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9월호, 제167회 신인상 수상작] 사진 속의 아버지 - 신장식

신아미디어 2015. 9. 16. 17:57

"아들이 어느새 군무를 마치고 대학 복학 준비를 하고 있다. 아들도 아버지인 내가 모르는 방황을 하고 있진 않을까. 후회하며 단단해지는 삶. 방황에의 유혹과 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는 갈등하는 고민을 아들이 혹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앨범 속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몇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다. 빛바랜 그림처럼 흐릿하지만 편안하게 군복을 입은 채 담배를 물고 있다. 사진을 만지는 손끝으로 그리움이 온몸을 타고 돈다. 사진을 다시 쓰다듬는다. 따뜻한 느낌에 쉬이 손을 떼지 못한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기 바란다. 사진 속의 아버지가 타이르시는 것 같다."

 

 

 

 

 

 


 사진 속의 아버지        -  신장식


   아버지 기일을 앞두고 군부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돌아가신 지 40년이 넘은 아버지에 관한 내용이다. 아버지는 6·25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이번에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었으니 그 증서를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보훈처에 문의전화를 했다. 육군본부에서는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6·25 참전 중에 공을 세웠지만 전쟁 중이라 훈장을 받지 못하고 쪽지증서를 받아 보관하다가 전쟁이 끝났어도 훈장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버지께서 근무했던 부대는 서울에 있던 수도 사단이고,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으니 훈장이 뭐 대단한 거라고 농사일까지 제쳐두고 서울까지 훈장 찾으러 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할 수 있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웠을 때 수여되는 무공훈장은 5개 등급으로 구분되는데 화랑무공훈장은 4등급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용감하게 싸워 보통 이상의 우수한 전과를 올린 그 공적이 뚜렷한 유공자’ 에게 수여한다고 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당신이 국가유공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설날 아침에 훈장을 차례 상에 올려놓고 가족들은 다 같이 세배를 올렸다. 훈장을 가슴에 단 아버지를 떠올렸다. 내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고 뭉클한 생각에 울컥했다.
   집으로 배달된 훈장증을 가지고 보훈처에 유공자유족 신청을 하면서 아버지의 군 생활에 대해서 몇 가지 전해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6남3녀 중에서 두 번째로 차남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장남인 백부님은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며 군에 가지 않으려고 집을 나가셨고 아버지는 지원입대를 하셨다.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은 아버지는 대구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부대복귀를 하지 않은 채 육군병원에서 취사병으로 근무를 하다가 제대했다고 한다. 다른 병사들은 3년 만기제대를 하는데 아버지는 계급 상병, 의가사제대라고 병적증명서에 기록되어 있었고 근무기간도 2년6개월이었다. 당시 전쟁 중에 생긴 병역법으로 한 집안에서 세 명의 남자가 군 입대를 하게 되면 한 사람을 면역시켜주는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 동생이 입대를 하게 되어 조기 전역이 가능했다. 전쟁 중에도 가정의 대가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유교적인 사고가 고려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화첩의 그림을 넘기듯 불연속적으로 한 장면씩 떠오른다. 봄날 출근하시는 아버지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동네 앞 개울가를 건넜던 기억, 추운 겨울날 얼어붙은 논두렁 가에서 앉은뱅이 썰매를 만들어 주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큰소리를 치는 일이 없는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이셨다. 가족 형제간에도 우애 있게 지냈다고 막내고모에게서 자주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군 생활에서도 당신의 몫을 잘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철이 들기도 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우리 가족의 큰 멍에로 남았다. 어머니는 3남매를 키우느라 평생 일만 하셨다. 나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했다. 어머니는 굳은 일을 마다않고 여장부처럼 일을 하셨지만 가난을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었다. 겨우 밥을 굶지 않고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커다란 덕이었다.
   어머니는 국가로부터 유공자 유족 증서를 받았다. 여생을 보내면서 병원 할인 등 몇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아버지와 같이 현충원에 묻힐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학교 가기가 부끄러웠다. 남들처럼 좋은 옷을 입기는커녕 찢어진 옷을 기워 입고 다니는 게 창피했다.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같이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용돈은 늘 부족했다. 친구들이 공부하는 시간에 영화관에서 시간을 때웠다. 미래 같은 건 생각에도 없었다. 친구들도 내 곁에서 하나 둘 떠나갔다. 그러나 방황에도 끝은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 내가 부랑아처럼 헤매고 다녔나 할 정도로 생활이 확 바뀌었다. 다행인 것은 떠돌이처럼 방황하면서도 기술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때였지 싶다. 방황하면서도 주위에 불량친구들과 휩쓸리지 않았다. 다만 혼자 방황하다가 혼자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아버지의 DNA가 내 몸 한구석에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곤 했다.
   아들이 어느새 군무를 마치고 대학 복학 준비를 하고 있다. 아들도 아버지인 내가 모르는 방황을 하고 있진 않을까. 후회하며 단단해지는 삶. 방황에의 유혹과 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는 갈등하는 고민을 아들이 혹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앨범 속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몇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다. 빛바랜 그림처럼 흐릿하지만 편안하게 군복을 입은 채 담배를 물고 있다. 사진을 만지는 손끝으로 그리움이 온몸을 타고 돈다. 사진을 다시 쓰다듬는다. 따뜻한 느낌에 쉬이 손을 떼지 못한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기 바란다.
   사진 속의 아버지가 타이르시는 것 같다.

 

 

 


신장식  ------------------------------------------------
   경북 칠곡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부산교통공사 근무.

 

 

 

당선소감


   초등학교 국어시간에 소풍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소풍 가는 느낌에 들떴습니다. 선생님께서 내가 쓴 글을 학생들 앞에서 직접 읽게 했습니다.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처럼 부끄럽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멀리 보고 꾸준히 쓰겠습니다. 그것만이 수필을 위한 길이라는 생각을 하는 날입니다. 만각의 글쓰기에서 무뜩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날 새는 줄 모르는 열정으로 수필의 길에 매진하겠습니다. 늘 가까이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는 창작반 회원들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