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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1월호, 통권195호 I 지상에서 길 찾기] 애틋한 사랑 - 조흥제

신아미디어 2018. 3. 30. 09:09

"사랑 중에서도 육체적인 사랑은 쉽게 식을 수 있지만 정신적인 사랑은 어지간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이광수의 대표작 <사랑>도 정신적인 사랑을 강조했다. 이러한 사랑을 애틋한 사랑으로 보고 싶다. 서로 마음은 있으나 다가갈 수 없는 처지여서 속만 태우는……. 그렇기에 두 사건의 전설을 만들어 낸 사람도 같은 시대 인물은 아닐 터이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 아리게 하는 그런 사랑을 등장시켰던 것 같다. 그 의도는 성공한 것이다. 나같이 감성이 둔한 사람의 가슴에도 와 닿게 하였으니."





   애틋한 사랑  조흥제

   이런 사랑을 무엇이라고 하면 좋을까?
   전라북도 김제 벽골제에서 전국 노래자랑이 개최되었다. 무대 뒤에 단야루丹若樓라는 누각이 보였다. 단야루가 궁금하여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단야’가 벽골제에 얽힌 전설의 여주인공이라는 이름과 함께 노란 원피스를 입고 뒤로 넘긴 머리에 테를 두른 사진까지 실렸다. 나는 20여년 전에 벽골제에 얽인 전설을 주제로 한 <지극한 사랑>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였어서 벽골제 노래자랑에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벽골제壁骨堤는 김제에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인공저수지로 백제 11대 비류왕(330)때 축조된 제방의 길이만도 3㎞가 넘는 큰 저수지다. 삼국 통일 후인 신라 38대 원성왕(785~798) 때 벽골제가 무너지자 서라벌에서 토목 기술자인 원덕랑을 보냈다. 원덕랑은 그 고을 태수네 집에 머물렀다. 원덕랑은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어서 태수의 무남독녀 외딸이 사랑하였다. 그러나 원덕랑에게는 약혼녀가 있어서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던가 보다. 벽골제의 보수공사는 쌓으면 무너지기를 반복해 공사가 진척되지 않았으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때 노승이 지나가다 ‘용이 방해하는 것이니 동정녀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혼잣말 비슷하게 하였다. 원덕랑은 노승의 말을 태수에게 보고하였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태수는 그 말을 믿었다. 돈은 얼마든지 줄 터이니 딸 가진 사람은 내 놓으라고 하였지만 죽을 곳에 혈육을 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태수 딸도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 밤 태수의 집에서는 딸이 없어졌다. 이튿날 아침 공사장에는 여자의 예쁜 신발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태수의 딸이 연못에 투신자살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애 쓰는 것을 볼 수 없어, 사랑하는 사람이 처벌 받을 것이 안타까워서 노심초사하다가 자신의 몸을 바친 것이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인 원덕랑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벽골제에 얽힌 전설을 작품화 한 때는 인터넷이 없었고 당연히 태수 딸의 이름도 없었다. 지자체에서는 벽골제를 상품화하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그 공사를 이루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태수의 딸에게 단야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누각까지 지어 주었으니 단야의 혼령이 있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비슷한 사건이 신라에서도 있었다. 27대 선덕여왕 때 서라벌에는 지귀라는 걸인 총각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왕의 행차를 보고 여왕이 너무나 아름다워 사랑하게 되었다. 지귀는 돌아다니면서 여왕을 사랑한다는 말을 미친듯이 하고 다녔다. 그 소문은 널리 퍼져 드디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왕은 그 소문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여왕은 아무 날 아무 시에 어느 사찰에 행차할 것이라는 방을 붙이게 했다. 지귀에게 알리고자 함이었다. 여왕 자신도 독신으로 살았으니 지귀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던가 보다. 지귀는 그 날짜에 맞추어 여왕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길목에 자리 잡고 하루 전부터 기다렸다. 그러나 밤을 꼬박 새웠기 때문에 막상 여왕이 행차하였을 때는 깜빡 잠이 들었다. 왕은 그 앞에서 행차를 멈추게 하고는 팔찌를 벗어서 그의 가슴에 얹게 했다.
   얼마 후 서라벌에는 극심한 가뭄이 들어 여왕이 기우제를 지냈다. 그래도 비가 내리지 않아 여러 날 기도하는 것을 보고 지귀도 여왕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랬더니 꿈에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여왕의 소원을 들어 주려면 네가 분신자살하여야 한다.’고 했다. 지귀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튿날 장작을 높이 쌓아 놓고 그 위에 올라 가 스스로 불을 붙여 타 죽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우주를 주어도 바꾸지 않을 하나밖에 없는 몸을 바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여왕의 마음은 어땠을까.
   벽골제 공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홀해왕기에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과 지귀에 관한 기록은 권문해가 저술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편에 있다. 권문해權文海(1534~1591)는 명종 때 관찰사, 사간司諫을 지낸 인물로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생이며 유성룡柳成龍과 친분이 있는 학자다. 대동운부군옥에는 사실史實, 인문, 지리, 동식물, 예술 분야 등을 총 망라한 20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명이다. 그가 어떤 근거에서 지귀의 분신자살 건을 실었는지 모르지만 허무맹랑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사랑 중에서도 육체적인 사랑은 쉽게 식을 수 있지만 정신적인 사랑은 어지간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이광수의 대표작 <사랑>도 정신적인 사랑을 강조했다. 이러한 사랑을 애틋한 사랑으로 보고 싶다. 서로 마음은 있으나 다가갈 수 없는 처지여서 속만 태우는……. 그렇기에 두 사건의 전설을 만들어 낸 사람도 같은 시대 인물은 아닐 터이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 아리게 하는 그런 사랑을 등장시켰던 것 같다. 그 의도는 성공한 것이다. 나같이 감성이 둔한 사람의 가슴에도 와 닿게 하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