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04월호, 통권198호 I 사색의 창] 은광연세恩光衍世 - 이정자
"1840년 제주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 선생이 직접 쓴 ‘恩光衍世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다.’ 라는 글귀가 봄 햇살에 찬란히 빛나고 있다.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거상 김만덕의 선행을 후손들이 이어가길 소망하며, <만덕> 뮤지컬이 제주의 대표적인 문화 콘텐츠로 발전해 나가길 기원한다."
은광연세恩光衍世 - 이정자
기대와 설렘으로 가슴이 요동친다. 눈이 펄펄 내리는 초저녁 제주아트센터 로비에 많은 인파가 줄지어 있다. 거상 김만덕의 파란만장한 일생일대기 뮤지컬 <만덕>을 초연한다. 공연 시작을 기다리며 시공간을 초월하며 마법을 걸어본다. 어디선가 하얀 나비들이 사뿐히 날아온 듯 무대가 찬란하다. 제주의 들녘에 회오리바람과 천둥 번개의 시작으로 생명의 봄이 열린다. 노랑나비와 하얀 나비가 너울거리며 하나 된다.
제주 여인의 정체성인 절약 정신과 나눔을 실천한 김만덕의 어렸을 적, 이야기부터 펼쳐지는 아역 배우의 연기는 눈물을 훔치게 한다. 그녀는 조선시대 김해김씨 김응열의 3남매 중 외딸로 태어났다. 출육 금지령이 내려진 제주섬에서 아버지는 총명한 어린 딸에게 “네가 자라면 여자도 장사하고, 금강산도 갈 수 있는 성별 구별 없는 세상이 온다.” 하며 장래의 꿈과 용기를 심어준다.
어려운 시절이지만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 받으며 자라던 12세 무렵이다. 자상한 부모님을 검푸른 바다에 몰아친 풍랑으로 순식간에 빼앗겨서 고아가 된다. 오누이는 거친 파도를 바라보며 슬픔을 토해낸다. 만덕은 세상을 원망할 시간도 없이 두 손 불끈 쥐고, 동생 만재와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의지가 대단하다. 만덕의 삼촌은 가난한 형편이라 할 수 없이 만덕을 기생집 부엌데기로 보냈다.
만덕은 제주의 거친 환경을 탓하지 않는 여성으로 자라며 장사에 관심을 갖는다. “바람이 분다. 봄바람이 분다. 바다로 오는 해풍에 꽃이 핀다.” 어려울 때마다 스스로 다짐하며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나간다. 탐라의 토산품과 해산물을 육지로 교역하는 유통업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모으며 입지를 키워간다. 눈치 빠르고 부지런한 만덕은 제주 관아 기생으로 올라서며 더 큰 세상을 꿈꾼다.
제주 관아 기생이 된 만덕은 객주 장터에서 어느 날 우연히 대행수를 마주한다. 대행수는 그녀의 명석한 두뇌와 성품에 감탄하고, 마음속으로 흠모하며 장사에 대한 재미를 배워가도록 도와준다. “장사는 보이지 않은 것도, 보이는 것과 함께 봐야 하는 법이니라.” 하는 대행수의 가르침을 되뇌며 연민의 정을 품고 앞날을 그려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려움을 같이 나누며 친하게 지내는 친구 기생을 구하고자 만덕은 제주 목사의 수청을 들기로 한다. 친구와 약속을 한 후 마주한 대행수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속마음을 감춘다. 대행수와 이별하는 장면은 너무도 애잔하여 눈시울이 뜨거웠다. 연민의 정을 갈무리하며 누구를 탓하지 않은 대담함에 박수를 보내며 가슴이 울렁거렸다.
정조 18년 1794년 갑인년 흉년은 극심하여 참혹하였다. 도민들은 바닷가 해초류 등을 채취하여 죽을 끓여 먹고, 초근목피로 목숨을 연명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며 말없이 스러져 간다. 만덕은 도민들의 어려운 형편을 직접 둘러보고 큰 결심을 한다. 모든 재산을 털어서라도 허덕이는 도민들을 살리겠다는 각오로 육지에 배를 보내고 쌀을 들여온다. 구휼미救恤米를 나누어 주며 베풂과 나눔을 통하여 이웃의 아픔을 함께한다.
당시에 “갑인년 흉년에도 먹다 남은 것은 물이다.” 하는 제주 속담이 생겨났다. 너무 배고파 시체도 파 먹었다는 말이 나돌며 인심은 메말라갔다. 흉년에도 남에게 대접할 수 있는 것은 ‘물 한 대접’뿐이라는 말이 베풀 수 있는 인정으로 남았다.
김만덕의 선행은 조정에 보고되었다. 정조대왕이 만덕에게 상을 주려고 소원을 말하라 하니, “한양에 가서 왕궁을 보는 것과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이라 했다.” 그는 난생처음 배를 타고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조선 땅이 넓고 아름다움에 감격한다. 금강산을 유람하며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풍광들이 신비로워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연발하며 삼천리 화려강산을 가슴에 품었다.
제주의 여성들은 예로부터 환경을 탓하지 않고, 새로운 곳에 도전하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일까. 물로 뱅뱅 둘려진 섬, 척박한 자연환경에 순응하면서 육지를 동경하고 끝없이 갈망한다. 나의 사춘기 시절에도 친구들과 미래를 이야기할 때에는, 모든 친구들이 육지로 나가는 게 꿈이라고 입을 모았다. 제주의 주춧돌인 해녀들도 봄이면 출항하여 칠성판을 등에 지고 돈을 많이 벌어들였다.
의녀 김만덕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제주시 사라봉 모충사에서 만덕제를 봉행한다. 처음에는 제주에 거주하는 모범적인 여성을 선정하여 만덕상을 드리고 만덕제를 봉행하였다. 이제는 전국에서 사회에 봉사하거나 경제적 기여도가 있는 모범 여인을 선정한다. 몇 번 봉행하는 행사를 참관하며 귀감이 되는 여성들이 큰 뜻을 기리고 있음에 존경하는 인물들이 늘어가고 있다.
1840년 제주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 선생이 직접 쓴 ‘恩光衍世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다.’ 라는 글귀가 봄 햇살에 찬란히 빛나고 있다.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거상 김만덕의 선행을 후손들이 이어가길 소망하며, <만덕> 뮤지컬이 제주의 대표적인 문화 콘텐츠로 발전해 나가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