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03월호, 통권197호 I 사색의 창] 추자도의 횃불 - 김양자
"누구의 훌륭한 말이나 글에서, 어떤 모범적인 사건에서 진실된 감동을 받는다면 이는 우리의 삶 속에서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고, 나름 자기만의 소우주를 만드는 데 비빌 언덕이 되지 않는가. 이백여 년 전 ‘천주님을 향한 횃불’과 반세기 전 ‘추자도의 횃불’이 여행지에서 가끔 만나는 소소昭蘇한 감동의 온수 속으로 푹 잠기게 한다. “저녁밥 잡수이소.” 아지매가 부른다. 고무줄뛰기하던 어린 날 저녁이면 우릴 찾던 엄마 목소리를 닮았다. 정이 간다. 밥상에 오른 엉겅퀴잎국도 구수하다. 전갱이 육수에 지천으로 돋는 봄풀로 끓인 섬 음식이 낯설기는 해도. 저녁을 물리고 마당에 나서니 비릿한 갯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준다. 어둠에 잠겨드는 바다와 하늘, 광활한 무변천지. 한, 둘 별들이 돋는다."
추자도의 횃불 - 김양자
섬 섬 섬,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들. 남도의 섬들을 돌아보고 있다. 제주에서 이른 아침 정기여객선을 타고 추자도에 닿았다. ‘여길 드디어 왔구나.’ 섬을 휘 둘러본다. 그도 감회 어린 눈빛이다. 전날 가파도에서 봤던 시야 가득 푸른 보리의 물결은 찾아볼 수 없고, 섬 자체가 작은 산이다. 딱딱한 가래씨앗[楸子]을 닮았다고 섬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했지. 연록의 언덕 발치에는 관공서, 학교, 구멍가게, 식탁 두세 개의 식당이 얌전하게 어깨를 겯고, 뒤편에는 따개비 같은 집들이 색색의 지붕을 이고 봄볕에 졸고 있다. 바다에는 본섬을 따르는 병아리 섬들이 툭툭 떨어져 있고, 포구의 낮은 안벽에는 낚싯배, 고기잡이배들이 물결에 흔들리며 매달려 있다. 얕은 물에는 물고기들이 자맥질하고 있다. 해변을 끼고 외줄기 시멘트길이 윗섬 아랫섬을 이어주고, 빈 길에 버스 한 대가 느릿느릿 기듯이 가고 있다.
“여깁니더. 부산서 왔지예?” 경상도 억양의 서글서글한 아지매가 배에서 내린 우리를 알아보고 낡은 승합차를 들이댄다. 예약한 오늘 밤 숙소의 주인이란다. 억센 말투가 우리와 닮아 그런지 단박에 친밀감이 생긴다. 언덕 비탈진 곳에 ‘○○ 펜션’이란 간판이 붙어있다. 짐을 내리고, 섬을 일주하는 버스를 탔다. 그림 같은 작은 다리를 건너 하추자로 갔다가 금세 숙소가 있는 상추자로 돌아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올레 코스, 갯마당 체험어장 등을 보면서 답사와 체험은 내일 일정으로 미룬다.
부두 선착장에서 ‘추자도 성당’이라고 쓰인 8인승 승합차를 만났다. “오늘 육지(제주도)에서 신도들이 오신다 해서요….” 공소의 사무장이 나와 있다. 공소는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기도 드리는 곳이다. ‘정난주(마리아)’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피부로 스며든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정난주(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의 남편 황사영이 프랑스에 도움을 청하는 백서帛書를 보낸 사건으로 체포되어 극형을 당했다. 그녀는 두 살짜리 젖먹이 아들과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중이었다. 뱃길에 잠시 쉬어가는 추자도에서 그녀는 아들을 ‘황경헌’ 이름표만 목에 걸어서 바닷가에 버렸다. 천애고아가 된 젖먹이를 오 씨라는 어부가 거두었고 그리하여 황경헌은 여기 사람이 되어 살았다. 칠흑 같은 바닷길을 떠나 다시는 아들을 찾아오지 않은 그녀. 아들만이라도 살아남게 하려는 단장의 모성이었으리라. 뼈를 깎는 애틋한 이별로 마음은 산산이 부셔졌어도 유배지에서 오직 기도로 한생을 마쳤다고 한다. 하추자도에서 일출이 가장 아름다운 동쪽 끝자락에 황경헌의 묘소가 있다. 개인의 일대기로나 천주교회사로나 뜻 깊고 성스러운 곳이다. 그분들의 희생이 외로운 이 섬에 천주교회의 횃불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이 땅의 돌 하나 풀 한 포기에도 경건함이 묻어 있는 듯 예사롭지가 않아 보인다.
또 하나의 횃불이 미풍을 타고 발그레 살아나고 있다. 해거름에 모교라도 되는 듯 초등학교를 찾아 올라갔다. 인기척 없는 조용한 마당에 농구대만 홀로 서 있다. 깔끔한 이층 건물인데 바로 옆 동에는 유치원의 무지개 그림이 붙어있다. 한 교실에는 벌써 전깃불이 환하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까. 그는 초대 교장선생님 공적비에 기대서서 석양의 하늘과 바다를 하염없이 보고 섰다. 지난 삶을 반추하고 있는 걸까? 그렇겠지. 반세기 전에 본 추자도의 횃불을 떠올리고 있나 보다. 언젠가 표지가 누렇게 바랜 그의 잡기장에서 “추자도의….”하는 글을 훔쳐본 적이 있다.
1965년 어느 여름밤, 그는 목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여객선의 갑판에서 배낭을 등진 채 누워 있었다. 그 무렵 그는 군 복무 후, 모 신문사 견습기자 생활을 일 년도 버티지 못하고 무직자로 궁핍한 생활과 실의에 젖어 방황하는 스물일곱 살 젊은이였다. 몇 시간 일정한 속도로 달리던 배가 속도를 늦추더니,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와 수많은 횃불로 대낮처럼 환해졌다. 섬 주민이 다 모여 횃불을 밝히고 있는 듯했다. 잔교棧橋가 놓여지고 한여름인데도 후줄근한 양복에 중절모까지 쓴 초췌한 중년 신사가 낡은 가방 하나를 끼고 흔들리는 다리를 건너와 배를 탔다.
“선생님, 잘 다녀오세요.”
이어지는 합창 소리가 그를 따라 함께 건너왔다. 횃불들은 활활 타면서 선수船首를 따라 길게 흐르며 한참을 따라왔다. 중년 신사는 학교 일로 뭍(제주도)으로 출장 간다고 했다. 다소 수줍은 듯한 남자는 횃불을 담아온 듯 주위를 환하게 했다. 그 광경을 본 갑판 위의 사람들은 모두 존경하는 눈빛을 보냈다. 사랑과 신뢰가 가득한 곳이구나! 횃불은 그의 가슴 속에 옮겨 붙어 불씨를 일으켰다. 자신의 진로를 생각하며 그 밤을 하얗게 밝혔단다. 끝없이 넓고 캄캄한 밤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히 모여 잠들지 못하고 그와 함께 뒤척이고 있었다고….
추자도, 그가 교직을 택하게 된 잊을 수 없는 섬이라고 했다. 천직이라며 박봉을 쥐고도 행복한 듯했다. 시부지기 나선 여행길에 그가 이 섬으로 굳이 오고 싶어 한 이유도 여기 있었겠지. 산다고 바빠서, 살아낸다고 힘들어서 이제야 와서 보니, 꽃이 폈다 지고 낙엽이 쌓이기를 오십몇 번이나 세고서 발자국을 찍어보았으니 감회가 훈풍이 되어 감싸겠지. 수십 년을 곁에서 부실한 성적의 마라토너같이 살아온 나도 괜스레 코끝이 시리고 눈시울이 따가워온다. 봄볕에 나른나른 개꿈을 꾸듯, 세월 속에 묻힌 기억의 편린을 우리는 캐어내고 있다. 생각에서 깨어난 그의 팔짱을 끼고 숙소로 향한다. 주홍색 횃불을 닮은 노을빛이 허공에 번진다.
누구의 훌륭한 말이나 글에서, 어떤 모범적인 사건에서 진실된 감동을 받는다면 이는 우리의 삶 속에서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고, 나름 자기만의 소우주를 만드는 데 비빌 언덕이 되지 않는가. 이백여 년 전 ‘천주님을 향한 횃불’과 반세기 전 ‘추자도의 횃불’이 여행지에서 가끔 만나는 소소昭蘇한 감동의 온수 속으로 푹 잠기게 한다.
“저녁밥 잡수이소.” 아지매가 부른다. 고무줄뛰기하던 어린 날 저녁이면 우릴 찾던 엄마 목소리를 닮았다. 정이 간다. 밥상에 오른 엉겅퀴잎국도 구수하다. 전갱이 육수에 지천으로 돋는 봄풀로 끓인 섬 음식이 낯설기는 해도. 저녁을 물리고 마당에 나서니 비릿한 갯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준다. 어둠에 잠겨드는 바다와 하늘, 광활한 무변천지. 한, 둘 별들이 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