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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4월호, 통권198호 I 세상마주보기] 해피엔딩 - 김경자

신아미디어 2018. 5. 18. 08:34

"사람들은 모두 영원히 살 것처럼 누리며 행동한다. 주는 것보다는 받으려고 하고 자기 것만 채우려는 이기적인 사회에서, 그녀는 이미 자신에 맞는 꽃을 피우며 희생과 봉사로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주도하며 살고 있다. 그녀의 말처럼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받은 것보다 더 많이 퍼주고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바보들의 ‘바보 마음’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한다. 부디 이 말이 현답이었으면 좋겠다."






   해피엔딩    -    김경자

   자목련이 막 봉오리를 터트리기 시작할 즈음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중학교 재학 시절 이후 만난 적이 없었던 친구였다. 수십 년이 흐른 후 지인을 통하여 우연히 그녀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지만 연결이 닿지 않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통화가 되었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긴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듯 청량감이 한층 가미되어 분출되었다. 나 역시 몹시 기다렸던 전화였기에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내용인즉 우리 동네 근처에 일이 있어 잠시 들르는 차에 나를 보고 가겠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그녀의 하얀 얼굴, 넓은 이마 그리고 갈색 눈동자를 가진 서구적인 모습이 내 시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녀와 초등학교, 중학교는 같은 곳을 다녔지만 어느 틈에 그녀는 부산의 여자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이후로 소식이 두절되었다. 그녀와 만든 추억이라고는 단지 여름방학 중 성경학교 다닐 적에 어느 시골 마을의 계곡으로 야유회를 다녀온 것과 칼바람이 몹시도 불던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날 성당에서 연극을 같이 한 기억밖에 없는 것 같다. 항상 그녀의 말소리는 조곤조곤했고 큰 소리로 웃고 떠들거나 뛰어다니던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꼭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인생 개척과 사익보다 그 너머에 보이지 않는 가난한 자의 벗으로 가진 것마저 바치는, 소소한 일을 큰 사랑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기에 헌신하는 그녀를 보고 싶었다.

   자운영 꽃이 활짝 피어 달큼한 내음이 가득하던 날 흰색 테두리가 있는 베일로 머리를 가린 친구는 회색 제복을 입고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역시 나의 생각대로 여과기를 통과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골물처럼 맑고 여유로워 보였다. 마치 그녀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고향 마을의 들녘을 닮은 느낌이다. 예나 지금이나 소리 없이 웃는 모양새는 변하지 않았다. 어찌나 반갑던지 손을 덥석 잡고 이름을 불러야 할지 현재 그가 맡고 있는 직함대로 대표 수녀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잠시 혼돈이 스쳤다. 그녀는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하지만 쉽게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삼십수 년 동안 수도자 생활을 해 온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또 한 분의 수녀님이 동행했기에 더더욱 그럴 수가 없었다.
 
   같은 세상에 존재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들려오는 뉴스는 유명인사들의 사건이 핫이슈가 되어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들의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이 지상에 전파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내로라하는 명사들도 이기심이 팽배하여 제 욕심을 지우지 못하여 오늘날 일련의 사건들이 그치지 않고 있건만, 그녀는 지구의 한쪽에서 축복받지 못한 자의 보호자로, 엄마로서 꼭 있어야 할 자리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잇대어 주는 밧줄 같은 역할을 하는 그녀는 친구이기 전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그녀의 꿈은 수녀가 되는 것이었고 바람대로 스물두 살에 꿈은 이루어졌다. 때로는 알게 모르게 많은 상처를 받았으리라. 그러나 심장이 뜨겁도록 기도하고 묵상을 하며 어리석도록 용서하고 사랑하고, 찔리면 피 흘리고 아프면 앓아야 한다는 것을, 고통을 통하여 참 사랑으로 극복된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반추할 여가도 없이 살아왔을지라도. 매일매일 채워지는 짐과 큰 산같이 많은 일을 완수해야 하는 불가능도 가능케 하는,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싸움쟁이’ 수녀다. (가끔 대외적으로 불합리한 일에 맞서다 보니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영원히 살 것처럼 누리며 행동한다. 주는 것보다는 받으려고 하고 자기 것만 채우려는 이기적인 사회에서, 그녀는 이미 자신에 맞는 꽃을 피우며 희생과 봉사로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주도하며 살고 있다. 그녀의 말처럼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받은 것보다 더 많이 퍼주고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바보들의 ‘바보 마음’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한다. 부디 이 말이 현답이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마지막 바람은 해피엔딩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