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04월호, 통권198호 I 사색의 창] 잃어버린 사금파리 - 김다원
"시월이 가는 사이 나는 입 씻기도 아까운 식탁 위 티슈를 아들은 대여섯 장씩 뽑아 강아지 똥을 치운다. 내가 헛짓을 할 때 아버지는 그냥 보고 계셨다."
잃어버린 사금파리 - 김다원
이월의 오후
예닐곱 살 때였나 보다. 나는 안마당에서 사금파리로 땅에 선을 긋고 있었다. 마루 끝에 머문 햇살에 앉아 어머니는 밥상에 콩을 늘어놓고 벌레 먹은 콩을 고르셨다. 팔꿈치로 상을 누르며 허리를 펴다가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입술만 달싹거리며 되뇌셨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어머니의 굽은 등을 보다가 아무 말도 안 들은 듯 일어섰다. 따라오던 강아지가 작은 대문 앞에서 뒷다리를 내리고 앉아 갸우뚱 나를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어머니 곁으로 갔다.
춘삼월의 사진
내 키가 그리 작았던 것일까? 아니면 사랑채 문지방 높이가 그리 높았던 것일까? 나 혼자의 힘으론 도저히 사랑방에 들어갈 수 없어 문지방에 턱을 놓았다. 사랑방에선 어머니가 바디를 오른쪽으로 보냈다가 다시 왼쪽으로 보내길 반복했다.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옷감을 짜던 모습이 재미있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안채 부엌쯤에서 타인의 눈을 통해서 본 것 같은 장면이다.
결혼 후 어머니께 여쭈었더니
“그때 네가 많이 아팠다. 네가 밥을 못 먹어서 사흘을 나도 숟가락 안 들었다.”
나는 그 기억을 길게 늘여 간직한다.
사월의 행진
나무토막 네 개 둥글게 깎아 바퀴 만들고 널판 얹어 마당을 돌았다. 서로 타겠다고 아우성이던 시절이다. 작은 머슴이 잘라온 소나무 가지에 새끼를 묶었다. 나는 소나무 가지를 잡고 앉았고 동네 아이들 두엇이 새끼를 끌었다. 길어야 어른 걸음으로 스물쯤 되는 안마당 두어 바퀴였을 터나 동글동글 하늘로 오르던 웃음소리가 지금도 귓가를 울린다.
오월의 둔덕
제비가 둥지를 틀고 새끼에게 물어다 줄 벌레 찾기 분주한 때, 그보다 더 바쁠 때가 오월이다. 오동꽃과 아까시 은은한 향이 밤마다 봉창을 두드렸다. 산야에 널린 찔레까지 꽃을 피우느라 한창일 때, 농부들은 들로 밭으로 부지런히 나들었다 부엌에선 술 거르는 어머니 손이 더 바빴다.
무릎을 올려 가볍게 뛰면 치마가 함께 팔랑거려 더욱 정겹던 논둑 밭둑에서 사라지던 뱀 꼬리를 보았다. 놀라 뒷걸음치던 날들이 지금도 가끔 꿈속에 왔다 사라진다.
유월의 호들갑
혼자만 두 눈이 동그랗던 밤, 호두만큼 자란 감을 감나무는 왜 떨어뜨리는지. 양철 지붕에 쿵, 또르르 굴러 툭, 하고 땅에 떨어졌다. 굵은 눈물방울 같은 감꽃이 뚝 뚝 떨어지면 괜스레 슬퍼 고개를 숙였던 때보다, 감 떨어지는 소리는 내 몫의 감이 덜어지는 양 섭섭했다.
귀를 곧추세우고 소리에 마음 모으다가 낮에 산딸기는 정신없이 그릇에 따 넣던 순간으로 갔다. 짧은 치마 아래 드러난 종아리가 따끔하다 싶었는데 쐐기보다 여전히 눈을 딸기에 둔 채 나는 빨갛게 부어오른 종아리를 더듬었다. 더 따고 싶다는 욕심에 한 걸음씩 덤불로 향하다 뱀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뒷걸음으로 나왔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고개 돌아보면 부엉이만큼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던 시커먼 숲은, 밤까지 따라와 감 떨어지는 소리에 다시 나를 놀라게 했다.
칠월과 팔월 사이
어머니와 콩밭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나왔다. ≪구렁덩덩 신선비≫, ≪장화홍련≫ 등 어머니의 이야기는 김매는 콩밭보다 더 길었다. 가끔 허리 펴느라 일어서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 땀을 걷어냈다. 등잔불 기름 닳는다고 어린 날의 어머니를 구박했다던 외숙모는 어머니의 비밀을 알았을까? 새벽 아궁이 불 앞에서도 읽었다는 그 책 속의 이야기가 어머니의 호미 끝에서 무수히 나왔다.
구월의 아침
발자국 꾹꾹 눌러 자취 남기고 싶은가, 걸어온 길에? 나뭇잎 위로 건듯 일어 잠시 낙엽 팔랑거리게 해 놓고 지나간 바람 같은 아버지 발자국. 어느 골목을 돌아 두 다리 털어 큰기침 했는지, 어느 도시 부잣집 앞에서 기죽은 허리 펴고 목에 힘을 주느라 잠시 호흡 크게 했었는지, 그 모든 것 상관없이 발자국은 흔적이 없다.
“아버지, 왜 밤나무 심으세요?”
“나는 늙었지만 너는 밤 따 먹을 수 있지.”
밤 익어가는 나무 뒤로 녹음은 뒷걸음치는 내 발을 꽁꽁 묶었다.
시월이 가는 사이
나는 입 씻기도 아까운 식탁 위 티슈를 아들은 대여섯 장씩 뽑아 강아지 똥을 치운다. 내가 헛짓을 할 때 아버지는 그냥 보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