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8년 1월호, 제195호 신인상 수상작] 자절작용自切作用 - 백란주
"섣불리 위로하기에는 남편의 생채기가 너무 깊은 것 같아서 차마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와 내게 자정작용이 필요해서 걸었던 무소유 길이었다. 무소유,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나는 응원한다. 그가 선택한 맑은 가난이 그럼에도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라고."
자절작용自切作用 - 백란주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이 가버린 듯한, 공허함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봄의 화려함과 속살거림보다 꽃잎이 떨어지는 처연悽然함이 더 마음에 닿는다.
토요일 아침, 둘만이 여행한다는 약간의 설렘과 복잡한 마음을 남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송광사에 들어서니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절은 분주했다. 절 주변의 꽃들도 앞다투어 바쁘게 피어 있었다. 그 어떤 사물들이 이렇게 어질러 있어도 좋을까. 그 어떤 생각들이 저렇게 무질서해도 좋았을까. 꽃잎만은 이렇게 어질러져도 저렇게 무질서해도 그 자체로 예쁘고 좋았다. 우리는 송광사의 작고 여린 잎들에게서 위로를 받고 불일암으로 향했다. 적당한 가파름이 있는 흙길이 좋았다. 중간중간 쉴 수 있도록 벤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법정스님께서는 여기 앉으셨을까, 그냥 가셨을까. 마치 법정스님의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덧칠하는 기분으로 걸었다.
멀리로 드러나는 숲은 이제 여름 뙤약볕을 이겨내기 위해 야물어지기로 한 것 같다. 가지마다 서로를 격려하며 돋아난 잎들이 부딪힐 그 소란스러울 여름날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모습처럼 수줍은 탐색전으로 느껴졌다. 산벚꽃이 시선을 머물게 했다. 솜사탕 뭉치들을 툭툭 던져 놓은 듯한 모습에 탄성만 나올 뿐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이 새겨진 곳에서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남편은 식물의 타감작용他感作用과 자절작용自切作用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다. 식물에서 일정한 화학물질이 생성되어 다른 식물의 생존을 막거나 성장을 저해하는 작용을 말하며 때로는 촉진하는 작용도 포함된다는 타감작용. 같은 종의 키 큰 나무로 이루어진 숲에서 나무가 모두 위로 곧게 자라는 것은 광선을 향한 이웃 나무와의 경쟁 때문이다. 이들은 광선을 많이 받기 위해 아래의 오래된 가지는 제거하고 윗가지만 남긴다. 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잘라버리는 것을 자절작용이라고 했다. 나무가 자라면 자랄수록 공간이 좁아지므로 그늘 속의 가지를 지탱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기보다는 위로 자라기 위한 경쟁에 집중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남편이 자연에 관해서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형님의 이야기라는 것을 왜 내가 모르겠는가. 가십거리처럼 여겼던, 부모님 재산을 두고 일어나는 형제들의 불미스러운 일이 자신의 일이 되고 있는 현실을 빗대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형이 선택한 것에 대해 이유 있는 선택이라고 하겠지만 그럼에도 주변에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다는 깊은 속내를 보인다. 무소유 길에서 비우려는 모습이 느껴진다.
우리는 한 발 한 발 내딛다가 대나무 숲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들의 아팠던 마음, 힘들었던 마음 소리들이 대숲에 숨어 있어서인지 그곳을 지날 때 나도 마음 한 자락 고해성사처럼 토하게 되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니 대숲 터널이 나를 심문하는 것 같다. 하늘도 보이지 않는다. 순간, 나의 미움이 자절작용을 시작한다. 불필요한 곁가지의 감정들을 자르고자 했다. 대숲 터널은 스님을 만나러 가는 마지막 감정의 여울목이었다. 휘몰아친 감정은 버려두고 마지막 발을 내딛는다. 별천지다. 눈앞의 세계는 무릉도원으로 다가온다. 채마밭은 갓 올라온 상추, 시금치가 감은 눈 살짝 뜬 것처럼 고개를 내밀고 있다.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나온다. 방문객들을 위해 놓아둔 사탕병 뚜껑을 야심차게 밀어서 열었다. 재빠르게 사탕 하나를 물고 다시 쪼르르 어디론가 달려갔다. 나의 시선 따위는 이미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의 대범함도 지녔다. 비닐 껍질을 어떻게 벗길까, 이것 또한 기우임을 인정한다. 어쩌면 그 녀석은 벌써 비닐봉지를 뜯고 오물오물 사탕맛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풍경 소리. 이곳저곳에 매달린 풍경들이 바람 소리의 지휘에 맞춰 화음을 들려준다. 풍경마다 다른 모양에서 다른 소리가 났다. 우리 각자의 인생이 다르듯, 인생 이야기가 다르듯 풍경도 다른 모습 다른 소리를 들려주었다. 우리의 모습과 소리는 가끔 마찰이 되기도 하고 툴툴거림이 되기도 하지만 풍경은 다른 듯 같은 어울림이 되었다.
아무 말 없이 남편과 그루터기 의자에 마주앉았다. 말이 없었지만 남편이 어떤 마음일 것 같고, 어떤 마음이길 바라는지 남편도 나도 서로 알기에 우리는 염화미소拈華微笑를 짓게 된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다시 현세로의 발을 디디면서 아무 말이 없다.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남편과 아주버님은 서로를 아꼈다. 그랬던 그가 형에 대한 서운함들이 모여 미움으로 향했다. 그는 형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형이 어긴 약속에 대한 배신감이 더 큰 듯했다.
섣불리 위로하기에는 남편의 생채기가 너무 깊은 것 같아서 차마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와 내게 자정작용이 필요해서 걸었던 무소유 길이었다. 무소유,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나는 응원한다. 그가 선택한 맑은 가난이 그럼에도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라고.
백란주 ---------------------------------------------
경남 거제 출생,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수향수필 사무국장, 책갈피모임 회원.
당선소감
언어에도 온도가 있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누군가가 건네는 한마디가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지듯 글 한 줄이 가슴에 남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고동주 교수님의 수필교실을 만났습니다. 소녀적 꿈을 다시 만나는 설렘으로 수업을 들었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해 자세히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한 편의 글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자세히 보며, 오래 보아야 한 편의 글이 완성되는 과정을 겪게 됨을 느끼며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내 속에 있는, 나도 몰랐던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며 글로 만났습니다. 내 체온을 공유할 수 있는 따뜻한 글을 쓰고 싶은 소망을 담아봅니다.
지도해 주신 교수님과 부족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