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7년 9월호, 세상마주보기] 폭염과 함께하는 시간 - 권신자
"생판 겪어보지 못하던 뜨거운 시련(폭염)이 흡사 나 자신인 것처럼, 한 시도 편치 않게 숨을 헉헉 몰아쉬며 완고한 내 고집(고정관념)을 내리누른다. 반대! 정반대로 뒤바꿔 생각하라고 외쳐댄다. 너무 뜨거워 숨쉬기도 힘겨운 여름이다.."
폭염과 함께하는 시간 - 권신자
달포 남짓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위 텃밭이 변해 있다. 백내장 수술과 시작해 놓은 임플란트를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에 가야 했다. 쫑긋쫑긋 올라오는 부추밭의 풀을 매주고 경계를 넘보지 말라고 밭두둑을 쳐놓았다. 아무리 염치없는 잡초라도 내 마음을 알아차릴 것이라 여겼던가. 고구마를 놓느라고 뿌린 퇴비거름에서 오히려 보지 못하던 잡초가 나서 키가 일 미터쯤이나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다. 다 자랐을 거라고 짐작했던 고구마 순은 질금거리는 비와 잡초 등쌀에 녹아버리고 없다.
새끼 때 뒷집에서 얻어온 진돗개를 텃밭 한편에 키웠었다. 잔뜩 먹고 똥만 싸다가 철조망을 빠져나가 남의 밭을 짓뭉개놓기도 했다. 보다 못한 남편은 시동생에게 줘버린 후 개집과 철망울타리를 버려둘 수 없는지 토종닭 병아리 열 마리를 사다 놓았다. 우리가 없는 사이에 며느리가 때마다 꼬박꼬박 모이를 주어 짙은 갈색을 띤 중닭으로 자라 있었다.
쭈룩쭈룩 비가 내리던 장마 끝 무렵부터 이처럼 온도가 올라가다가는 온도계가 터지지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폭염이 들이닥쳤다. 지구온도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체온을 넘나드는 폭염 속에 무엇인들 견뎌낼 수 있겠는가. 처음 한 마리가 죽었을 땐, 채 구실도 못 하고 죽은 목숨이 안타깝긴 해도 그 작은 몸뚱이가 뭐 먹을 게 있다고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가며 뜨거운 물로 튀겨 잔털을 말끔히 뽑았다. 간을 제외한 내장은 버리니 주먹만 했다. 그래도 사다 먹는, 지방이 더덕더덕 낀 양계장 것보다 한결 나은 담백한 먹을거리였다. 닭발도 껍질을 홀랑 벗겨 손질하여 넣고 찹쌀로 마늘백숙을 끓이니 우리 내외의 한 끼 식사가 되었다. 젊은 자식들은 먹으려 하지 않았다.
“또 한 마리 죽었어. 세 마리째다.”
남편의 카랑카랑하던 목소리가 풀이 죽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닭들이 쭈그린 채 모이를 먹지 않았다. 애가 닳은 남편은 동물병원에 전화를 걸고 약을 사오는 등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 마리가 뻗어버린 것이다. 그 닭을 손질하는 나는 뜬금없이, 집에서 키우는 짐승이 죽는 것은 집 식구의 목숨을 대신하는 거라던 옛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렇지만, ‘또 먹어? 이 여름날 보신을 하라는 거겠지.’ 하고는 마트에서 닭 세 마리를 더 사다가 지방덩어리를 낱낱이 제거하고 인삼과 약재들을 넣어서, 따로 사는 자식들을 불러서 함께 먹었다.
염천에 장례식장을 세 군데나 다녀왔다. 친정에 한 분밖에 남지 않으신 여든여덟 살이신 작은아버지와 교육에 몸을 바친 여든네 살의 남편 선배와 교회의 교우도 한 분이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폭염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가 이분들뿐이겠는가. 종종 자식들을 불러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번 여름엔 살아남기만 하면 감사한 일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뭇 들끓던 내 속의 이런저런 욕심들이 녹아버린 듯하다. 유난스러운 열기 앞에 만사가 맥을 추지 못한다. 분수에 넘는 여행 계획은 꿈도 꾸지 못하고, 그저 습한 더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신경질이나 다스리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즐거움도 다행이라 여겨졌다. 크고 작은 인생이 없지 싶다. 넉넉하거나 부족하게 사는 것도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살든지 한 번 살다가 갈 때가 되면, 가는 것이라는 삶의 원리가 이토록 잘 수긍이 되니 말이다. 길지도 않은 생을 못 살아서 얼마나 아등바등했던가. 사물에 대한 관점을 바꾸지 못하고 현실을 보는 내 중심의 생각 때문이 아니겠는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즉각 반응하고 만다. 그러기에 그 보이지 않는 이면에 얼마나 깊고 오묘한 뜻이나 원인이 있는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 많다.
미운 사람이 있어 괴로웠다. 나 자신을 몰라서인지도 모른다. 인간관계는 상대적이니 말이다. 상대에겐 내 단점이 잘 보이고 싫어져서, 말은 못 해도 거부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게다. 남의 이기적 본성을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도 그런 상황이 되면 그럴지도 모를 테니까 말이다. 나 때문에 남이 불편하다면 모른 척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설사, 남을 깎아내리는 습성이라고 할지라도 나로 인한 것이라면 미안한 일이다. 혹시 그 일로 속도 상하지 않고 무심하다면 더더욱 미안한 일이다. 내가 눈치채면 그때그때 사과해야겠다. 상대에게 괴로움을 끼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알아주지 않더라도 해야 할 일이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이해하려는 태도는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능력 없이 보인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여겨도 되겠는가. 스스로는 나름 잘났다고, 그 자긍심으로 힘든 세상을 이기며 살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무능하다고 평가할 잣대는 무엇이며, 그럴 권리는 내게 없지 않은가. 교만한 마음이 단순하게 보는 주관적인 눈이 아닌가 말이다.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살게 마련이어서, 다른 방도가 필요 없이 보람을 느낀다면 어찌할 텐가. 내가 궁금해 하는 남편의 침묵, 참고 견디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다 표출한다고 잘난 사람이 아니듯, 드러나길 꺼린다고 못나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뒷일을 생각하는 지혜로운 일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온갖 생각이 떠올라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끼는 것을 단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판정할 수가 없어졌다. 뭐가 뭔지 뒤죽박죽이고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생판 겪어보지 못하던 뜨거운 시련(폭염)이 흡사 나 자신인 것처럼, 한 시도 편치 않게 숨을 헉헉 몰아쉬며 완고한 내 고집(고정관념)을 내리누른다. 반대! 정반대로 뒤바꿔 생각하라고 외쳐댄다. 너무 뜨거워 숨쉬기도 힘겨운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