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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좋은수필 2015년 6월호, 다시 읽는 좋은 수필] 화초를가꾸며 - 변해명

신아미디어 2015. 7. 28. 14:37

"우리 집 화단의 상사화는 언제쯤 피어나 잎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을까? 꽃이 피어나면 잎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하리라. 맑고 품격 있는 정신을 지니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노라고. 화초를 가꾸며 꽃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 세상을 본다."

 

 

 

 

 

 

 화초를가꾸며        /  변해명

 

   우리 집 정원에는 많은 꽃이 피고 진다. 봄부터 가을까지 나무에서 화초에 이르기까지 제철에 얼굴을 내밀고 스러진다.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개나리, 진달래는 추위 속에서 피고, 아무리 날씨가 더워져도 능소화는 장마 속에서 피어난다. 벚꽃은 활짝 눈부시게 피었다 사르르 바람에 날리며 웃음처럼 쏟아져 내리고, 목련은 이른 봄 세상을 온통 눈부시게 밝히다가 일주일을 못 견디고 술 취한 사람처럼 추한 모습으로 쓰러지듯 떨어져 뒹군다. 피고 지는 모습이 그리도 달라 첫 모습에 반하던 것이 지는 모습에서는 실망을 지니게도 한다.
   6월은 설화가 눈덩이처럼 나무를 감싸며 피어나는 시기다. 흰동백, 배롱나무가 개화를 시작하고, 참나리며 백합, 등꽃, 도라지, 으아리, 이태리봉선화, 활련, 수국제라늄 등이 화단을 가득 메우고 있다. ‘종아리’도 보랏빛 꽃망울을 긴 대공 위에 아기자기 매달았다. 달빛 아래서 바라보는 그 꽃은 환상적이다. 어느 숲 속 요정이 그리 숨 막히게 아름다울까. 6월 말 가까워 달이 둥글면(음력 보름쯤) 나는 밤에 뜰로 내려서서 그 꽃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보랏빛 작은 꽃떨기를 달빛 속에서 바라보면 햇빛 속에 꽃보다 더 아름답다. 뿌리와 줄기와 잎들이 온갖 정성을 기울여 마지막으로 꽃을 피워 올린다. 꽃이 지고 난 뒤에도 그 꽃이 씨방으로 바뀌고 열매가 달리고 씨앗을 잉태하기까지 나무나 화초들은 전력을 다한다.
   그런데 흔적도 없이 지워진 자리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꽃대만을 올려 꽃을 피우는 ‘상사화’를 보는 때가 있다. 잎도 없는 빈 터전에서 느닷없이 꽃대만 올라와 비로소 그 자리에 봄에 잎이 자라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러나 그 잎이 상사화의 잎인가를 의심하게 하는 그런 꽃의 개화다.
   봄에 난처럼 잎으로 돋아 자라다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린 자리에 상사화가 핀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뿌리에서 꽃눈이 채 돋을 준비도 하기 전에 기다리다 지쳐 자취를 감추어버린 잎들. 그 자리에서 상사화 꽃대가 오를 거라는 기다림, 하지만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장마가 걷히고 가을로 들어서는 건들바람이 불면 언젠지도 모르게 불쑥 솟아 가냘프고 애절한 꽃을 피울 것이다. 아직 자취를 드러내어 보이지 않기에 생각 속에 꽃으로 기다려보는 것이다.
   잎이 달려 있을 때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꽃이 필 때는 이미 잎은 없어 한 뿌리이면서 꽃과 잎이 서로 만날 수 없는 상사화.
   온통 태양을 삼켜버리고 가슴에 담아 간직한 사랑을 토해내듯 뜨겁게 피어나는 꽃무릇도 상사화처럼 잎이 지고 나면 꽃대가 올라와 상사화라 일컬어지기도 하지만, 상사화는 그런 열정도 토해내지 못하고 초라하리 만큼 어질고 순박한 홍자색의 나리꽃을 닮은 꽃 덮이조각(花被片) 여섯 잎을 피워 올리는 모습이 비구니처럼 그저 조용하고 순박하기만 하다.
   무슨 연유에서일까? 이른 봄 연녹색의 잎이 꽃을 그리며 하늘을 우러르지만 끝내 빈 가슴으로 6월 햇살에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것은. 꽃은 서둘러 8월에 꽃대를 세우지만 이미 흔적도 없이 지워진 잎과 해후하지 못하는 사연은. 꽃 조차도 외롭게 잎을 그리워하게 되는 엇갈린 운명 앞에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못 이룰 사랑같이 신비하기까지 하니 상사화를 기다려보는 화단은 설렘이 따른다.
   상사화를 보면, 어린 날 절간에 피어난 상사화를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스님에게 꾸중을 들었노라고 하던 한 어른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건 필경 삶이 죽음 못 보고, 죽음이 삶을 못 보는 우리들 누구나의 몫.’
   무심코 상사화가 핀 불전 앞에서 이 말을 했다가 노장 스님에게서 ‘건방지기는!’ 하며 노여움을 샀다는 어린 날의 기억을 본다고 했다.
   행복한 삶을 사는 동안 행복한 것을 모르다가 행복을 잃고 나서야 그때가  행복했었노라고 지난 시간을 추억하는 우리 삶의 모순 같은 서로가 공유할 수 없는 안타까움.
   상사화를 생각하며 꽃 속을 거닌다. 세상 어디인들 사람의 꽃밭이 아니랴. 벚꽃처럼 빈 마음으로 훌훌 털어버리고 깨끗하게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추한 모습으로 죽는 날까지 욕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입양된 아기가 성인이 되어 돌아왔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는 이미 세상사람이 아닌 이야기를 듣던 날, 나는 가슴이 아려오는 아픔을 느꼈다. 평생을 못 잊어 그리워하면서도 끝내 만나지 못한 부모와 자식의 이루지 못한 상봉, 그 얼마나 애절하고 사무친 그리움인가. 한 핏줄이면서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움만 키우며 살다 간, 그리고 살아갈 한 서린 사랑의 그리움이 아닌가.
   우리 집 화단의 상사화는 언제쯤 피어나 잎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을까? 꽃이 피어나면 잎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하리라. 맑고 품격 있는 정신을 지니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노라고.
   화초를 가꾸며 꽃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 세상을 본다.

 

 

변해명   ---------------------------------------------
   변해명(1939~2012)님은 수필가,《한국문학》으로 등단. 수필집《그리운 곳의 빈자리》, 《다가오는 목소리》, 《그림자춤》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