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03월호, 통권197호 I 사색의 창] 동네 극장 - 김정화
"나는 태생적으로 외딴집 출신이라 변두리가 좋다. 중심은 당당하고 활기차지만 왠지 위태롭고 답답할 뿐. 팝콘 냄새 풍기는 대형 영화관의 푹신한 의자보다 어수룩하고 심심한 언저리 영화관이 그지없이 편안하다. 비어서 넉넉하고 비어서 따뜻하다. 극장 앞 골목길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 천천히 걷다 보면 빈 땅에 누운 그림자도 보이고 낮은 기와에 돋은 푸른 이끼와도 마주치고 하늘을 나는 새 떼도 더 많이 만난다. 하지만 사라진 극장과 함께 이곳 풍경들도 접어야 할 때. "
동네 극장 - 김정화
사라져버렸다, 하루 만에. 작은 것들이 무너지고 언저리가 밀려나간다. 변두리 동네 극장이 간판을 내렸다. 애초부터 지하철과 동떨어진 곳, 시내버스도 드문드문한 주택가 삼거리, 그 골목길 모퉁이의 조그만 지하 극장이 문을 닫는다. 스크린은 당연히 한 개뿐, 매끈한 영화표 대신 손 글자로 적은 티켓, 아날로그 영사기에서 필름 감기는 소리가 더 이상 없다. 미처 십 년을 채우지 못한 채 마지막 상영을 끝내는 날이다.
극장은 늘 조용했다. 지하 계단을 내려오는 관객들의 발소리는 나직하고 오가는 대화들도 벽을 넘지 않았다. 시내 극장의 절반 값으로 영화를 보고 훈남 배우가 살인미소를 날리는 포스터를 몇 장씩 가져가도 눈치 보이지 않았다. 주로 독립영화나 인디영화를 상영했는데 후드 티셔츠를 뒤집어쓰고 혼자 가도 어색하지 않은 곳이었다. 십여 명 관객들이 듬성듬성 자리 잡으면 표를 끊던 종업원이 가끔씩 무대에 서서 싱거운 퀴즈를 내고 썰렁한 상품을 주곤 했다. 한번은 러닝타임 두 시간 반짜리 흑백영화를 보았는데 호사롭게 혼자 관객이 된 적도 있다.
영화관에서 맞는 어둠은 늘 설레었다. 어둠이 고여서 빛을 만들어내고 빛과 색이 모여 강물과 들판과 사람을 탄생시켰다. 혼자 있더라도 함께였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모든 것이 존재했다. 많은 사람을 스크린에서 만났다. 늙은 마부와 딸, 사막에 버려진 늑대 소년, 심야식당 주방장, 전 재산이 여행용 가방 한 개뿐인 떠돌이 소녀, 여자를 사랑한 사람 바지씨, 혼자가 되고 싶지 않은 외톨이, 억울하게 학살당한 제주민들, 산길을 헤매는 밀양 할머니들, 수많은 고독사의 영혼들…. 이들을 어찌 현실에서 다 만나볼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이 나의 것이고 우리의 일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공간이었다.
어릴 때 동네 극장은 유일하게 텔레비전을 갖춘 재곤이 아재 집이었다. 재곤이 아지매는 하얀 얼굴에 선한 웃음을 짓는 색시였는데 내가 가면 국수도 말아주고 센뻬이 과자도 선뜻 내어놓았다. 주제가가 애달픈 연속극 <아씨>와 태현실 배우가 나오는 <여로>를 뜻도 모른 채 지켜보았다. 깜깜한 밤중에 도채비가 나오는 거름밭을 지나 집으로 달려가야 하는 일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그즈음 동네 공터에 이동식 가설극장이 들어왔는데 조용하던 시골 밤을 술렁이게 했다. 하루 일을 마친 아낙들은 피곤함도 잊고 삼삼오오 카보나이트 불빛을 따라 천막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조무래기들의 출입을 막았지만 개구멍으로 기어들기 일쑤였고 나 역시 엄마의 치마폭에 감싸여 도둑 입장을 즐겼다. 유랑 배우들은 신경통약 같은 물약도 팔고 트위스트와 고고댄스도 추고, 왕년의 스타였던 장소팔과 고춘자 만담도 흉내 내었다. 지금 생각해도 제대로 기억나는 내용은 없으나 영화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화면은 지지직대며 빗줄기를 그어댔고 대사는 발전기 소리에 곧잘 묻혔으며 무시로 필름이 끊어지면 야유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곤 했다. 하지만 그때의 가설극장은 먼 동네 사람들까지 하루 만에 모으는 위력을 지녔고 낯선 스크린 풍경이 시골 아이에게도 미지의 세계를 꿈꾸게 했다.
내가 다시 동네 극장을 찾은 것은 어른이 되고도 한참 지나서였다. 그동안 만난 극장들은 모두 근사했다. 학창시절 친구 아버지가 문지기로 있던 읍내 극장도 벽이 높았고 동시상영을 해주던 싸구려 삼류극장도 야간조명이 화려했다. 심지어 사진으로만 본 아테네 언덕의 고대 디오니소스 극장도 훌륭했다. 물론 지금도 극장은 많다. 스마트폰으로 예약이 가능한 멀티플렉스관이 즐비하고 샤롯데 씨어터 같은 커플석 전용극장도 생겼으며 밥도 먹고 영화도 보는 시네드쉐프관도 인기를 얻는다. 그러니 동네 극장 한 개쯤 사라진다고 해서 아쉬워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태생적으로 외딴집 출신이라 변두리가 좋다. 중심은 당당하고 활기차지만 왠지 위태롭고 답답할 뿐. 팝콘 냄새 풍기는 대형 영화관의 푹신한 의자보다 어수룩하고 심심한 언저리 영화관이 그지없이 편안하다. 비어서 넉넉하고 비어서 따뜻하다. 극장 앞 골목길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 천천히 걷다 보면 빈 땅에 누운 그림자도 보이고 낮은 기와에 돋은 푸른 이끼와도 마주치고 하늘을 나는 새 떼도 더 많이 만난다. 하지만 사라진 극장과 함께 이곳 풍경들도 접어야 할 때.
변두리 ‘국도극장’ 지하 계단 앞에서 나는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