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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5월호, 통권199호 I 세상 마주보기] 흔들의자 - 변순자

신아미디어 2018. 6. 26. 09:02

"말을 너무 아끼다 보니 말을 잃게 되었다. 말을 잃으니 대화하는 방법도 아득해져 버린 세대. 지속되는 대화의 단절이 두려워진다. 양극에서 서로를 벼랑으로 밀어내는 모양새가 어지러워 눈이 저절로 감긴다. 이참에 흔들의자를 하나 더 들이고 싶다. 나란히 앉아 얼굴 맞보며 웃고 싶다. 그 아늑한 품에 안겨서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을 얼굴. 그 얼굴과 언제까지나 마주 보며 호시를 타고 싶다."







   흔들의자    -    변순자

   다소곳이 흔들의자에 앉는다. 털썩 의자에 몸을 누이고 앞뒤로 요동치는 시소놀이를 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남천만의 바다 물빛이 유난히 아름답거나 하면 은연중 조신한 자세가 되기도 한다.
   가죽 등판에서 사박사박 백사장을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난다. 발자국이 깊은 노화의 흔적을 품고 있다. 주름투성이의 가죽에 눈길이 닿는 순간 가슴이 아릿하다. 조쌀했던 모습은 언제부터인가 낭패스러울 만큼 낡은 얼굴이다. 노화의 흔적으로 세월의 실체를 더듬는다.
   당혹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추스를까 얼른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 가구와 집기 가운데 하나씩 들어낼 정리의 대상을 선별하는 중이다. 그 명단에 올려야 하나, 아니면 리모델링하여 계속 사용할까. 일일이 추억을 들출 수도 없는 진득한 덩어리 하나 울컥 치밀어 오른다.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며 흔들의자에 앉는 것이다. 가벼이 등을 쓸어내리듯 흔들리는 리듬으로 안정을 되찾는다. 흔들의자가 남편의 품속 같다며 궁굴린 손잡이를 어루만져 본다. 바스러질 듯 낡은 가죽 등받이도 가만히 쓰다듬는다. 이토록 까칠한 촉감이 되도록 그는 혼신으로 우리를 위해 그 자리를 지켜 주었다. 뼈대인 나무의 틀이 재빨리 용틀임하듯 기합을 넣는다. 근육질의 힘살이 봉긋 솟아오른다. 아직 건재하다고 으쓱거리며 더 힘껏 굴러보라 한다. 능청스러운 대응이 미쁘다. 좌우 높다란 기둥의 돔형 장식이 의자의 옛 품격을 지키며 안간힘을 다한다. 잠시 나 자신의 품격을 생각하게 한다. 항상 뒤돌아보게 하는 사물들이 옆에 있어 주어 고맙다. 꽃봉오리 조각의 튀지 않는 간결미가 질박해서 편안하다. 

 
   흔들의자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여송연을 피울 수 있는 노년을 꿈꾸던 남자를 만났다. 조랑말을 타고 나가 한 바퀴 농장을 휘돌아보고 온 뒤, 느긋하게 신문을 펼쳐 들고 흔들의자에 안기고 싶다고 했다. 그의 꿈은 조금씩 빛이 바래져 갔지만 어느 사이 온전히 내게로 옮겨 와 있었다. 희망은 이룰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우선 한 바퀴를 돌려면 시간이 걸릴 농장보다, 조랑말보다, 흔들의자를 먼저 들이자고 마음먹었다. 시간을 두고 뜸을 들이며 애를 쓴 만큼, 흡족한 흔들의자 하나를 들일 수가 있었다.
   세기의 영웅이었던 윈스턴 처칠. 노년의 그도 흔들의자 깊숙이 앉아 여송연을 입에 물고 그윽한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그분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본받고 싶은 풍부한 유머감각과 흔들의자와 여송연을 입에 문 만년의 그는 그이의 롤 모델이었지 싶다.
   흔들의자에 깊숙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본다. 물결이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을 그린다. 강풍이 물살을 사정없이 휘몰아치며 그림을 그려낸다. 광풍이 일 때마다 보리밭은 이리저리 휩쓸리며 출렁거린다. 보리밭을 즐겨 그리는 이숙자 화백은 청보리 이삭의 낱알과 그 껄끄러운 까끄라기까지 일일이 헤아려 세필로 그려 넣었다. 그녀는 몇 달을 수고하여 작품 한 점 그려놓고 성에 차지 않아 그림 속에서 서성인다. 프레임에 갇힌 그림 속에서 간구하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보리밭 이랑의 술렁거리는 음향까지도 담으려는 의지마저 엿보였다. 작품에 대한 무한한 욕망 때문에 나신의 포즈로 보리밭에 누워있는 여인은 그녀 자신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일렁이는 보리밭의 술렁거림에 바람이 외려 멀미를 한다.
   흔들의자는 혼자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기능이다. 다른 가구들은 고착되어 스스로 이동할 수 없다. 능동적인 흔들의자는 넓은 공간의 소유를 원한다. 때문에 다른 가구와는 틈을 두고 배치되거나 혼자 외따로 있기를 원한다. 혼자 노는 것에 익숙하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술을 마시고, 혼자 노는 것에 길이 든 사람들처럼 혼자여야 편안하다. 코인을 넣고 혼자 노래 부를 공간을 찾는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스마트 폰이다. 우리는 대화의 방법을 잊어버린 세대다. 기계와는 상통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다고 기계와의 공생을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을 너무 아끼다 보니 말을 잃게 되었다. 말을 잃으니 대화하는 방법도 아득해져 버린 세대. 지속되는 대화의 단절이 두려워진다. 양극에서 서로를 벼랑으로 밀어내는 모양새가 어지러워 눈이 저절로 감긴다.
   이참에 흔들의자를 하나 더 들이고 싶다. 나란히 앉아 얼굴 맞보며 웃고 싶다. 그 아늑한 품에 안겨서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을 얼굴. 그 얼굴과 언제까지나 마주 보며 호시를 타고 싶다.
   ‘인간성은 변할 수 있다.’는 프랭크 부크먼 박사의 외침을 기억하면서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고 싶다. 좋은 말이 아니면 입을 다무는 묵언의 화법에 익숙해지고 싶다. 흔들의자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