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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2월호, 통권196호 I 월평] 말과 침묵 언어가 만들어내는 세계의 아름다움 - 김지헌

신아미디어 2018. 4. 17. 23:35

"공간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말이 작가의 감성과 사유의 통로를 지나 미학을 구현해내는 과정이 문학일 것이다. 자주 쓰는 말이지만, 수필의 세계는 일상의 체험이 소재가 되지만 그 소재가 작가의 내면을 통과하여, 즉 감성과 철학적 사유를 투과하여 변증법적으로 재구성될 때, 의미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작품을 만나 공명의 순간을 누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말과 침묵 언어가 만들어내는 세계의 아름다움  -  김지헌


   존재는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과 경험과 그의 사상을, 바꿔 말하면 존재의 대부분을 말하고 쓰는 행위로 전달한다. 그런 언어에 둔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고, 유독 민감한 사람도 있다. 민감한 사람은 보편적으로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인데도 상처 받고 가슴 아파한다. 그 이유가 개인의 트라우마로 인한 것이든, 감성의 차이 때문이든, 혹은 어떤 콘텍스트 내에서의 즉각적 반응이든, 예민한 반응을 보일 때는 감정 선이 작동해서다. 감정이 움직이면 타인을 아프게 하거나 말하는 존재 스스로 아픔을 감당해야 한다. 공적 영역에서의 부당함에는 차분한 논리로 대응하는 사람도 개인적 문제로 넘어가면 조그만 문제에도 발끈하는 경우가 많다. 주체의 욕망이 작동하는 맥락에 따라 그리고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요인과 만나기 때문에 그렇다.
   한 개인이 드러내는 감정과 이성의 총체는 그 사람을 지칭하는 모든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을 말과 글, 언어로 보여준다. 이성에서 감정으로 이동하는 짧은 순간의 감각 작용들, 혹은 감정에서 이성으로 옮겨가며 빛나는 예지의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는 일, 그것이 삶의 순간들이며 그 체험을 쓰고자 작가는 글을 쓸 것이다. 두 개념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느낌과 인식의 깨달음은 주체에 따라 즉시적일 수도 있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올 수도 있다.     
   인간에게 내재된 관성 자체가 홀로 살 수 없게 되어 있는 까닭에, 타인과 조화로운 삶을 꿈꾸는 것은 당연하다. 그 가운데 주체와 대상은 타인의 말에 상처 받고 아파하던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10여 년 전에 아픈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들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바람 스치는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사는 건 살아있는 게 아니야, 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가깝지도 않은 어떤 사람이 말했다. ‘지은 죄가 얼마나 많기에….’ 그 말을 전해준 사람의 저의가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충격 또한 컸다. 아팠던 기억은 거의 희미졌는데 그 말은 지금도 살아 있어 이런저런 생각을 불러온다. 반면에 한 지인은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의 당위성을 날마다 메일 편지로 보내주었다. 지인의 말대로라면 나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살아야 했다. 세 아이의 어머니였으므로.
   두 사람의 말은 내 마음에 하나는 ‘녹슨 못’으로 박히고, 하나는 생명을 지피는 ‘에너지’로 존재했다. 이미 산화된 못은 뽑아버렸지만 못이 있던 자리에는 녹슨 쇳가루 자국의 흔적이 되었다. 나를 견디게 한 에너지는 내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타인을 향해 나눠야 할 책무로 남아 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양자 모두 말, 언어로 이루어진 존재들의 자기표현이며, 그로 인한 힘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에 생로병사의 경로를 거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죄 없는 자 그녀에게 돌을 던질지어다, 로 치부하며 지나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그때는 그랬다. 글에서는 물론 삶에서도 콘텍스트가 중요했던 모양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문학은 언어가 만들어내는 세계다. 언어는 문학을 구성하는 유일한 재료며 매개물이기 때문에 매우 본질적이다. 또한 문학 언어는 여타의 학문 언어와는 달라서 특별한 효과를 위해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배열된다. 이러한 언어적 장식은 필수적이어서 그것을 솜씨 있게 버무리는 작가가 미학적인 글을 쓰게 된다. 문학작품이 되려면 언어를 통해 사물에 대한 체험과 느낌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그 표현은 주관적이어야 하고, 객관적 사실에 덧입혀진 작가의 정서와 문학적 안목에서 가능해진다. 그래서 문학 언어는 객관적으로 통용되는 다른 학문의 언어, 혹은 일상 언어와는 다르다.    


   수필문학은 장르적 포섭 범위가 매우 넓다. 그 때문에 객관적 사실과 정보로 가득 찬 작품을 만나는 경우 정말이지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다. 독자는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 문학작품을 읽기보다는 감성적 교류를 통해 정서의 환기를 체험하고자 작품을 읽는다. 작가의 창의적 언어를 통해 독자는 상상력을 자극받고 새로운 의미를 전달받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지적 쾌락을 누리고자 하는 독자라면 철학서를 읽을 것이고, 일상의 정보가 필요하면 정보지나 인터넷을 뒤질 것이다. 필요하면 다른 매체를 활용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테니까. 
   이제 주제를 위해 정리를 해야겠다. 말이 지닌 세계를 표현하고자 누추한 경험담까지 내놓았지만,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얼마만큼 전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내놓은 의도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어떤 작가가 비슷한 경험의 이야기를 한 편의 글로 썼다면, 작품 안에는 인물들의 말과 생각과 행위가 공존해 있고, 그것을 통해 주제를 만들어가려 할 것이다. 사르트르가 ‘산문가란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했듯이, 수필을 쓰는 작가들은 말에 언어적 통일성을 부여하여 일정한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의미가 없어지면 말들은 소리와 펜의 흔적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말의 힘을 알고, 의지하고, 차용한다. 언어가 지닌 담론의 힘을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다.
   이번 호 월평은 이런 주제 의식 속에서 작품을 만난다. 공간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말이 작가의 감성과 사유의 통로를 지나 미학을 구현해내는 과정이 문학일 것이다. 자주 쓰는 말이지만, 수필의 세계는 일상의 체험이 소재가 되지만 그 소재가 작가의 내면을 통과하여, 즉 감성과 철학적 사유를 투과하여 변증법적으로 재구성될 때, 의미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작품을 만나 공명의 순간을 누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김이경, <박명薄明의 시간>
   어떤 작품은 분석하려 들지 말고 그대로 읽는 게 더 좋을 수 있다. 특히 내면적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거나 이미지화가 잘되어 있는 작품일 경우가 그렇다. 어떤 상황을 이야기로 전달한 작품은 보편적 이야기소와 맥락을 통해 비교적 용이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이미지로 보여준 것은 개개의 감성과 존재의 깊숙한 심혼에서 끌어올리는 정서적 표출이기 때문에 그 작가만의 표현 영역일 수 있다. 그래서 작가의 독특한, 그만의 문학적 개성을 이성적 언어로 해체하여 재해석하려다 작품의 원 이미지를 손상할 수도 있다. 반면 평자들은 작가가 의도하지 못한 세계를 발견하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으니 동전의 양면 같은 작업이다.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은, 발표된 작품은 독자의 영역으로 들어와 텍스트가 된 후에는 작가의 범주를 벗어나기 때문에 작품은 홀로 남아 속살을 붙이거나 초라하고 앙상한 모습으로 견뎌야 한다는 점이다.     
   김이경의 <박명薄明의 시간>은 그 의미가 숭고하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군더더기가 없는 작품이다. 우주의 율동을 보여주는 태양의 변화를 통해 존재의 성찰을 말하는 작가의 세계가 웅숭깊은 울림을 주며, 그가 해질 녘에 만나는 태양은 존재의 근원적 회귀성을 통찰하게 한다. 박명薄明의 이미지를 통해 밝음과 어둠이 혼재하는 인생사를 은유적으로 그려내는 점 또한 매력적이다. 특히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한 통찰은 작품을 높은 위치로 끌어올려 준다.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탯줄을 자르는 순간 시간성, 역사성을 부여받지만, 현상적 시간이 다하고 그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어느 때인지,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궁금하지만 알 수 없는 그 시간을, 김이경은 박모薄暮의 시간으로 본다. 그 시간은 낮 동안의 온갖 정념을 사위고 얼음처럼 차가운 밤의 시간으로 들어가기 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중도의 시간인 박명의 시간을 지난 후이다. 
   작가는 반복적으로 계양IC를 지나게 되면서 변화하는 하늘을 만나는데 “때론 금빛으로 일렁이고,” “때론 진홍의 피를 토하는 구름”은 “무녀의 옷자락”이다. 주술적 메타포로 작용하는  무녀의 옷자락은 뒤의 박명의 시간과 이어져 “그 시간을 blue hour라고만 하지 않고 magic hour라고 하는 까닭은 그 하늘 아래 서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와 연결된다. 그뿐만 아니라  무녀의 옷자락을 통해 속세의 악귀를 쫓는 7개의 방울, 즉 칠금령 소리를 불러올 때 태양은 풍진風塵을 사르는데, 작가의 의식 작용 속에서 그것은 “내일의 정결한 탄생을 준비하는 의식儀式”으로 치환된다. 어디 그뿐인가. 굽이진 길을 따라가다가 방향이 바뀌면 튜바와 트럼펫의 음색이 가슴을 두드리고, 그의 가슴은 담금질하는 대장간이 되니 magic hour의 시간 포착은 뛰어난 감성과 치열한 사유가 만난 결과에서 탄생한다. 


   짙푸른 하늘은 일렁임도 설렘도 없지만 노을보다 뜨겁고 바다보다 차갑다. 말없는 말이고 소리 없는 함성이다. 상장喪章처럼 음울하다. 그러나 요람처럼 포근하다. 잠시 그 아래 멍하게 서 있어도 좋다. 그러면 하늘과 땅이 서로 손을 내미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가 누구의 가슴에 안기는지 그런 것은 묻지 않아도 된다. 아주 조금씩 다가서며 손과 손의 경계를 지우고, 어깨와 어깨의 경계를 지운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과 가슴마저 경계를 지운다. 등 뒤 붉은 하늘에 한 조각 정념마저 사그라질 때 박명은 조용한 합장을 한다. 하늘도 땅도 하나가 되는 어둠은 노을의 붉은 시간도, 박명의 푸른 시간도, 모두 감싸안는다. 그때는 잠시 눈을 감고 함께 합장해야 한다.


   이 단락은 서술과 묘사가 구체성을 띠고 있어 작품의 주제를 탄탄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박명의 짙푸른 하늘은 “노을보다 뜨겁고 바다보다 차갑”지만 작가의 가슴을 설레게 하지는 않는다. 박명은 상장喪章과 요람 사이, 두 간극을 지니고 있어 모두를 내려놓고 멍하게 서 있게 하기 때문이다. 시나브로 다가오는 어둠 속에서 하늘과 땅이 손을 내밀고, 주체와 타자를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면 결국 양자의 경계까지를 지우게 되지 않겠는가. 태양의 그림자, 즉 정념을 가진 현존하는 것들의 그림자까지 지우게 될 때, 그토록 아름다운 박명 또한 합장을 하며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당연히 그 세계 안의 한 존재인 작가 또한 그 안으로 포용된다. 작가가 가장 순연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간이기도 하다. 비로소 주체는 언어도단의 상태, 대상을 두고 언설로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서 대상의 본질을 꿰뚫게 된다.


   나는 붉은 노을을 사랑한다. 그러나 푸른 노을, 박명을 더 사랑한다. 내 마지막 시간을 노을처럼 붉게 태우고 싶었다. 단풍의 붉은 아우성처럼 꽃답게 지고 싶었다. 그러나 박명의 하늘 아래 서면 자꾸만 어머니의 자궁이 생각난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그 시간이 숨타는 여명이었다면 박명은 조용한 회귀의 시간이리라.


   우주의 한 시간을 경험한 작가는 이제 정념적인 붉은 노을보다는, 붉은 단풍의 아우성보다는 박명을 사랑하게 되고,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통찰한다. 그것은 자신을 탄생시킨 어머니의 자궁과 돌아가야 할 어느 곳을 생각하게 한다. 태어남이 “숨타는 여명이었다면” 박명은 “조용히 회귀”해야 할 시간 어디쯤이기 때문이다. 이제 박명은 희로애락의 감정과 불과 물과 땅으로 은유된 세상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깊은 세계다. 어쩌면 작가는 박명의 시간 속에 깃든 여명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서로에게 한 틈새를 내주며 서로 곁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남과 사라짐의 순리를 받아들이는 결미, 조용히 회귀해야 할 박명의 시간 어디쯤에서 박모薄暮의 순간을 생각하는 작가의 사유가 한층 깊어진 세계로 읽혀진다. 이 글 속에서 독자 누군가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감동과 공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작가 김이경은 감성적 언어로 저녁노을이라는 대상을 치밀하게 꿰어 생겨나는 것과 소멸하는 것의 이치를 성찰한다. 작품에 대한 취향은 각기 다르지만 한 독자로서 미학적 성취가 뛰어난 작품을 만나는 것은 기쁨이다.


신창선, <그 여자>
   가슴 속에 담아둔 첫사랑의 기억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모양새는 다르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깊이 품어본 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그 흔적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첫사랑의 기억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 보편적(누구나)이면서도 특수한 소재(그만의)를 신창선은 이미지화로 성공한다. 익숙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택한 언어와 구성방법, 그리고 서술방식은 전혀 낡지 않은 글쓰기 방식으로, 그리움에 대한 미학을 충분히 솟아오르게 한다. 
   작품 <그 여자>에서의 ‘여자’는, 작가 신창선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사진을 통해 보았던 여고생이다. 강원도에서 전근 온 미술선생님이 그 학교에서 가져온 여학생의 편지를 신창선에게 읽어주고 게시판에 붙여둔다. 아마 전근 가는 선생님에게 40번인 여학생이 편지를 주며, 제주도의 40번 학생에게 전해달라고 한 것 같다. 작가는 문맥 안에 이런 이야기를 최소한으로 제한함으로써 독자는 그 생략된 서사를 유추하며 읽는 재미도 있다.
   게시판은 당시의 여학생과 신창선을 연결지어주는 매개체였다. 그래서 그는 게시판을 통해 그 여인이 걸어나온다고 했을 것이다. “게시판 속의 여인이 걸어나온다. 압축파일을 주고는 저만치 사라진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이만치서 발이 굳어 버린다. 압축파일을 연다.” 자신의 옛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서술보다는 묘사적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식은, 마치 스마트폰을 클릭하여 화면을 불러내는 것과 흡사하다. 더 강렬한 언어는 ‘압축파일’이다. 일차적으로는 생의 모든 시간을 의미하지만, 소년에서 청년, 중년, 장년을 지나면서도 심중에 담고 있던 그녀에 대한 기억, 생각, 그리움들의 총체여서 그 한 단어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작품 내의 환경이 이러하니 편지의 내용 또한 가슴 설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외로움을 타던 그에겐 ‘구세주’ 같은 그녀였다. 직접 볼 수 없으니 상상력은 갈기를 휘날리며 종횡무진 내달리는 말처럼 나아갔을 것이고, 학생 신창선의 의식 속에서 그녀는 목련도 산수유도 아닌 매화로 착지한다.


   빠르게 여름이 왔다. 편지와 함께 샐비어 꽃무더기를 배경으로 친구들과 찍은 사진도 동봉되어 있었다. 게시판에 붙은 사진을 보며 친구들이 한마디씩 입씨름을 하는데, 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나지막한 코를 한 며칠 붙들고 있으면 우뚝 솟아 친구들을 압도하는 미인이 될 것이라고. 그녀가 내 가슴에 꽂아준 미소가 친구들의 소란스러움을 밀쳐내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칼라 깃은 그리움을 벼리면서도 끝내 드러눕지 않아 보였다. 풍장하는 매화꽃으로 환생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조금은 들떠 있었다.


   작가 신창선은 지금, 학생 신창선의 그리움을 매우 성숙한 시선으로 절제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는 여학생의 코를 잡고 있는 생각을 함으로써 만나고 싶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 칼라 깃’은 학생이라는 신분을 상기시키며, 그에 대한 그녀의 그리움과 변하지 않는 마음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생각 속에 있는 그녀는 매화꽃이었고, 그에게는 “풍장하는 매화꽃으로 환생”하는 것처럼, 직접 만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생각과 상상은 걸림 없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겠다. 


   바람의 기척이 있어 문을 열었더니 민가락지를 낀 할머니가 웃으며 서 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니, 나 모르겄나.” 짧게 끊기는 강원도 억양이 섞인 서울말이 튀어나온다. 어디서 본 듯한 미지의 여인,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 그렇게 우리는 오랫동안 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고, 만날 수 없어도 만나고 싶은 여자, 지워지지 않는 여자, 지울 수 없는 여자가 오래도록 서 있다. 사랑하지 않는 게 사랑이라는데, 기다리지 않는 게 그리움이라는 아니러니를 나는 되뇌고 있다. 꾸밈없이, 꾸밈없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숱한 편지를 썼으면서도 부치지 못한 그는 오로지 상상력 속에서만 그녀를 만나며 평생을 보냈고, 마침내 바람의 기척을 핑계로 그녀를 소환한다. 갈래머리 소녀가 “민가락지를 낀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하는 동안 그녀는 그의 마음속에서 살았다. 사진 속의 여학생, 그것도 게시판에 붙여 있던 사진 속의 여학생은 신창선의 가슴에서 살다 마지막에는 “눈 그림”으로 만난다. 기억의 완성이다. 현실에서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은 결국 그리움이 쌓이는 과정만 있고 실체가 없으니 그 끝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도 그 여자가 지워지려 한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실체 없는 그리움에 지쳤”을 수도 있지만 시간은 인간에게서 아름다운 기억도 소중한 의미도 매몰차게 흩어가 버린다. 작가는 아스라한 시간을 거슬러 그때의 추억을 쓰고, 점을 찍는다. 가슴 속에 있는 혼자만의 추억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그 추억은 빛이 바래 지워졌다고 생각한다. 작가만의 소중한 이야기를 쓰고 난 후의 상실감일 수 있다. 어쩌면 그 여자는 그에게 평생 여자를 상징하는 은유로 기억되었을 테고, “눈 그림으로” 그 본질성을 이미지화 하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의 글 속에서 그 여자는 아름답게 살아났고, 언어의 힘으로 복원되었다. 한 편의 작품 속에서 그와 그녀는 누군가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그리움으로 한 숨 짓게 하고, 다시 살아나게 하며 어떤 존재보다도 오래도록 살아있을지 모른다. 형상화가 잘된 문학작품의 힘이다. 


오문재, <죽음을 준비한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숙명적으로 죽음을 부여받는다. 존재의 시작과 끝의 선조적 도정에서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아이러니한 숙제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현존하는 존재에게 삶과 죽음은 연속선상에 있다고 하지만, 실상 죽음은 우리의 시간 저 너머에 있어 아무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어렵다. 다만 존재가 현실에서 사라지게 될 때 우리는 ‘죽음’이라고 일컬을 뿐이다. 존재가 살아있으면서 죽음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은 생겨나면 사라져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로운 이가 없기 때문이다. 삶 속에 변증법적으로 엉켜 들어있는 그것은 우리에게 끝없는 갈등과 구속의 원리로 작동하며, 동시에 삶을 추동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생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바타이유는 죽음에 대한 금기와 위반이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라 한다. 
   오문재의 <죽음을 준비한다>는 생의 시간보다는 죽음의 시간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남기는 글이다. 그는 아직 병들고 죽어가는 일이 자신과는 무관할 거라 생각하고 살았지만 병과 죽음은 음험하게 그의 곁에 와 있었으니 얼마나 황망했을까. 작가는 불치병을 판정받고 인생을 정리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지만 우리는 그가 행간에서 표현하지 않은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죽음을 가까이 두고서도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담담’한 심정에 오히려 슬픔과 쓸쓸함을 느낀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누구나 가야하는 전 존재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마음에 떨림과 무서움이 엄습했다. 생, 노, 병까지는 이해를 하지만, ‘사’까지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라고 표현한다. 살아있는 존재 누구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죽음까지 수용해야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라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한다. 통증으로 인한 아픔과 고통, 절망과 두려움의 심연 속에서 수많은 자맥질을 하고 난 후에 이른 생각이었다. 세상을 떠날 때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고 “아름다운 세상을 많이 보고, 아름다운 것들을 더 많이 간직”하려고 해보지만 “숨 쉬기가 곤란하다든지, 몸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된다면 이 생각도 장담할 수 없다.”라는 말은 통증으로 고통 받는 그의 심경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감각으로 오는 몸의 통증은 그가 아무리 단단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이겨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직 생을 살고 있으면서 자신의 소지품과 물건들을 정리하는 작가의 마음이 어떠할지 짐작이 된다. 한 사람의 생,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작가 오문재는 마흔네 살에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했고, 시집도 내고 수필집도 출간하여 작가가 되었다. 그는 후회하지 않으려고 늘 도전하며 살았다. 색소폰과 오카리나를 배워 봉사도 하였다. 그것들을 배우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다는 이치도 깨달았다.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그에게 죽음이 턱하니 앞에 와 있다. 생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니 죽음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화려한 생을 산 사람도 크게 간추리면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삶을 열심히 사는 것, 이것만 남지 않겠는가. 다만 누구의 생도, 개별적으로는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 맥락에서 작가가 천상병 시인을 말하며 자신은 그보다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작가 오문재의 삶은 그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그만의 역사여서 누구의 삶과 비교되거나 견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작가도 충분히 훌륭한 일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으니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해도 변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삶을 더 붙잡고 발버둥치고 해봐야, 더 사는 것도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누구나 반드시 겪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정리하니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에 감사한다. 열심히 살아준 나에게 고마웠고, 나를 도와주고, 용기와 희망과 칭찬을 해주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아름답고 행복했던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한다. 안녕.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서 저토록 선善할 수 있다면 천국에 태어날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통해 다시 탄생한다면 말이다. 통증의 고통 속에서 간신히 자신을 견디면서도 현실을 초월하는 저 태도 앞에서 오히려 우리는 숙연해진다. 죽음에 대해 초탈한 저 시선은, 생을 내려놓고 절망을 극복하는 시간과 살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고투하다 찾아온 성찰을 통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생에의 욕망과 죽음에 대한 극한의 절망 사이에서도 자아를 폐색시키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벼린 결과로 써진 글이어서 더욱 그렇다. 삶을 보장받은 듯한 인생도 고해를 떠다닌다는데, 예측할 수 없는 통증이 급습하는 병을 앓는 이의 참담함이야 오죽하랴. 그래서 더욱 작품을 읽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지만, 탄생과 죽음, 생성과 소멸의 연속선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수필, 오래도록 선善하게 기억될 것이다.


최원현, <향기만큼 사랑만큼>
   우리의 일상에서 말을 거세한다면, 즉 침묵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면 의사소통 체계는 어떻게 변화할까? 이러한 상상은 말이 난무하는 세상에 살면서 말의 중요성을 잊고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개인은 물론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의 말은 모든 의사소통의 본령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은 세상을 이해하는 창구가 된다. 그렇게 중요한 말인데도 우리는 마치 공기의 존재를 잊고 사는 것처럼 말의 가치를 잊고 지낼 때가 많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말을 남용하거나 반대로 말 한 마디에도 인색하게 굴 때가 있다. 수필 <향기만큼 사랑만큼>은 흔히 인사치레로 하던 말, 혹은 영혼 없는 말을 내놓으며 사는 우리의 모습에 질문을 던지는 글이다. 
   작가는 이런 주제의식을 전하기 위해 잘 알고 있는 한 여성을 등장시킨다. 그녀는 서른세 살로 은행에 다니다 만난 남편과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엄마지만 어느 날 암이라는 불행한 사건과 마주친다. 그리고 치료를 받는 중 문병 온 사람들이 건네는 위로나 격려의 말들이 자신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말에는 진심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녀는 똑같은 상황에서 타인에게 건넸던 “위로와 격려의 말들이 자신이 아프게 되자 일렬로 줄을 서더니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자신에게” 되돌리는 말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진정으로 아픈 이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이 되어 했던 위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전한 말은 작가에게 “어떤 상황도 내가 속해 있지 않으면 중요하지 않은 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를테면 타인의 아픔이 아무리 커도 내 손톱 밑의 가시만 못하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흔히 너의 아픔을 안다고 말할 때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그 표현은 허세거나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주체와 타자와의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주체와 타자와의 교감이 어느 정도 이루어질 수 있는 상태는,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말을 할 때, 상대의 가슴에 스며드는 말을 할 때다. K 또한 가장 귀한 것은 진실이라고 말했지 않은가. 이때의 진실은 내가 네가 되어 같은 것을 공감해야 가능하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거리가 얼마만큼 가깝게 있느냐에 따라 작가가 말하는 ‘그 입장’이 될 수 있다. 다소 비약된 느낌은 있지만 작가의 의도는, 아무리 좋은 말도 주체와 타자와의 거리가 있는 한 허공으로 흩어지는 의미 없는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난을 살짝 건드려 본다. 잘해 준다고 해주었던 것들, 꽃이 피지 않는다고 내쳤던 일들, 조금만 더 기다려보지 못 했던 아쉬움까지 그게 어찌 난에게만 했던 행동이요 마음이었겠는가. 내 나이의 반도 안 되는 K가 세상이 다시 보인다고 하던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나는 어느새 눈도 귀도 흐려지고 생각도 마음도 무뎌지고 있다.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더 나빠지진 않아야 할 텐데, 더 잃는 것은 없어야 할 텐데, 향기롭게 퍼지는 난향이 눈에도 보이는 것 같다. 사람도 향기처럼 사랑의 마음을 펴고 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향기만큼 사랑만큼


   난을 키우던 작가는 난에게 정성을 들이다가 꽃을 피우지 않자 베란다로 추방시킨다.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었더니 난은 어느 날 꽃을 피웠다. 그 에피소드를 통해 작가가 숨겨둔 뜻은 어떤 대상이든 그만이 원하는 환경이 있을 것이고, 대상이 원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의 많은 경험을 통해 연륜이 생긴 작가지만, 그 생의 절반만큼도 살지 않은 젊은 K가 세상을 성숙하게 바라보는 것을 통해 작가 역시 각성된 생각이 온 것이다. 그래서 “더 잃는 것은 없어야 할 텐데”는 사람이 가진 진실을 더는 잃고 싶지 않다는 작가의 소망으로 느껴진다. 말을 통해 사람의 진심을 전하고, 그 마음을 오롯하게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이미 난의 향기를 맡고, 난의 향기를 볼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작품이 수사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아도 작가의 진실에서 나온 글이기에 그 향기 또한 은은하게 품고 있다.


오순자, <침묵의 소통>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전달하고 타인과의 원활한 소통을 시도한다. 언어만으로도 주체와 타자가 완전하게 소통 가능하다면 세상에는 다툼도 없고 분쟁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인간은 이성적 토론조차도 원만하게 진행하기 어려울 만큼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에서 완전하지 못하다. 문학 또한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의도를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한다는 불완전성에 고뇌한다. 필자 역시 생각이나 느낌, 감성으로 다가오는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쓰고 있지만 자신이 쓴 글을 볼 때마다 불만족스럽다. 결국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고, 작가는 그를 통해 세상과 교감하려 하지만 늘 잉여의 부분이 남아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한 언어의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는 오순자는 <침묵의 소통>에서 침묵의 가치와 그 의미를 말하고 있다. 사실 침묵과 말은 현상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것이다. 침묵도 언어의 세계라는 의미다. 작가는 침묵이 함축하고 있는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몇 개의 에피소드를 이어가는데, 작품의 서두에서는 노란 국화꽃과 재스민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다. 말없는 꽃들과의 교감은 주로 작가의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며, 작가는 그런 꽃들의 몸짓언어에 집중한다. 꽃이 변화하는 과정을 응시하는 동안 작가의 내면 또한 단순화되어 복잡한 상념 없이 자신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즉 잡념에서 벗어나 가장 단순한 의식에 집중된 시간인데, 보편적으로 의식의 정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 연장선에서 미국의 요세미티 파크의 경험이 이어지는데, 자이언트 세쿼이아 군락지에서 나무들과 무언의 교감을 하는 장면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천 년 동안 나무와 하늘과 해가 발설하지 않고 나눈 침묵의 깊이가 마음으로 들어와 감각을 마비시켜 내 언어를 잠재웠다. 그리고 옹색한 내 터에 꽉 찬 수십 년간의 언어의 웅성거림이 천천히 땅으로 스며들어 나도 결만 남은 듯 가벼워졌다.”는 침묵의 나무들과 작가가 합일된 순간을 맞는 표현이다. 나무와의 교감은 언어로 이루어진 작가의 의사소통 방식에서 침묵이라는 새로운 소통 방식을 체험하게 해준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 체화되었던 그 경험은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그에게 치유의 공간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경험을 내면에 축적하면 그것은 그의 생애에 걸쳐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저 깊은 무의식에 저장된 것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 아직 말을 할 줄 모르는 아기와 손끝으로 교감을 하고 헤어지며 작가는 머지않아 아기도 말을 배우며 자기의 교분을 쌓아갈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아기가 습득한 언어는 그만의 무의식 언어가 있어 완전한 소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더 중요한 것은 언어란 “내가 의도한 것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것을 즉각 뒤집어 세계안의 타자처럼 되돌려 준다.”는 헤겔의 말이다. 결국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언어는 주체가 자신의 어떤 의도를 전달하려 할 때 상대에게 완전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남는 잉여분은 타자화 되어 주체에게로 다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존재가 세계와 완전하게 합일될 수 없는 이유 이며, 존재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죽하면 중국의 어느 왕은 백성을 위해 언어를 발명하고 밤새도록 통곡했을까. 그 왕은 언어의 불완전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어서 더 이상 완벽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밤새 탄식에 잠겼던 것이다. 언어는 의사전달을 용이하게 하나 그 의미는 완벽하게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고체계가 단순하던 신화시대에는 영혼의 교감만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언어는 그 체계가 복잡할뿐더러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사고체계 또한 매우 복잡해서 의사소통의 불완전함은 필연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의 소통>의 주제는 언어가 아닌, 언어 이전의 소통방식, 침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만나면 한시도 쉬지 않고 말을 주고받으면서 정을 나누고 격한 감정을 노출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정보 외에 깊은 곳에서 생성된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은 스스로도 명확하게 잡  아낼 수 없기 때문에 언어로 소통할 수 없다. 또 체질화된 교양과 예법의 벽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수 없게 한다. 그래서 뱉어놓은 언어 안에 숨어있는 속뜻을 서로 탐지하면서 대화한다. 인간의 외로움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현대인이 주고받는 말은 언어의 기표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숨어있는 속뜻을 탐지하면서 대화를 해야 하는 인간은 얼마나 피로할 것이며, 상대와의 거리감을 느끼게 될 것인가. 존재가 외로운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주고받으며 의사소통을 하지만 정보 외에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할 수도 없고 해답을 찾을 수도 없다. 근원적인 질문이란 인간존재에 대한 질문, 언어이전의 세계에 대한 탐색이다. 따라서 언어로는 언어 이전의 세계를 찾아갈 수 없고, 침묵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현인들은 화두를 들고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인간의 본래면목을 찾고자 했고, 겉치레적인 말에 지친 사람들은 침묵에 잠겨 내면의 소리를 듣거나 침묵을 통해 대상과의 교감을 시도해왔다. 진정한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 자연과의 교류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때의 언어는 주체의 내면 속에 잠들어 있는, 무의식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감성이 활동하며 올라오는 언어다. 이때의 언어는 사회적 체계 속에서의 언어가 아니라 개개인이 습득한 무의식 언어의 재현이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개개인의 언어는 “내가 의도한 것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것을 즉각 뒤집어 세계안의 타자처럼 되돌려”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언어로 나누는 소통의 두께가 그토록 핍진하다면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외로움에 길들여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을 못 견뎌한다. 진정한 소통, 영혼의 교감은 홀로 있는 시간, 혹은 존재의 깊이를 궁구하는 시간에 찾아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의 외피만을 좇아 탐하고 그에 길들여져 살아간다.
   그런 본질적 세상을 꿈꾸면서도 우리는 현상적 세계를 등한시할 수 없고, 그 세계 속에서 본질을 향해 나아가려 수고한다. 언어의 불완전성을 알고 있음에도 작가는 이 글을 썼고, 우리는 작가의 언어를 통해 그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전부가 아닐지라도, 언어로 써야만이 언어가 꾸려내는 아름다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결국 존재는 말과 침묵 사이에서 주체가 원하는 방식대로 취사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문학이 작가의 심중에 있는 생각과 느낌, 철학을 말하는 것이라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못다 표현한 그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늙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작가는 어머니의 오랜 모습을 그려낼 것인데, 그녀가 좋아해서 오랫동안 입어온 낡은 옷에 스며든 육체화 된 감정, 육체에 스며든 감정을 잡고자 몸부림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되고 행방불명이 되고 스스로 낯설게 되고 사방으로 찢겨 있으면서도 여전히 거기에 현존하고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결국 언어를 통해 저 늙은 어머니(대상)에 대한, 찢어져 행방불명된 감정을 충실하고 촘촘하게 꿰매는 작업을 통해 현존하게 하는 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