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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괴비평 2017년 9월호, 사색의 창] 부재 - 서이정

신아미디어 2017. 10. 13. 15:49

"나는 딸에게도 호칭을 몇은 못 주고 말았다. 언니, 오빠, 동생……. 외딸이다. 며느리는 내게 계속 없을 것이며 친손도 볼 일 없게 되었다. 내가 여느 사람보다 영특하지 못해서 삶이 말하는 소리라도 잘 들으라고 이렇게나 빈 공간을 주셨을까. 아니면 찬미를 자유하라고, 소속되지 말라고 일찍이 그물에서 나를 풀어 주었을까."





   부재  서이정

   밖에서의 하루치 일을 끝내고 집에 왔다. 저녁이 고여 있다. 마루 전등스위치를 켜고 부엌 스위치도 켠다. 아이는 저녁을 먹고 올 것이고 남편은 회식이란다. 느닷없이 집이라는 공간이 낙조 같은 공허로 팽창했다. 넓은 벽지에 실수된 쉼표처럼 나는 마루에 앉아 까맣게 작아지고 있었다.
   부른다는 건 이야기이자 갈무리다. 오빠도 아니고 여동생도 아닌 그냥 너와 나라면 그들은 한낱 사물일 뿐이다. 무엇이라 불릴 적마다 울림이 있어 내 살결이 그의 몸이 지닌 무늬로 이루어진다. 내가 누나여서, 연인이어서, 엄마여서 그에 걸맞은 사람으로 만들어져 간다.
   다른 이에겐 흔히 있는 것이 나에겐 주로 없었다. 내가 이편 세상 공기를 마시고 젖 뗄 무렵이나 되었을 때 내 할머니는 저편 세상으로 건너 가셨다. 그전에 이미 할아버지는 안 계셨다. 한 분 있었다는 삼촌도 아버지가 결혼하기 전에 딴 세상 사람이 되었다. 겨우 고모 세 분만 오빠라 의지하며 아버지 밑에서 간신덕신 살아 내셨다. 그 덕분에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고모가 있었을 뿐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이런 부름이 내겐 탄생되지 않았다. 물색없이 내가 성년이라는 숫자를 먹을 즈음이었다. 집안의 먼 당숙뻘 되는 분이 그랬다. “집안의 맥이라는 게 굵었다가 가늘었다가 하느니라.” 기둥이 될 만한 탄탄한 무엇도 없이 청상이 된 엄마랑 남동생만 셋인 나에게, 그런 말에라도 내가 의지 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의미가 무엇일지도 모를 그 말이 이제도 더러 생각난다.
   산촌 학교에서는 방학을 지내고 오면 말씨가 달라지는 애들이 있었다. 서울에 다녀왔다는 둥 형부 집에 다녀왔다는 둥 방학생활을 자랑하는 동무들 곁에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상상조차 잘되지 않던 ‘서울’이라는 말에 기만 탁 죽었다. 형부가 무엇도 사주고 무엇도 해주고 그런 말들이 나를 유성처럼 소외시켰다.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형부가 생기는지 온전하게 이해를 못했다. 고아 아닌 고립당한 아이. 나는 섬 정수리의 돌부리 위에 외로이 선 배롱나무 같았다.
   ‘우리’ 안에 들어오는 호칭은 몇일까. 어느 외국인은 마누라조차도 내 마누라가 아닌 ‘우리 마누라’라고 하는 한국인의 말을 들으면 놀라워 한다나. 난 나를 ‘우리’로 불러줄 관계망이 헐겁다. 친밀도에 따라서 ‘우리’는 수식어같이 되기도 하고 명사가 되기도 한다. 이름만 부르면 평범한 관계요, 이름 끝자만 부르면 예사 사이가 아닌 관계요, 이름에다 성을 붙여 부를 때는 무언가 마뜩잖게 느껴진다. 학교 다닐 적에 꼭 성을 붙여서 이름을 부르는 아이가 있었다. 마음을 썩 좋게 하지는 않았다.
   ‘큰어머니~.’
   이 말에 담기는 온도는 위로의 배경을 누인다. 차마 말 못하는 가슴앓이를 저녁에 카스텔라라도 전하면서 상담할 수 있는 푸근한 이름이다. 아빠에게 사달라고 하기엔 왠지 머쓱해서 봐둔 지갑을 예찬하는 어리광이 통하는 삼촌이 있다면 마음 한편이 뿌듯하겠다. 내 진로를 진정으로 같이 고민해주는 그런 삼촌은 마냥 따르고 싶을 게다. 대하기가 부담스럽지 않아 같은 동기간처럼, 농을 하고도 돌아서서 뒤통수가 가렵지 않을 형부라면 내 편이 한 사람 있는 기분이겠다. 잘 지내는 시누 올케처럼 눈물겨운 사이도 없다. 내게 손위 올케가 있었다면 나는…….
   주변에 언니나 오빠라 부를 만한 이웃들은 늘비했다. 시골 촌뜨기에 숫기조차 없는 나는 서분없이 그들을 언니라 오빠라 부르는 애살도 애저녁에 글러먹었다. 그런 살가움이나마 지녔다면 청년의 때를 허허롭지 않게 살아왔을까. 어려서 자연 형성되지 않은 말을 커서 갖는 것에는 낯섦을 허물어 주는 용기가 무진장 필요하다.
   부를 호칭이 많다는 건 삶의 두께가 두텁다는 뜻이다. 내가 상대방을 누구로 호칭할 때 그는 나와 어떤 간격 안에서 살아지는 연결체가 된다. 무연할 수 없는, 시시로 어느 대목에서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건덕지가 되는 것이다. 연결망은 사람을 떠올릴 계제도 넓어서 그는 따분할 틈조차 촘촘할 것이다.
   부를 호칭이 적은 사람은 그 없음이 그를 내버려 둔다. 그 자리가 한편 자유로워서 그는 그 자리에다가 고독을 앉힌다. 부재하는 이름들이 내게는 쓸쓸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주었다.
   ‘부~자되세요.’
   때때로 이런 덕담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금니에 씹히는 샐러리를 입맛 다시며 그 맛만큼 싱겁게 웃는다. 재물만 있다고 다 부자가 되는 건 아니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 한다는 옛날은 가고 이젠 재물 가난쯤은 나랏님이 구제한다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현대화 된 복지 국가도 구제 못하는 가난이 있다.
   나는 딸에게도 호칭을 몇은 못 주고 말았다. 언니, 오빠, 동생……. 외딸이다. 며느리는 내게 계속 없을 것이며 친손도 볼 일 없게 되었다. 내가 여느 사람보다 영특하지 못해서 삶이 말하는 소리라도 잘 들으라고 이렇게나 빈 공간을 주셨을까. 아니면 찬미를 자유하라고, 소속되지 말라고 일찍이 그물에서 나를 풀어 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