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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5월호, 통권199호 I 세상 마주보기] 앞집 여자 - 이용미

신아미디어 2018. 6. 29. 08:51

"아침에 끼우는 의치의 짧은 통증과 답답함이 또 일었다. 순간의 감정에 호들갑을 떨다가 망각의 강에 금방 빠져 버리는 허망한 날들. 난 여전히 무언가 하고 싶다는 욕구만 앞설 뿐 아무런 대안도 없이 감정의 늪을 헤매고 또 헤맨다."







   앞집 여자    -    이용미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형님’이라고 했다. 장성한 아들 며느리가 있는 데다 화장기라고는 전혀 없이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올린 모습이 나보다 서너 살은 많은 것 같은데 꼭 그렇게 불렀다. 같은 골목에서 골목으로 몇 번의 이사를 하며 좋지 않은 소문 속에 앞집으로 왔을 때는 몇몇 사람들이 내게 여러 가지로 조심하라는 당부까지 했다. 하루는 옆집 〇〇 엄마가 “그 집 불쌍해서 어떡해요? 둘째 며느리가 암 수술 후 다른 곳으로 전이돼서 치료 중이래요.”라고 했다. 며칠 전 뽀얗고 애티나던 애엄마의 몰라보게 여윈 모습과 함께 앞뒷집 살면서 너무 소원하게 지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한 번도 내왕 없던 집에 불쑥 찾아가 어찌된 일이냐고 묻기도 어려워 여러 식구의 시끌시끌한 소리를 담 너머 들으며 무사하구나 짐작만 했다. 그 얼마 후, 급하게 무언가를 찾은 뒤 어질러진 방 정리를 하는데 앞집 여자가 찾아와서는 “우리 둘째 애 좀 살려야겠어요.” 하며 무슨 말이냐고 물을 틈도 주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그간의 여러 사정을 줄줄이 털어놨다.
   어려서 아버지뻘 되는 임자 있는 남자를 만나 아들 둘 낳고 살아온 세월이 30년째란다. 다른 생각은 해 보지도 않고 팔자려니 하고 사는 동안, 본댁이 찾아올 때마다 뜯긴 정수리 부분 머리가 헤싱헤싱한 채 지금도 두통에 시달린다고 했다. 더구나 우리 앞집으로 온 뒤부터 우환이 겹쳐 계약기간이 남았지만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대신 해달란다. 밤에 빼놓았던 의치를 아침에 끼울 때 느껴지는 짧으면서 강하게 조여 오는 답답한 통증이 잇몸이 아닌 가슴에 일었다. 무심히, 아니 일부러 가까이 가지 않으려 몸을 사렸던 날들이 둘둘 말리고 똘똘 뭉쳐진 부피의 미안함으로 다가왔다.
   알고 보니 나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인데, 그동안 겪어온 힘겨웠을 세월의 무게에 눌려 그렇게 보였나 보다. 남의 이목을 피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쪼들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신용도 잃었고, 남들의 구설수와 손가락질을 받았겠지. 두 아들 역시 사춘기 때 흔들려 학업마저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식도 못 올린 채 살고 있는데 그중 작은며느리가 병중이라고 했다. 지금은 남편의 발길마저 끊겨 차라리 마음은 편해서, 이제 좀 안정하고 살려나 싶으니까 이런 일이 생긴다며 벌게진 눈을 연신 문지르다 갔다.
   이튿날은 마침 20여 년 계속되는 같은 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친목 모임 날이었다. 큰일이 있을 때마다 몸 사리지 않고 도움을 주고받는 친근한 이웃들을, 앞집 여자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았다. 쭈뼛대며 뒷걸음치고 싶은 낯섦과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당황스러움은 지나친 감정이입이었을까.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공동 피해자라도 되는 양 그녀를 단죄하려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한 입에서 물려나온 한 소리에 한마음이 되어 더 가슴 아픈 삶을 살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죄 없는 자가 그 여자를 치라.’는 성경 속 이야기를 인용하며 이제부터 다 같이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자거나 아니면 나만이라도 그녀 편에서 생각하겠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옮기려는 집 전세금도 올라버려 그냥 살 수밖에 없다니 내가 할 수 있는 부탁까지 필요가 없어졌다.
   환자인 어린 며느리가 원하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해 가슴 아파하는 한 많은 앞집 여자. 도와줄 수 있는 아무런 방법도 찾지 못한 채 잊고 산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오늘 낮 우연히 두 여자를 만났다. 택시를 기다리는 듯 길가에 나란히 서 있는 그들은 여전히 화장기 없는 민얼굴에 머리를 올린 앞집 여자와 핼쑥한 얼굴에 모자를 쓴 그녀의 며느리였다. 끼고 걷던 남편 팔을 풀고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이젠 앞집 여자가 아니었다. 탐스럽던 머리 길게 늘어뜨렸던 며느리가 빠진 머리를 가리려고 아무렇게나 쓴 밤색 털모자. 아침에 끼우는 의치의 짧은 통증과 답답함이 또 일었다. 순간의 감정에 호들갑을 떨다가 망각의 강에 금방 빠져 버리는 허망한 날들. 난 여전히 무언가 하고 싶다는 욕구만 앞설 뿐 아무런 대안도 없이 감정의 늪을 헤매고 또 헤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