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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3월호, 통권197호 I 지상에서 길찾기] 어머니와 지팡이 - 윤선희

신아미디어 2018. 5. 2. 08:08

"엄마, 좋지? 내년에는 우리 제주도 가자.”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신다. “니들끼리 가. 나는 이제 힘들어서 못 가.” 여전히 같은 말씀에 애정 섞인 딸들의 야유가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배낭 안 지팡이는 영문도 모른 채 실룩실룩 덩달아 신이 나 따라온다."






   어머니와 지팡이    -    윤선희

   어머니를 모시고 부산 여행길에 올랐다.
   1박2일의 짧은 여행에 함께할 작은 배낭이 모두의 등에 업혀 따라왔다. 어머니의 배낭에는 접이식 지팡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당신의 의지는 아니고 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넣고 온 것이다. 지팡이는 어머니 집 현관에 서 있지만 함께 외출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아버지가 떠나신 뒤 어머니의 심신은 급격히 무너지셨다. 넋 나간 듯 사시는 것이 늘 걱정스러웠다. 허공을 딛는 것 같은 걸음걸이에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달이 났다. 동네 가게에 다녀오다 다리가 휘청하며 넘어지신 것이다. 다행히 뼈에 이상은 없었지만 한동안 통증을 호소하셨다.
   고민 끝에 자식들은 큰 사고를 막자는 뜻에서 지팡이를 사드렸다. 하지만 당신은 지팡이를 한사코 외면하셨다. 자식들의 잔소리에 못 이겨 마지못해 대답은 하셨지만 어머니가 집을 나서면 언제나 지팡이는 빈집을 지켜야 했다. 지팡이를 사용할 만큼 노인네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도 소녀 같은 감성을 가지고 계신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지만 그래도 염려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너져가는 어머니를 일으킨 것은 세 딸들과의 나들이였다. 평소 자식들과 바람 쐬는 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세자매가 마음을 모은 지 4년째다. 매년 봄가을이면 어김없이 여행을 떠났다. 내륙 지역에 살다보니 우선순위는 바다가 있는 도시라지만 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해 꽃 축제가 열리는 도시를 찾는 것도 자식의 배려였다.
   이곳저곳을 다녀도 어머니의 최고의 관심사이자 놀이터는 단연 시장이다. 재래시장은 노년의 무료하고 건조한 삶에 새 기운을 불어넣는 터이자, 잃어버린 입맛을 조금이나마 돋우는 장이다. 자식들이 방문 시에 집에 계시지 않으면 가장 먼저 찾으러 가는 곳도 시장이다. 이것저것 구경하시다 필요한 것도 사고, 드시고 싶은 것은 사다 드시곤 하는 모습이 자식들에게 한편으로 안심이 되고 위로도 되었다. 아직 당신 스스로 다니시며 챙기실 만큼의 건강이 된다는 것이 감사하다.
   국제시장에 도착했다. 평일인데도 골목은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때마침 진행 중인 국제영화제도 한몫하며 시장에 활기를 더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큰 시장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릇가게로부터 각종 액세서리와 인테리어 소품들, 다양한 식품과 좌판에 차려진 먹거리는 모두 우리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번갈아 가며 느린 걸음의 어머니와 팔짱을 끼고 북적대는 시장골목을 걷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딸들은 기꺼이 당신의 지팡이가 되어드렸다. 
   가방 가게에 이어 의류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의 눈에 생기가 돈다. 잔잔한 꽃무늬 블라우스에 시선이 머문다. 집 옷장 안에 잔뜩 걸린 옷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눈치를 보며 옷을 만지작거리는 어머니의 등을 떠미는 딸들에 못 이겨 옮기는 발걸음에 아쉬움이 가득하다.
   어머니는 평소 용돈이 생기면 어김없이 옷을 사들여 딸들에게 핀잔을 들으신다. 옷장에 비슷한 옷들이 많이 걸리고 어떤 옷은 장식용처럼 입지 않고 걸어놓기만 하는 옷도 있다 보니 하는 말이다. 하지만 계절에 맞게 등장한 색색의 스카프로 가득한 상점이 눈앞에 펼쳐지자 어머니의 얼굴이 다시 환해진다. 모두 제법 차가워진 날씨로 허전한 목을 생각한 탓에 하나씩 골라 목에 두른다. 생일을 맞은 며느리의 것을 고르고 흐뭇해하시는 모습이 여전 소녀다.
   영화 <국제시장>으로 유명해진 ‘꽃분이네’를 찾았다. 각종 잡화가 진열된 가게 앞에는 물건을 사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는 관광객으로 혼잡했지만 비집고 들어가 양말을 하나씩 사들고 인증 사진을 찍었다.
   어느새 배가 출출하다. 우리는 부산의 명물 어묵탕과 비빔당면을 한 그릇씩 주문했다. 따끈한 어묵 국물이 쌓인 피로를 한결 풀어준다. 쫄깃한 식감의 각가지 맛의 어묵들이 기분 좋게 배를 채운다. 부산에 온 후 한 번도 가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 어머니 옆에 놓여 있는 지팡이를 보니 픽 웃음이 난다. 잠시나마 당신 곁에서 지팡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지만 우리는 언제나 함께할 수 없기에 마음 한편이 시리다. 지팡이가 편안하고 당신의 손에 잘 맞는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날이 저물고 찬바람이 숙소로 가는 길을 재촉한다. 시장 구경의 마침표로 부산의 명물인 어묵 한 봉지씩을 사서 가방에 넣으며 큰언니가 한마디한다.
   “엄마, 좋지? 내년에는 우리 제주도 가자.”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신다.
   “니들끼리 가. 나는 이제 힘들어서 못 가.” 
   여전히 같은 말씀에 애정 섞인 딸들의 야유가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배낭 안 지팡이는 영문도 모른 채 실룩실룩 덩달아 신이 나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