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05월호, 통권199호 I 세상 마주보기] 인큐봉지를 벗으며 - 김정아
"앞산이 벌써 봄빛이다. 미처 이름을 갖지 못한 수많은 초록이 아름다운 숲을 이룬다. 가슴을 쫙 펴고 봄바람을 마신다. 싱그러운 바람이 온몸으로 퍼진다. 내일은 지인과 올망졸망 멋대로 자란 채소들을 만나러 시장에 가련다."
인큐봉지를 벗으며 - 김정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즐겁지만 더러 부담스럽기도 하다. 모임 시간이 한없이 길어질 때는 불안해지기도 한다. 음식 접시는 비어가고, 이야기는 쌓여간다. 집안 대소사나 아이들의 공부 얘기를 풀어놓으며 웃기도 하고 한숨 쉬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왁자지껄했던 분위기가 훑고 간 빈 마음은 늘어진 그림자처럼 쓸쓸하다. 눈길은 진열대의 물건들을 스치는데 마음은 오늘 하루를 되짚느라 분주하다. 외출했다가 우산이나 스카프를 잃어버리고 온 것처럼 마음 한 자락을 빠뜨린 것만 같다.
수북하게 쌓아올려진 야채와 과일들이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노랑, 빨강의 파프리카와 연둣빛 오이와 호박은 계절을 잊게 한다. 꽃샘추위 같은 자연의 순리는 이제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진열대에 쌓여 있는 호박의 모양이 하나같이 비슷하고 갸름하다. 찌개에 넣을 거라 모양이 중요하진 않지만 이왕이면 예쁜 것으로 사고 싶어 꼼꼼히 살핀다. 호박이 싱싱한지, 매끈하게 완만한지 살피는데 나의 마음은 아직도 모임을 끝내지 못한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일은 중요하다. 그 속에는 나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가끔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쉽지 않다. 분위기에 젖어 부담 없이 뱉은 말들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너무나 내 속을 드러내버린 것은 아닌지. 내 자랑을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 이런 후회의 감정은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부담스럽게 할 때가 많다. 마치 부모님의 말을 어기고 가슴 졸이는 아이처럼 불안해진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하다.
야채를 다듬는 손길을 빨리한다. 비닐이 잘 벗겨지지 않는다. 터질 듯이 호박의 온몸을 감싸고 있다. 비닐과 표피 사이에는 한 방울의 공기도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꽉 조이는 비닐 옷은 왜 입혀 놓았을까. 상처 나지 말라고 그런 것일까. 답은 바로 있었다. 비닐에 “인큐봉지에서 키워 육질이 단단하고 맛과 향이 좋다.”고 쓰여 있다. 인큐봉지……?
어린 호박이 수정이 되면 꽃을 떼어내고 봉지를 씌운다. 봉지 규격에 맞게 자라면 판매가 되는 것이다. 봉지를 씌우지 않으면 두께가 일정하지 않고 약간 휠 수도 있으므로 씌워야 상품성이 높다는 것이다. 호박의 양끝은 살이 밀려 볼록한 모양새다. 질긴 비닐을 보니 내 마음까지 옥죄어든다. 인큐봉지에 칼집을 내며 조심스레 벗겨보지만 쉽지 않다. 어찌나 찰싹 붙어 있는지 호박의 몸에 상처가 난다. 투명한 진액이 눈물처럼 맺힌다.
상품성을 갖는다는 것은 사회적 기준에 순응하는 일이다. 순응은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며, 비단 물건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순응은 안락한 삶을 의미하며 최고의 삶을 부여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대가를 치르게도 한다.
한 동이의 눈물을 쏟아야 만들어진다는 전족은 천년을 버텨왔고, 가는 허리와 풍만한 가슴을 위해 코르셋을 착용하고 갈비뼈까지 제거하는 문화가 존재했다. 이러한 문화는 신체적 기형을 만들 뿐 아니라 정서적 그림자를 짙게 한다. 사회적 순응을 위해 이러한 가학적 문화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위한 농부의 선택, 그것이 인큐봉지다. 어린 호박에게 봉지를 씌우는 농부의 손길 뒤에는 최고만을 찾는 소비자의 눈빛과 선택된 것 외에는 가차 없이 버리는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호박이 겪었을 고통에 대해 뭐라 위로할 수 있을까. 그저 나 또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어설픈 변명만이 입안에서 맴돌 뿐이다.
학창시절 나는 말없이 조용한 아이였다. 나름은 소통의 방식으로 선택한 침묵이었으나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벙어리처럼 무수한 말들을 가두었다. 눈치가 생기고부터는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것을 먼저 배웠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것이니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고, 남을 험담해서도 안 되며 자기 자랑을 해도 안 된다는 가르침에 따라야 했다. 이러한 정언 명령은 가슴깊이 철필로 새겨지고 양심의 회초리가 되었다. 마음에 갇힌 말들은 마음뿐 아니라 몸까지도 아프게 한다.
아주 더 어린 시절, 부지깽이와도 대화를 나누고 낯선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누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나의 본성은 말하기를 좋아하고 그래야 삶이 즐거운 성향인 것 같다. 그러지 않다면 힘들 이유도 없을 것이다. 말이 많아서 어머니의 걱정을 끼치던 때.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의 조합이다. 각자 개성 있는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 즐겁다. 가끔 실수를 하면 좀 어떤가. 인큐봉지처럼 하나의 틀을 만들어 똑같은 호박으로 키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다. 각자의 본성에 따라 장점을 살려 생기발랄한 매력이 넘치는 삶이면 어떠랴. 나의 삶이 그러면 좋겠고, 자라나는 아이들 또한 제 멋에 겨운 삶이면 좋겠다. 이제는 편하게 모임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니 하고 싶은 말들이 가득해진다. 지인의 전화번호를 찾으며 수다 떨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앞산이 벌써 봄빛이다. 미처 이름을 갖지 못한 수많은 초록이 아름다운 숲을 이룬다. 가슴을 쫙 펴고 봄바람을 마신다. 싱그러운 바람이 온몸으로 퍼진다. 내일은 지인과 올망졸망 멋대로 자란 채소들을 만나러 시장에 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