다. 수성구에 위치한 S전자 서비스센터로 가는 길목으로, 고장 난 카메라를 수리하기 위해 딱 한 번 그 도로를 통과한 적이 있었다.
   새해 첫날에 일출여행을 다녀왔었다. 장소는 기장의 연화리. 등대 사랑이 유별난 곳으로 다양한 등대를 감상하며 일출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었다. 대부분의 등대가 기단과 탑신, 조명시설 등으로 단순화되어 있지만 연화리의 등대들은 조금 색다르다. 디자인을 유별나게 해 수많은 탐방객들을 끌어모았는데 닭벼슬, 월드컵, 갈매기, 야구공, 장승, 젖병 모양 등이다. 그 중에서도 신년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젖병등대는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차량도 사람들도 북새통이었다. 나도 그 속의 일원이 되어 젖병등대가 있는 선착장으로 나아갔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인파라 좋은 일출장소를 선점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던 와중에 바닷가 쪽으로 겨우 사람 하나가 빠져나갈 정도의 틈이 생겼고, 억지로 몸을 밀어넣었는데 갑자기 발등에 무엇인가가 툭 떨어졌다. 순간 아차하고 확인해보니 카메라가 시멘트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순간포착을 위해 망원렌즈에 후드를 끼우고 카메라 가방 속에 반쯤 걸쳐서 집어넣었던 게 화근이었다.
   급히 카메라를 점검해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액정에는 작은 실금이 여러 개 나있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섬광 한줄기만 겨우 보였다. 일출을 보면서 소원을 빌고 올 한 해 늘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랐는데, 정초부터 일이 꼬이는 것 같아 괜히 속이 상했다. 그러다가 방금 일어난 이 사고도 어떻게 보면 올 한 해의 액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마음이 조금 평안해졌다.
   일출여행을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다. 파손된 액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프지만 고장 난 카메라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무실 가까이에 있는 S전자 서비스센터를 찾았다. 그런데 시내에서 가장 큰 센터인데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수리하는 부서가 없다고 한다. 몇 년 전 그룹차원에서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해 카메라 사업을 정리했다고 하더니 그 여파가 나타난 모양이었다.
   기분이 상해 카메라 수리를 다음날로 미루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안내원이 일러준 대로 동대구로에 있는 수성구 서비스센터를 찾기로 했다. 거리가 멀긴 했지만 이왕 카메라를 고치려고 마음먹었고 기동성을 위해 일부러 차까지 가지고 온 터였다. 그런데 결국에는 엎친 데 덮친 격이 되고 말았다. 또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카메라의 액정이 오래전에 생산 중단되어 전국에 제고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카메라 수리기사의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카메라 사업이 중단되면서 많은 수리기사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지금 센터에 남아있는 기사는 자신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민망해 하던 그가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고객이 직접 포털 사이트에 카메라를 검색해 싼 가격에 나오는 동일한 카메라의 몸체를 직접 구하라고 했다. 액정을 교환하는 데 드는 비용이 약 15만 원 정도, 거기다 몇 만 원만 더 보태면 현재 카메라보다 더 새것으로 장만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 버렸다. 부품을 교체하러 갔다가 아예 카메라 몸체를 통째로 바꿔야 될 판이다. 그러한 상황이 참으로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했다.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인정하고 선호하는 C와 N 카메라 대신에 S 카메라를 선택했던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비록 후발주자지만 우리나라 기업의 제품이고, 전자와 반도체, 휴대폰을 만드는 기술력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러한 것들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혀버렸다고나 할까.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몇 년 전에는 타사 카메라와는 전혀 호환이 되지 않는데도 망원렌즈까지 따로 구입했었다. 그것도 백만 원에 근접하는 금액을 지급하고서 말이다.
   앞으로 닥쳐올 모질고 사나운 운수를, 다른 가벼운 곤란으로 미리 겪음으로써 무사히 넘기는 것을 액땜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액땜이 칡덩굴처럼 얽혀 한 달간이나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과연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도 알 수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다. 모든 액땜의 시작도 알고 보면 아주 사소한 작은 부주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다만 그 잘못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인정하지 않고 액땜이라는 다른 구실로 대신하였던 것뿐이다.
   이런저런 심란한 생각에 거실의 서랍장을 열어본다. 그곳에는 아직도 액정이 파손된 채로 카메라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판매한 기업의 책임은 과연 언제 어디까지인지 그 해답을 요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