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수필과비평 2018년 02월호, 통권196호 I 사색의 창] 고양이와 지게 - 김재근

신아미디어 2018. 4. 6. 09:42

"노자의 ≪도덕경≫에 “천하는 신비로운 그릇이라, 작위로 할 수 없고 집착할 수도 없다. 작위로 하면 무너뜨리고 집착하면 잃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위 구절과 같이 자연의 순리대로 자연을 아끼고 이해한다면 문명사회에도 옛날 방식이 조금은 필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고양이와 지게   -  김재근

   식물이나 동물도 어린것은 사랑스럽고 귀엽게 느껴진다. 최근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반려동물은 집안에서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위안과 사랑의 감정을 전해 준다. 국립공원인 도봉산은 고양이들의 산이다. 살찐 고양이들이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다. 도망가지도 않고 사람 주변을 맴돈다. 다람쥐와 그 많은 청설모는 어디에도 없고 여기저기 눈에 보이는 게 고양이들뿐이다. 어찌해서 고양이 산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엄동설한에도 고양이들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자연의 생태계를 인간들이 버려 놓은 것 같다. 먹이를 주지 말아야 하는데 귀엽다고 주는 먹이가 고양이 숫자를 불려 놓은 듯하다.  
   낙엽이 진 산에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의 귀를 닮았다는 우이암이다. 능선에 우뚝한 바위들, 그리고 하얗게 채색된 자연풍경이 잘 그려진 진경산수화를 선물하고 있다. 다시 눈을 돌려 서울을 내려다본다. 서울 시가지가 보이지 않는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짙은 잿빛 매연이 서울을 가득 덮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오르는 동안 매캐하게 느껴지던 것이 이유가 있었던 거다. 인간이 편리함을 추구하여 쓰고 버린 결과가 하늘에 잔뜩 쌓인 거다. 서울 시가지는 물론 주변 산도 보이지 않고 롯데타워 꼭대기만 보이고 있는 현실에 아득함을 느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집을 짓고 생활하고 급경사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 자운봉 도봉산 표지판을 거쳐 신선대에 올라 주변 산세를 살펴본다. 바위로만 구성된 자운봉의 위용과 장엄한 주변 산세들이 여기저기서 남성적인 건강미를 과시하고 있다. 급경사의 거대한 바위에 소나무들이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다. 한겨울 추위에 흙도 없는 바위를 터전으로 삼은 수십 년생 소나무들의 처연함에 생명력의 위대함을 본다. 나무도 태어나는 장소는 자신의 선택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태어난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온갖 역경을 이겨 내어야 한다는 것을 이곳 푸른 소나무들이 몸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산 정상에서 내려오는데 지게에 짐을 가득 지고 산을 오르는 이가 있다. 그냥 오르기도 힘든 등산로에 무거운 짐을 잔뜩 진 사람이 한발 두발 의연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살펴보니 사찰에 사용될 물건인 듯하다. 능숙한 솜씨로 거뜬하게 오르는 모습이 등산객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도봉산에는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 사찰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 많다. 좁고 가파른 길을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케이블 카도 없는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물품을 옮겨 날라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이 짐을 지고 나르는 지게다. 지게는 좁은 길에나 산을 오르내리며 짐을 운반하는 데 쓰이는 도구로 제격이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시골에 살면서 농번기에는 수확한 벼나 보리, 그리고 나무를 지게로 나르던 경험이 생각난다. 농사가 생명이던 시절, 경지정리도 안 된 논에 수확한 농산물을 운반할 수 있는 도구는 오로지 지게 하나였다. 학교에 다녀와서는 바로 지게를 지고, 들판에 나가서 볏단을 지게에 잔뜩 싣고 힘들어서 낑낑거리며 집까지 운반해 왔다. 당시는 취사나 난방의 주 연료가 나무였다. 집 근처 산에는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다. 걸어서 10여 리나 되는 먼 거리의 깊은 산에 가야 나무가 있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시골 생활에 나이는 어려도 한겨울 엄동설한을 지내려면 겨울 방학 동안 부지런히 산을 오르내리며 나무를 해야 했다. 도시락을 싸서 지게에 달고 산에 가면 얼음이 얼었다. 그걸 먹고, 몇 시간 동안 나무를 해서 무겁게 짊어지고 오다 보면 해가 지는 때가 많았다. 그렇게 해서 힘은 들었어도 마당에 나무들이 처마 높이를 훌쩍 넘어 높게 쌓이는 것을 보면, 한겨울 난방 걱정에서 벗어났다는 뿌듯함을 느꼈던 때가 있었다.
   티브이에서 보았다. 중국에서 깎아지른 듯한 험한 바위산 정상까지 어깨에 무거운 짐을 메고 나르는 부부가 있었다. 천 길 낭떠러지 위험한 등산로를 혼자가 아닌 부부가 어깨에 잔뜩 짐을 메고 목숨을 담보로 오르는 길이다. 한 발만 삐끗하면 그만인 등산로가 그들의 생명줄이었다. 날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자녀들의 교육과 생계를 책임지는 모습을 보았다. 목숨을 담보로 고생하며 벌어온 돈으로 자식이 좋아하는 과자 한 봉지를 사 들고 집으로 향하면서 미소 짓는 모습을 보았다. 하루 종일 집에서 부모를 기다리던 어린 자녀가 그 과자 한 봉지로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던 모습, 그것이 그들의 행복이자 삶의 이유였다.
   자연은 자연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각자 역할이 있다. 요즈음 세상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 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들의 편리성만을 추구 하다 보니 자연이 훼손되고, 자연에 간섭하게 된다. 오늘 산에서 내려다 본 매연도 그 반대급부이고 산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높은 산에 위치한 사찰도 차량이 다니는 길을 내거나 케이블로 운반할 수 있지만, 불편을 감수하면서 자연과 어울리며 옛날 방식대로 지게로 운반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노자의 ≪도덕경≫에 “천하는 신비로운 그릇이라, 작위로 할 수 없고 집착할 수도 없다. 작위로 하면 무너뜨리고 집착하면 잃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위 구절과 같이 자연의 순리대로 자연을 아끼고 이해한다면 문명사회에도 옛날 방식이 조금은 필요한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