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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5월호, 통권199호 I 지상에서 길찾기] 검은 고양이 네오 - 박길중

신아미디어 2018. 6. 14. 21:59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제 갈 곳을 찾지 못하다가 다시 그 바람의 힘으로 자기가 떨어졌던 나무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든다. 그러고는 마저 남아 있는 이야기에 꽃을 피우느라 도란거린다. 한 몸처럼 다정스럽던 네 주인이 떠난 자리에 이제 너마저도 떠나가 버렸으니 어찌하랴. 부르면 금방이라도 달려올 듯 날렵한 너의 모습만이 유리창에 부딪쳐 빗물로 흘러내린다. 나의 네오야, 나의 가을아."







   검은 고양이 네오    -    박길중

   네오야! 너의 주검을 불러본다. 그렇다고 다시 살아나 내 곁에서 재롱을 피우고 숨 쉬어줄 네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너의 이름을 간절하도록 또 부를 수밖에 없다.
   가을조차 고개를 숙이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해. 매일 자명종 되어 나를 찾던 반가움은 어디에다 두고, 괴이한 울음소리로 사람을 경계하며 피해 다니던 이해 못할 모습의 너를 껴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던 내내 나는 네 주인을 떠올렸다. 다행히도 고양이 감기라는 진단을 받고서야 목이 잠겨버린 이유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신령이 도왔을까. 돌아오는 길에 다정스레 너를 안고 찍은 사진 속의 네 주인이 얼굴을 내밀고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다. 네 주인이라면 어찌했을까.
   그러나 네오야, 너를 물려받아 네 주인처럼 정성으로 보살피고 애중愛重하던 마음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나, 오늘 떠나보내는 나의 마음은 이르는 곳마다 흔하디흔한 그런 고양이가 아니었음을 이제사 알 것 같다. 한낱 미물, 검정색 짐승으로만 보아온 너의 울음소리조차 예사롭지 않았던 것을 지금 슬퍼한들, 사무치는 그리움에 견줄 수 있으리오. 강산이 한 번 변하는 세월 동안 동고동락했던 주인을 잊지 못해 기다리던 애절한 심정을 내 어찌 알았으리요. 검정색 미물로만 단죄했던 못된 심사에 차라리 벌이라도 내린다면 달게 받고 싶다.
   네오야, 너를 물려받아 같이 일구어왔던 사모의 정이 사람보다 깊을 수가 있더냐. 오며가며 말 못하는 정을 자판에 수를 놓듯, 몸짓으로 발짓으로 한 올 한 올 심어놓고 너는 떠나갔다. 날이 가도 그 흔적 또렷하게 남아 사그라지지 않는데, 어찌할까. 텅 빈 수레 소리만 가슴팍을 덜컹거리며 가로지른다.
   네오야, 호동그란 황금빛 눈동자에 흐르던 너의 눈물자국은 기어이 내 가슴마저 무너지게 하여, 멍하니 거리를 헤매 다니다 기억조차 싫은 1월의 빈 하늘을 불러 세운다. 집으로 돌아와 너를 만날 때면 기다렸다는 듯, 너부죽이 재롱을 부리며 나의 시선을 고정시킬 때, 어린 시절의 네 주인과 닮은 귀여운 모습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진다. 온갖 사랑으로 너를 보살피고 길러주던 네 주인이 떠나간 지 5년여에 너마저 내 곁을 떠나가는구나.
   네오야, 신년의 부푼 꿈도 네 주인에게는 사치스러운 것이었던지, 고스란히 혼자만 품에 안고 허허로운 저세상을 앞서 떠나가던 날.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하염없이 폭설은 쌓였다. 세상사 참으로 기막히고 한 치를 알 수 없는 일. 꿈에도 없던 너의 주검을 마주치던 날 희끄무레 산천은 진동했다. 따스한 손길로 아아, 입김을 불어넣어 너의 얼굴을 마주하면 또렷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할 것 같았다. 나의 네오야!
   외딴집 옆을 지나가다 가끔 꼭 빼어 닮은 너를 마주한다. 흠칫 놀라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불러보고는 맞는지를 확인하려 든다. 그러나 이름이 너의 귀에 닿기 전에 모습을 감추는 것을 보고, 분명 네오가 아니었을 때 나는 너의 모습이 선명하던 도로 위를 또 한 번 떠올린다. 상처 하나 없이 이마를 숙인 채였던 가련한 모습. 타인들은 끝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주검으로 변해버린 네 주인의 모습과 그토록 닮았더냐. 능숙한 솜씨로 수많은 나날들을 건너다니던 길 위로 오늘도 때를 맞춰 걸어가던 그 길. 그러나 엄습해온 괴기스런 문명은 흉기로 돌변해 연약한 너의 심장을 불러 세우고 말았구나!
   가엾은 네오야, 나는 너를 처음부터 다시 사랑의 물로서 꽃을 피워 내고 싶다. 대중이 출입하는 그 수많은 눈길들도 박동이 멈춰버린 너의 모습을 꿈을 꾸듯 바라만보고 있었을까. 아니 설마로 외면하고 있었을까. 너와 같은 생김새를 가진 모습들에 생존경쟁의 살벌함을 나누려 했던가. 묻고 싶다. 나는 너에게 저 하늘나라로 가는 꽃신을 신기고 싶지 않다. 네오야!
   조용히 눈을 감고 너의 이름을 다시 부른다. 덧널 속에 누워있는 너의 주검은 주인을 두고 떠나는 모습으로 선명하다. 한 줌 쇄골로 돌아올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먼저 떠나야 할 분명한 이유 없이 하직을 고한다면, 나는 그와 반대로 명분을 찾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더할 것인데, 이제 기억조차 흐릿해져 가고 있다.
   네오야! 나의 존재를 자랑스럽게 풀무질해주던 무거운 손짓 앞에 무지함조차 사치스러운 후회가, 거대한 해일이 되어 밀려온다. 가끔씩 마주치던 반가움은 속으로만 숨겨놓고, 기어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이 세상을 마감하던 날. 낯선 손님이 경계의 눈빛으로 나를 찾아 왔을 그때까지도 세상을 둘로 갈라놓을 일은 없을 거라고, 기발한 발상을 멋대로 가설했었지.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깨어진 장독이었다. 차라리 칼로 살을 베어 약을 바르고 붕대로 동여매어 아물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네오야! 나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네 주인과 한 몸이었던 그때를 떠올려 보련다. 성년의 길로 접어들던 길목에서 더 큰 꿈 하나를 키워보기 위해 떠났던 머나먼 타국. 낯설기만 하던 풍경에도 숨죽인 채, 주인의 뜻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속으로 절규하던 심정을 어찌 몰랐으랴. 너의 애절한 하소연을 애써 귀 닫고, 잘 적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압하던 비정한 심사를. 외면으로 이루어질 일이었다면 덜 야속하리라.
   네오야, 한 줌의 쇄골이 되어 내 이불 속으로 돌아왔을 때 애통한 심정은 다시 너를 살려내고 싶어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제 갈 곳을 찾지 못하다가 다시 그 바람의 힘으로 자기가 떨어졌던 나무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든다. 그러고는 마저 남아 있는 이야기에 꽃을 피우느라 도란거린다. 한 몸처럼 다정스럽던 네 주인이 떠난 자리에 이제 너마저도 떠나가 버렸으니 어찌하랴.
   부르면 금방이라도 달려올 듯 날렵한 너의 모습만이 유리창에 부딪쳐 빗물로 흘러내린다. 나의 네오야, 나의 가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