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02월호, 통권196호 I 사색의 창] 진짜 증명서 - 박기옥
""임자, 당신의 검사 결과 전후의 혈압 수치가 왜 이리 크게 날꼬?” 너스레를 떨며 아내의 얼굴을 설핏 살폈다. 아내의 처진 눈에는 어느새 눈물방울을 매달고 있었다. 몸뚱이로 말하는 남편의 ‘진짜 증명서’를 보았으니."
진짜 증명서 - 박기옥
가짜 증명서가 활개치는 세상이다. 허위 증명서를 만들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허다하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에도, 신성하게 여겼던 창작 활동에까지 표절 논란으로 사회가 들썩인다. 나 또한 이에 뒤질세라 거짓 증명서 조작에 더러는 동참했다. 가장 신뢰를 쌓아야 할 아내에게 가짜 증명서를 많이 남발했다.
아내는 소위 종합병동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다. 자주 어지럽고, 메슥메슥 토할 것 같고, 자기도 모르게 침을 흘리고, 손이 덜덜 떨려 국물 먹기가 어렵단다. 머릿속의 혈관이 막혔거나, 실핏줄이 터졌을지도 모른다며 한숨은 명주실처럼 질기다. 어지럼증세가 심할 때는 천장이 뱅뱅 돌아간다며 달팽이관을 의심한다. 어지럼증이 파도처럼 일어날 때면 뱃속에 위액까지 통째로 비워낸다. 머리를 싸매고 며칠을 옴짝달싹못한 채, 날짜를 채워야만 겨우 털고 일어난다.
폐와 심장 쪽이다. 조금만 걸어도 가슴이 답답하고, 전화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란다. 조금만 신경 쓰면 무슨 덩어리가 목울대를 타고 올라온단다. 시한폭탄을 가슴에 품고 있다고 단언한다. 협심증·신부전·심근경색을 의심하면서 구사하는 의학 용어는 전문의를 능가한다. 그뿐만 아니다. 몸속에 혹을 왜 그렇게 많이 키우는지 모를 일이다. 갑상샘에는 젓가락 굵기 크기의 혹이 있고, 유방에는 몽당연필만 한 망울이 묻혀있다. 올라붙은 아기집을 아래로 당겨내어 자궁의 혹을 제거했다. 대장은 검사할 때마다 몇 개의 용종을 잘라낸다. 걱정할 혹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언제 독버섯으로 불거질지 불안한 빛이 역력하다. 가짜 진단서라도 만들어 아내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문득문득 일어난다.
“임자, 큰 병이 아니면 다행이고, 몹쓸 병이 실렸다면 빨리 발견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자.”며 아내를 설득했다. 종합병원은 예약 절차를 밟는 데만 한나절이 걸렸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할 수 있는 검사는 죄다 받아 볼 참이다. 머리를 살피는 MRI, 달팽이관. 호흡기 쪽에는 폐 사진, 폐활량. 심장은 심전도·심장 초음파·운동 부하검사를 받았다. 피는 두 대롱이나 뽑았다. 갑상샘·간 수치·혈당 수치 등 피로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의뢰했다. 대변과 소변도 채취했다. 혈변은 없는지 대장 쪽을 관찰할 모양이다. 검사에 지치고 긴장해서 지쳤다. 제대로 먹지 못한 처지에 불면증까지 시달리고 있었으니 아내는 파김치가 되어갔다.
일차 검사 결과를 보는 날, 신경외과 선생님 앞이다.
“신경을 많이 쓴 적이 있습니까.” 초조한 우리 부부를 힐끗 쳐다본다. 화살촉이 나의 마음밭 한가운데를 정조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음 한구석을 바늘로 찌르듯 따갑다. ‘남편이 허튼 짓을 많이 하지 않았느냐.’를 내포했으리라.
“없는데요.” 아내의 대답이 천연덕스럽다. 남편의 자존을 세우려는 것이 분명하다. 사십 년 가까이 살면서 왜 신경 쓸 일이 없었겠는가. 어려운 형편에 자식 뒷바라지며,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똥오줌 수발이며, 믿었던 남편의 헛짓. 이러한 것이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얻은 병일진대. 적어도 아내의 신경성 질환에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
“사진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핏줄도 막히지 않고 질서정연합니다. 앞으로 신경을 적게 쓰십시오.” 의사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잠시뿐.
호흡기 검사 결과는 우리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폐결핵을 앓은 적이 있습니까? 폐가 영 지저분하네. 작은 혹도 여러 개 보이고. 정밀검사를 해봐야겠습니다.”
컴퓨터에 올려놓은 폐의 한쪽이 뿌연 안개 속에 묻혀있다. 순간, 아내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진다. 끝날 줄 알았던 검사를 다시 시작했다. CT 촬영은 예약부터 결과를 볼 때까지 열흘이나 족히 걸렸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는 성서 구절을 뇌며 용기를 돋우려 애를 써보지만, 귓가에 맴돌았으리라. 자주 빼먹던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매달렸다. 신에게 이처럼 간절하게 다가간 적이 여태 없었다.
최종 결과를 보는 날이다. 혈압을 측정하여 의사에게 제출하는 것이 병원의 절차이다. 쇠약할 대로 쇠약했지만, 아내의 혈압만은 정상수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혈압약을 챙겨 잡삿능교. 당신도 혈압 재 보소.”
몸을 겨우 가누면서도 남편의 고혈압을 걱정하는 아내가 안쓰럽다. 나의 혈압은 고혈압 2기 수준인 160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호흡기 의사 앞에 앉았다. 마치 죄수가 판사의 선고를 기다리듯 초조하다. 사형·징역·금고·구류·벌금·무죄를 선고할 때 판사의 표정이 다르듯, 의사도 사람일진대 병의 경중을 얼굴에 담으리라. 장사 삼십여 년에 고객의 표정으로 거래의 성사 여부를 읽어내지 않던가. 컴퓨터 화면을 유심히 살피는 의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지극히 사무적인 모습이다. 결과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마른침이 꼴깍꼴깍 넘어가고, 손바닥엔 연방 땀이 배어난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진다.
“많이 걱정했지요. 폐에 생긴 것은 물혹입니다. 자연스레 사라질 수 있는 착한 혹입니다.” 의사의 선고에 언 가슴을 쓸어내렸다.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이 이뤄지는 순간, 안도 뒤에 따라오는 허탈감을 어떻게 해석할까. 한 달여 동안 긴장이 풀어지니 육신도 풀어졌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정맥이 불거진 아내의 야윈 손을 살포시 감쌌다.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진심으로 다가간 적이 드물었다. 가짜 증명서를 무수히 남발하지 않았던가. 진실을 담지 않았다. 사업을 핑계로 고주망태가 됐을 때는 신용이 두터운 친구를 증인으로 채택하여 위증을 일삼았다. 간간이 써먹어야 약발을 받을 터인데. 걸핏하면 거래처 접대, 상가喪家 등을 핑계로 허위 증명서를 들이대다 보니. 진짜 증명서를 들이대도 위조증명서 취급해버린다. 그만큼 불신의 골이 깊었을 터다.
“여보, 조금 전 당신의 혈압이 160을 넘었는데 다시 체크해 봅시더.” 여유를 찾은 아내의 성화다. 혈압계에서 130이라 찍힌 검사치를 도르르 토해내고 있었다. 160을 가리키던 수치가 30이나 떨어졌다. ‘호재로다. 절호의 기회로다!’
“임자, 당신의 검사 결과 전후의 혈압 수치가 왜 이리 크게 날꼬?” 너스레를 떨며 아내의 얼굴을 설핏 살폈다. 아내의 처진 눈에는 어느새 눈물방울을 매달고 있었다. 몸뚱이로 말하는 남편의 ‘진짜 증명서’를 보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