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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5월호, 통권199호 I 지상에서 길찾기] 용서하옵시고 - 이용구

신아미디어 2018. 6. 19. 13:31

"나는 그 어느 해 적금 탄 겨울을 잊지 못한다. 아껴서 알뜰하게 모은 피 같은 돈을 일순간 날려버린 허망함이 내 생활의 교훈처럼 남아 있다. 벗고 살았던 일도 없는데, 내 옷을 한 번 사 보겠다는 호기豪氣가 좋은 수업료가 되었다."







   용서하옵시고    -    이용구

   어느 해 12월이었다. 열심히 일해서 모은 1년 만기 적금을 타는 날이 다가 오고 있었다. 마침 연말이 되어가니 성금도 내고 어머니께 영양식도 사 드리겠다는 등 여러 가지의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때였다. 마치 그 2백만 원이 2천만 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은 부풀었다. 이젠 나도 오로지 남을 위해 귀하게 돈을 쓸 것이라는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그런데 은행을 나오고 두어 시간 뒤 내 양손엔 비닐 쇼핑백이 무겁게 들려 있었다. 아, 정말 순식간에 그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일을 벌이고 말았다. 옷에 환장한 여인처럼 코트 두 벌, 스웨터도 세 개에 더하여 잡다한 것들을 골랐다. 옷집 사장이 우리 집 옷은 싸다며 권하니 정말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눈에 띄는 대로 낚듯이 담았다. 그해 겨울은 내가 제일 예쁘고 따뜻하게 보낼 것만 같았다.

   동생은 멋쟁이다. 감각도 나와는 달라 어지럽게 진열된 곳에서도 척하면 역시나 격조 있게 어울리는 것을 골라낸다. 어깨 품과 허리 라인이 나와는 다르기 때문일까. 어찌어찌 코디해도 딱 맞춤인 것만 같다. 진작 향기도 좋은 동생 방을 기웃거리면서 이것저것 뭐라도 입어봤더라면 나도 선녀가 됐을지 모른다. 또한 모자를 써 봤으면 얼굴도 작아 보이고, 스카프로 굵은 목을 가늘게 바꿔보는 재미가 쏠쏠했을 텐데 도통 관심이 없었다.
   나는 무슨 팔자인지 혼자서 아이들을 키웠다. 운 좋게 하늘의 축복으로 일하는 재미도 있고, 주말이 따로 없을 정도로 바빴다. 철이 바뀔 즈음이면 동생은 옷을 한 보따리씩 싸 왔다. 딴엔 일하러 다니는 제 언니의 행색이 초라한 것을 내심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언니, 이건 요거랑 입고, 이건 이렇게 입어.” 얌전한 색깔로 편안하게 일할 만한 디자인을 구색 갖춰 몇 벌씩 걸어 두고 가곤 했다. 동생이 일 때문에 우리 집에서 오랫동안 지낸 적이 있다. 그때 짬짬이 살림도 해 주고, 강아지도 돌봐 주고, 제 언니를 살뜰하게 보살펴 주었다. 이불 정리를 마치고, 제철 정리도 안 된 옷을 정리해 주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동생이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갑자기 왜 그래?” “언니, 이거 다 내 옷이야.” 동생은 울고 있었다. 날더러 살림도 지저분하게 한다고 흉을 볼 때는 언제고. 가져다 준 옷도 때 맞춰 꺼내 입지 못하는 주변머리 없는 제 언니가 가엾었는지. 쉬는 날도 없이 일만 하는 제 언니가 딱했을까. 그래도 자라나는 조카들을 원망하진 않았겠지.
   이십대에 나는 아버지의 커다란 티셔츠도 아무런 꺼림 없이 입고 다녔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도서관을 드나들면 공부가 더 잘되는 것만 같았다. 무엇인가 어떻게 생각해서 봄날처럼 입고 나오면 활동하기가 오히려 불편했다. 길을 지나다가 유리문을 흘낏 보면, 나는 나인데 내가 아닌 듯 차림이 어색했다. 맵시가 잘 나지도 않지만, 작은 키 탓도 아니다. 봄 처녀처럼 섹시하기를 애당초 꿈꾼 적도 없다. 당당하게 내가 좋은 모습으로 다니는 것이 가장 나답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나 지금이나 시간을 아껴 쓰는 나는 씩씩하게 걸어야 속이 후련하다. 면 셔츠랑 면바지 입고 심플한 코트 하나 입어야 제격이다.

 

   나는 그 어느 해 적금 탄 겨울을 잊지 못한다. 아껴서 알뜰하게 모은 피 같은 돈을 일순간 날려버린 허망함이 내 생활의 교훈처럼 남아 있다. 벗고 살았던 일도 없는데, 내 옷을 한 번 사 보겠다는 호기豪氣가 좋은 수업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