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05월호, 통권199호 I 지상에서 길찾기] 내 글짓기의 처음 - 문기욱
"이럭저럭 칠순의 중반에 서성인다. 여태껏 수필집 한 권 상재하지 못했다. 게으름일까, 아니면 용기가 없어서일까? 세월이 아쉽게 흘러가고 있다. 그동안 나의 글짓기는 ‘처음’만 있었을 뿐 미완성인 채로 집을 짓지 못한 채 건축의 재료만 여기저기 늘어놓은 공터 같다. 그런데도 글짓기는 내 정신의 오르가슴이며 영원한 해방구가 되었다. 나의 책읽기와 글짓기는 살아있는 내내 이어질 것이다."
내 글짓기의 처음 - 문기욱
만물이 이 세상에 생겨나면 ‘처음’ 곧 시작이 있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처음이 있기에 삶이 존재한다. 처음이 더러 중단되거나 소멸되기도 하지만 이어지면 한 역사가 된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국어시험시간에 ‘냐옹냐옹 ( )’이라는 괄호에 답을 넣는 문제가 나왔는데, 시험 도중에 나도 모르게 “냐옹냐옹 고양이” 하고 답을 큰 소리로 외쳐버렸다. 담임선생님께서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주의를 주셨다. 그렇게 한글을 배웠다.
상투를 튼 훈장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단정히 모으고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며 천자문을 외었다. 우리 사랑방에서다. 사랑방은 밤에는 동네어른들의 차지였지만 낮에는 비어 있었다. 그래서 방학 때면 훈장선생님을 모셔다가 보리 한 말씩을 내고 ≪천자문≫을 배웠다. 나는 우리 사랑방이어서 무료였다. 그렇게 한문을 배웠다.
나의 글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발표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느 날 옆집 아주머니께서 나를 찾아와 원고를 부탁했다. 초등학교 5학년 딸아이가 6·25전쟁기념 교내웅변대회에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일이어서 감당하기 어려워 사양을 하다가, 특별히 나한테 부탁한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슬며시 약속을 하고 말았다.
약속을 했으니 써보는 수밖에. 책상에 엎드려, 뭔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해 보지만 줄거리가 잡히지 않았다. 이걸 어찌하랴. 군대에 가본 경험도 없는 소년에게 전쟁 소재 거리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언뜻 6·25전쟁 통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6·25전쟁은 1950년에 발발했으며 내가 예닐곱 살 때의 일이므로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전북의 농촌인 우리 동네에도 인민군이 쳐들어왔다. 어른들은 동네를 지키기 위해 대창을 깎아 들고 경비를 섰다. 그런데 인민군의 앞잡이가 된 청년들이 몇 명 있었다. 9·28 서울수복이 되고 인민군이 철수하자 인민군에 협조했던 청년들은 뒷산 골짜기에서 참혹하게 총살을 당했다.
그때의 기억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밤을 새며 깨알 같은 글씨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끝에 원고를 완성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아주머니께 원고를 내밀자, 아주머니는 즉시 한번 훑어보셨다. 흡족한 표정으로 “나중에 자장면을 사주마.”고 했다.
며칠 후, 아주머니께서 환한 얼굴로 찾아왔다. 딸아이가 웅변대회에서 이등을 했다며 자랑했다. 일등은 선생님이 써준 원고를 발표한 학생이 차지했지만 사실 자기 딸이 훨씬 잘했다는 것이다. 내가 써준 원고 덕분이라며 나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자장면을 먹진 못했지만 마치 내가 입상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난생처음 쓴 장문의 글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 후, 겉멋이 들기 시작했다. 문학도가 되겠다며 형과 누이들이 읽는 시집과 소설을 훔쳐 읽고 아버지의 책장에 진열해 있는 ‘한국문학전집 45권’을 밤새워 읽었다. 일기를 꼬박꼬박 쓰고 시와 토막글을 지으며 글짓기 연습을 부지런히 했다. 언제던가는 어머니를 여읜 슬픔을 토해내려는 듯이 장문을 쓰기도 했다.
1960년대, 대한민국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경부고속도로공사 등 건설공사가 성황이었다. 당연히 건설기술자가 인기직업이 되고 대학에서도 공과대학 건설학과가 단연 인기학과였다. 나는 장래의 직업을 고심하여 공과대학 건설 분야에 진학하고 결국 문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세계 제1차 유류파동으로 국내의 건설업계는 물론 각종 산업계에 불황이 닥쳤다. 졸업 후, 전공에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여 어느 사립 중고등학교에 몸담게 되었다. 장래에 대한 불안과 욕구불만으로 방황하면서 독서와 글짓기로 갈증을 해소했다. 글은 한 편 두 편 벼낱가리처럼 쌓여갔다.
나의 첫 글모음집 ≪난망難忘≫은 삼십 편쯤 되는 시와 기행수필로 채웠다. 컴퓨터도 복사기도 없는 시절, 손수 철필로 가리방을 긁고 등사기로 밀어 제본했다. 미술선생의 도움으로 표지에 예쁜 삽화도 그려 넣었다. 비록 누런 갱지로 만든 조촐한 책이지만 깜냥에 값진 글집이었다. 겨우 몇십 부를 만들어 동료교사들과 절친한 친구에게 나눠 주었다.
교직에 몸담은 지 2년 남짓 후, 드디어 소망하던 건설 전문의 국영기업체에 입사했다. 그로부터 바쁜 일상에 저절로 젖어가고 문학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격동의 칠팔십 년대를 한국인은 “바쁘다 바빠.”와 “빨리빨리”를 일상어로 썼으니까 말이다. 방방곡곡을 돌며 쉴 틈도 없이 분주하게 살았다.
1990년대 말. 우리나라는 국가경제부도사태를 당해 IMF관리를 받게 되었다. 그 영향은 나에게도 미쳐 오십대 중반의 나이에 명예퇴직을 했다. 회사를 떠날 때 울적한 심사를 시 한 편에 담아 회사의 홈페이지에 올렸다. 우울해하던 사십대 후배 직원들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한동안 회자되었다.
어언 이순耳順의 나이. 더 이상 문학도를 향하던 소년시절의 환상을 되찾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밀려드는 공허를 달래기 위해 나는 다시 읽고 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시인이자 수필가인 사촌누이의 격려에 힘입어 수필에 입문했다. 초로의 나이에 수필가로 등단하는 영광을 얻고서 비로소 본격적인 글짓기로 나를 찾아보고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럭저럭 칠순의 중반에 서성인다. 여태껏 수필집 한 권 상재하지 못했다. 게으름일까, 아니면 용기가 없어서일까? 세월이 아쉽게 흘러가고 있다.
그동안 나의 글짓기는 ‘처음’만 있었을 뿐 미완성인 채로 집을 짓지 못한 채 건축의 재료만 여기저기 늘어놓은 공터 같다. 그런데도 글짓기는 내 정신의 오르가슴이며 영원한 해방구가 되었다. 나의 책읽기와 글짓기는 살아있는 내내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