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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4월호, 통권198호 I 사색의 창] 선을 넘다 - 윤선경

신아미디어 2018. 5. 31. 17:28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일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나를 형성한 근원을 찾아 생각의 뿌리를 캐고, 주관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지금까지 형성된 사고의 틀을 넘어서야 하니, 내면의 선을 넘는 일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이며, 용기이다. 현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일이며, 미래를 바라보는 가슴 뛰는 일이다."






   선을 넘다    -    윤선경

   “촌놈, 넘어오면 죽는다.”
   녀석이 눈을 부라렸다. 초등학교 3학년, 전학을 갔다. 학교 옆 군인 사택에 사는 아이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장교였다. 살림이 윤택했다. 한 학년이 세 학급밖에 안 되는 터라 아이들은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첫날 짝이 된 남자아이가 책상 위에 굵게 선을 그었다. 수업 중 무심코 팔꿈치가 선에 닿으면 어김없이 뾰족한 연필심이 날아왔다. 으슥한 학교 뒤편에서 녀석을 만나면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새 학교 새 친구들은 넘기 어려운 선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이 빠져나간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부르는 친구도, 챙겨주는 사람도 없는 쓸쓸한 시기였다. 교실 한구석 나지막한 상에 작은 학급 문고가 있었다.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늘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었다. 학급 문고가 유일한 내 친구였다.  
   남편의 대부님이 작년에 정년을 맞았다. 축하를 드려야 할지, 위로를 드려야 할지, 알은척을 해야 하나, 모르는 척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물으니, “그럭저럭”이라고 대답하신다. 예측했던 일이지만 막상 닥치니 어깨에 힘이 빠지는 눈치다. 등이 전보다 굽어 보였다.
   우리는 모두 어떤 울타리에 속해 있다. 가정, 직장, 단체. 그 안에서 미우니 고우니 관계의 어려움에 부대끼며, 때로는 탈출을 꿈꾸기도 한다. 울타리는 지친 몸을 쉬게 하는 안온한 집이며, 사회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지위이며,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이기도 하다. 자의든 타의든 그 울타리를 넘어가는 일은 새로운 도전이다. 
   아기는 절대 못 키워 준다며 손사래를 치던 내가 손자를 맡아 키운 지 벌써 15개월이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한 생명을 키우는 일은 경이롭고 낯설기만 했다. 모든 게 새롭다. 이유식, 발달 과정, 장난감, 제대로 아는 게 없다. 궁금한 건 많은데 물어볼 데가 없다. 고민하던 중, 살고 있는 아파트의 카페를 알게 됐다. 차를 마시는 카페가 아니라 인터넷 동호회다. ‘아이사랑 카페.’ 이름처럼, 젊은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장난감을 비롯한 온갖 물건을 교환하고, 생필품을 공동구매하는 카페다.
   어머니뻘인데. 가입해도 될까. 괜히 성가신 회원이 되는 건 아닐까. 게다가 의미를 모르는 낯선 단어들. ‘드림’, ‘릴드림’, ‘사용감 듬뿍’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망설이다 성큼 그들의 선 안으로 발을 들이민 것은 ‘드림’으로 내어놓은 온갖 장난감 때문이었다. 호기심과 욕심이 선을 넘게 했다. 가입 후 며칠간 뽀로로 인형, 붕붕 카, 미끄럼틀을 받았고, 손자 입에 맞지 않아 고민하던 이유식과 작아진 아기 옷을 내놓았다.
   카페에 글을 올리고 현관문에 물건을 걸어두면 작은 과자나, 식빵 한 줄이 살며시 놓여 있었다. 젊은 엄마들의 경우 바름이 기특하고 합리적 사고가 신선했다. 선을 넘는 것은 새로운 선 안에 들어가는 길이기도 했다
   카페에는 가끔 며느리들의 이야기가 올라온다. “우리 시어머니는 왜 이럴까요.” “며느라기였던 시절이 속상해요.” 같은 상황을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다른 프레임으로 바라본다. 젊은 세대의 달라진 사고가 당황스럽다. 시어머니를 이해하지만 편들지 않는다. 댓글을 삼가고 숨죽인 채 읽기만 한다. 그들의 자유를 방해하기 싫어서다.
   선 안에 있다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다. 동료와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근원적인 외로움을 가지고 있다. 혼자인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무리를 만들고, 떼 지어 몰려다니고, 이편저편 선을 긋고, 선 밖으로 사람을 밀어낸다.
   야구에서 주자가 너무 힘껏 달리다 베이스라인 바깥 3피트 거리의 선을 넘으면 아웃된다. 그 정도만 아니라면 못 가본 길 한 번쯤 발을 내디뎌 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용기를 내어 토슈즈를 신은 발레리나의 발끝처럼 가볍게 새로운 선 안으로 발을 들이밀어 볼 일이다. 
   아기를 키우며 글을 쓰고 있다. 갑자기 왜 글을 쓰냐고 물으면 명확하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쓰고 싶어서. 잘 쓰든 못 쓰든, 글을 써야 해서라는 말 밖에. 늦게야 글을 쓴다니 사람들은 박완서 작가도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며 격려해준다. 박 작가는 마흔에 등단했다. 마흔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일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나를 형성한 근원을 찾아 생각의 뿌리를 캐고, 주관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지금까지 형성된 사고의 틀을 넘어서야 하니, 내면의 선을 넘는 일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이며, 용기이다. 현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일이며, 미래를 바라보는 가슴 뛰는 일이다.
   컴퓨터의 불빛이 반짝인다. 낮잠을 깬 아기가 눈을 빛내며 다가온다. 밤 열 시. 아기를 재우고 컴퓨터를 다시 켠다. 아기를 잠시 맡기고 집 앞 찻집에 가기도 한다. ≪해리포터≫를 썼던 조앤 롤링을 떠올린다. 선을 넘어 꿈이 현실이 된 사람들. 그들에게서 힘을 얻는다.
   시를 습작하던 대부님은 몇 달 후 문학관의 시 동인회에 가입했다. 움켜쥐고 있던 시를 남 앞에 드러내는 게 거북하고 힘들겠지만, 머지않아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가방에서 자작시집을 꺼낼지 모른다.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나오라고 계속 연락이 왔다. 나가지 않았던 건 혹시라도 녀석을 다시 보게 될까 싶어서였다. 우연히 동창 카페에서 녀석의 사진을 봤다. 외국으로 이민 간다는 소식이었다. ‘너도 삶이 많이 신산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선을 넘어 낯선 이국에서 가족을 데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녀석을 떠올렸다. 그제야 조금 용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