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02월호, 통권196호 I 지상에서 길찾기] 환희 - 이순남
"온 집안을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좋아하는 손자의 웃음소리는 활짝 핀 꽃망울 같다. 손자 재롱이 봄꽃 터지는 소리처럼 내 가슴에도 들린다. 봄에 씨앗들이 음표를 그리며 꿈틀거리는 힘찬 소리와, 꽃이 떨어져 열매가 되고, 열매가 썩어 밀알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리처럼 삶도 그렇게 돌아간다는 것을 어린 손자가 가르쳐 주었다."
환희 - 이순남
벚꽃들이 비로소 만개하기 시작했다. 겨우내 딱딱한 나무 속에서 저들은 오늘을 꿈꾸었으리라. 희망은 꿈꾼 자에게 찾아오는 것이 진리라는 걸 나는 올해도 자연을 통해 만끽한다. 갇혀있는 것이 세상으로 나올 때의 그 환희, 자연이나 사람이나 모든 사물이나 기회를 만나기 나름인가보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손자가 집에 왔다. 의사 표시를 울음으로 하던 때를 지나 15개월 된 아기는 모든 것이 신기한 모양이다. 손에 잡히는 대로 서랍을 열어 속에 있는 물건들을 쏟아 놓는다.
서랍에 넣어둔 물건들은 십여 년 전 이사할 때 정리해 두고부터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물건들이다. 아직껏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쉬운 물건이라 서랍에 넣어두고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두운 서랍 속에서 주인의 손길을 그리워했던 그 물건들이 손자 손에 의해서 때를 만났다. 천진난만한 아이는 갇혀있는 물건들의 심정이라도 헤아린 듯 마구 끄집어내어 물건과 즐겁게 놀이를 한다. 순식간에 온 집안에 난장판이 되었다. 밖으로 나온 화투장, 색이 바랜 편지, 옛 사진, 넥타이핀, 열쇠, 목도장, 아들이 초등학교시절에 사용했던 붓, 조각칼 등등 방치해둔 물건들은 손자와 덩달아 춤을 춘다.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도 신이 난 듯 손자와 같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돌아다닌다. 손자는 눌러보고 만져보고 빨아보고 던지며 호기심 놀이에 푹 빠졌다. 손자의 놀이를 따라다니느라 나도 덩달아 바쁘기 짝이 없다. 신기한 세상놀이에 손자는 바쁘다. 아이로 인하여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온 물건들과, 엄마 뱃속에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손자나, 손자에 반한 바보 할머니나, 혼연일체가 되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서랍 속은 나의 내밀한 이야기들이 벚꽃 꽃망울 터지듯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터진다. 옛날에 아옹다옹 살았던 나를 알기라도 하는 듯 빙그레 웃고 있지 않은가. 물건들을 거실에 다 쏟아 놓고 좋아하는 손자가 옛날의 내 아들 행동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집안에서만 매일 아이와 씨름하며 지냈던 지난날들이 영상처럼 겹친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전긍긍하며 엄마, 아내, 며느리 역할에만 전념하느라 자신을 돌보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아들은 커가고 시간은 흘러갔지만 나 자신을 향한 시간은 멈춰 있었다.
옷을 다 벗어버린 채 매운바람에 시달리며 떨고 있는 나무를 볼 때면 참담한 느낌이 든다. 겉으로 보기에는 황량하고 쓸쓸한 느낌이 들지만 사실상 새 생명의 우렁찬 교향곡을 위한 준비의 계절이다. 새봄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인고의 현상이라 하겠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처럼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남편 왈, 여태껏 가족을 위해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라’는 것이다. 뜻밖의 말에 귀를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웬 횡재냐 싶어 어리둥절했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밀어주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순간 지금까지 고생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으로 보였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방송통신대학에 입학을 했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고 살아온 나에게 보답이라도 해주듯 남편은 공부에 전념 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밀어줬다. 덕분에 대학생활도 즐겁게 하고 무사히 학위도 취득했다. 그때가 나에게는 가장 신바람 나는 시간이었다.
나의 참담한 시기는 서랍 속에 갇혀 있는 물건과 다름없었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불필요한 물건이지만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은 내 삶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 흔적들을 손자가 구석구석에서 찾아내어 마치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것과 같다.
서랍 속에 갇혀 있는 물건들도 우연히 때를 만나 아이와 재미있게 보내는 일도 우연히 생기고, 나무도 아름다운 잎을 보고 꽃을 보기 위해서는 힘든 겨울을 견뎌내야 봄을 맞이하듯이, 인생도 견디다 보면 우연히 가고 우연히 찾아오리라 본다.
온 집안을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좋아하는 손자의 웃음소리는 활짝 핀 꽃망울 같다. 손자 재롱이 봄꽃 터지는 소리처럼 내 가슴에도 들린다. 봄에 씨앗들이 음표를 그리며 꿈틀거리는 힘찬 소리와, 꽃이 떨어져 열매가 되고, 열매가 썩어 밀알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리처럼 삶도 그렇게 돌아간다는 것을 어린 손자가 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