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6월호, 제200호 신인상 수상작] 반토막 여행 - 권은자
"다른 이가 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고 나도 무작정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가끔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상상하며 어수룩한 그 하루가 긴 삶의 여정에 신선한 일부가 되었다는 것에 만족한다. 성숙해진 여행자의 표정으로 귀가하려던 꿈은 허사가 되었다. 하지만 내내 불안에 떨다 돌아오고 말았던 그날은 달콤 쌉싸래한 ‘반토막 여행’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반토막 여행 - 권은자
오랫동안 꿈만 꾸던 일에 용기를 내었다. 홀로 떠나는 여행의 기분을 단 하루만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낯선 공간에 혼자 있으면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무슨 생각들이 지나갈까, 나의 일상이 제대로 보일까, 무엇이 그리워질까, 늘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요즘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홀로 떠나는 여행을 난 해본 적이 없다. 그만큼 내가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였다.
때맞춰 막내아이가 2박 3일 일정으로 수련회에 갔다. 막내가 없는 며칠이 내게는 직장인의 달콤한 휴가와 같았다. 무엇을 할까 궁리하다가 머릿속에서 그려보기만 했던 일을 감행(?)해 보기로 했다.
오래전 이웃에 동갑내기 애기 엄마가 살았다. 그녀의 집엔 늘 시댁 식구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갖가지 문젯거리를 가지고 왔다. 사촌 시동생과 시누이조차 도움을 얻으려고 자주 들락거렸다.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친척들의 문제를 잘 해결해 주는 것 같았다. 큰 집안 살림을 잘 건사해 나가는 솜씨도 남달랐다.
어느 순간, 그녀에게도 한계상황이 왔다. 가족 일로 피로가 극에 달하자 남편과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시댁 문제에서 남편이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서운함으로 실망에 빠져버린 나머지 급기야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겨 놓고 집을 나갔다. 평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며칠 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녀가 돌아왔다. 혼자 차를 운전하며 동해안을 돌아보는 여행이 어땠느냐고 호기심 많은 이웃 새댁들이 물었더니 숙소에서 혼자 잘 때 무서운 것 빼고는 모두 좋았다고 했다. 물리적 거리를 두고 가족을 바라보았더니 보이지 않던 것도 보게 되더라고 대답했다. 누구나 일상에서는 새로움을 느끼는 것이 어려운가 보다.
변화 없는 생활에 전전긍긍하는 사이 그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한나절만이라도 그녀처럼 떠나는 호기를 부려보고 싶었다.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콘도를 예약했다. 읽을 책과 간식거리도 챙겼다.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을 위해 무엇을 챙긴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으나 마음만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 같았다. 여행 준비를 하는 순간은 행복했고 기분이 좋았다. 매일 똑같은 소란에 생生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뒤로하고 일상에서 비껴 난 그곳으로 출발했다. 고속도로에 올라선 차는 매끄럽게 속도를 높였다.
콘도에 도착했다. 프런트가 생각과 다르게 한산했다. 키를 받아들고 예약한 7층에서 내렸다. 복도에 발을 내딛는 순간 마음이 얼어붙는 듯했다. 희미한 어둠 속에 문고리들은 번쩍거렸고 복도엔 내 발소리뿐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의 들뜬 기분은 일순간 사라지고 마음은 점점 불편하고 두려워졌다. 온몸의 감각만 더욱 예민해졌다. 쿵쿵 뛰는 내 심장 소리를 견디지 못해 서둘러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찰칵. 사람의 온기가 없는 방에 배인 먼지 냄새로 속이 울렁거렸다. 낯선 공간에 대한 달콤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얼마 동안이라도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으슬으슬한 몸을 추스르려고 따뜻한 커피를 연거푸 마셨다. 발코니로 나갔다.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푸성귀가 있는 밭, 연둣빛 신록이 무늬를 만드는 멀리 보이는 오월의 산, 높지 않은 건물들로 이루어진 동네를 바라보았다. 기대와는 달리 아무리 애를 써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커피의 카페인 때문인지 외딴곳의 적막 때문인지, 심장은 더욱 두근거렸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가지고 온 책을 펼쳤다.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덮고 발코니로 다시 나가 엷은 어둠이 깔리는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길을 따라 늘어선 가로등에 불이 켜지고 개가 짖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홀로 있는 낯선 곳에서는 사소한 것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게 있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이번에는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 늘 음악이 흐르던 집의 부엌이 어른거린다. 평상시라면 저녁준비를 할 시간이다. 어둠이 짙어진 콘도에서 보는 둥실 떠오른 보름달은 아파트의 발코니에서 보던 보름달을 떠올려 주었다. 세상이 어둠 속에 깊숙이 잠길수록, 서늘한 기운에 몸이 떨렸다. 밤공기가 추웠지만 커피는 더 이상 마실 수 없었다. 커피 물을 끓이던 소리마저 사라지니 불안감이 무서움으로 바뀐다. 펼쳐 놓았던 책과 노트를 주섬주섬 챙겼다. 다시 어두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프런트가 있는 로비에서 내려 운동장만큼 커다란 지상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그저 까맣게만 기억되는 긴 시간이었다.
주차된 내 차의 운전석에 털썩 앉았다. 차에 배인 커피 냄새가 온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조금 전까지 긴장했던 몸이 안도감으로 스르르 풀린다. 가끔은 차 안의 커피가 담배 냄새로 느껴질 때도 있어 깜짝 놀란다. 지루하게 여기던 일상은 차에 배인 커피 냄새와 같이 익숙하면서 편안한 것이었나. 매일 똑같아 보여도 언제나 작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서 익숙함이 주는 고마움을 알지 못했다. 계획했던 시간을 한참 남겨둔 8시 조금 너머 콘도를 떠났다.
다른 이가 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고 나도 무작정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가끔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상상하며 어수룩한 그 하루가 긴 삶의 여정에 신선한 일부가 되었다는 것에 만족한다. 성숙해진 여행자의 표정으로 귀가하려던 꿈은 허사가 되었다. 하지만 내내 불안에 떨다 돌아오고 말았던 그날은 달콤 쌉싸래한 ‘반토막 여행’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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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자 ---------------------------------------------
부경문인협회 회원.
당선소감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노년의 아버지는 산책을 좋아하셨고 늘 무언가를 읽고, 썼습니다.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면서 일기와 써놓은 글들을 보았습니다. 내색하지 않아서 몰랐던 쓸쓸함이 글 속에 있었습니다. 글을 쓰는 것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느새 나는 아버지가 하던 일들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습니다. 틈만 있으면 들로 새벽 바다로 갔습니다. 그때그때 적은 짧은 감상들이 어느 날 긴 글로 태어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나의 글쓰기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흉내 내다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진정한 글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순간입니다. 문학은 사람을 깊이 있게 만들어 준다고 믿으므로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대상에 늘 관심을 기울이겠습니다. 사람과 자연의 작은 변화를 알아차린 감응을 말해보겠습니다.
문인의 길을 열어준 수필과비평사에 감사드립니다. 어눌한 제자를 끝까지 보듬어 문학의 길로 이끌어 주신 교수님, 문우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