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좋은수필 2015년 5월호, 신작수필 16인선] 아모르 파티 - 박태선
"“다시 한 번 생을 반복하고 싶으냐?” 그는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때로 파도에 휩쓸려 고난을 맛보기도 했지만 헤엄을 치며 따사로운 햇살과 피부에 와 닿는 물결의 감미로운 추억에 사로잡혀 말했다. “좋습니다. 백 번이라도 다시 살지요.” 그러나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삶은 이생 한 번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아모르 파티 / 박태선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F. 니체
우리는 미라지MIRAGE라는 바의 스탠드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옆자리의 손님에게 물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는 괴로운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뭔지 모르겠어요. 아~아니, 사랑은 없어요.”
나는 더 이상 그를 고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처음엔 사랑했어요. 그래서 결혼도 하게 되었고…. 그런데 아내는 뭐가 불만인지 밖으로만 돌려 하는 것 같아요. 애까지 하나 낳고서도요. 이젠 내 맘과 같지 않은 거예요. 정말 교회라도 나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뜻밖에도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는 그의 아내였다. 모딜리아니 풍의 기름한 얼굴을 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닥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남편은 마치 무대 위에서 방백을 하듯 중얼거렸고, 아내는 타인처럼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칵테일 잔을 손가락 끝으로 단조롭게 두드리고 있던 끝자리의 손님에게 물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는 동작을 멈추고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사랑은 일상 아닌가요? 총각 땐 신비로운 포장도 하고 귀여운 리본으로 매듭도 지어놓고 마음을 설레기도 했는데, 사실 벗겨놓고 보니 내용물은 허드렛감이거든요.”
그때 스탠드 앞에 손님들을 마주하고 있던 중년의 바텐더가 끼어들었다.
“사실 저도 결혼하고 나니 우선은 다른 여성들을 봐도 연애감정이 안 생기더라구요. 아내에 대한 신비감이 줄어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지만 전 아직도 매일 한 번씩은 아내를 안아줍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죠. 전 사랑은, 거 뭐랄까?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라는 괴물 같단 생각이 드네요. 백 개의 눈을 항상 뜨고 있을 수는 없지요. 때로 열 개의 눈이 감기면 아흔 개의 눈을 뜨고, 필시 아흔아홉 개의 눈이 감기더라도 마지막 하나의 눈만은 꼭 뜨고 있어야겠죠. 그리고 언젠가 백 개의 눈이 모두 감기는 날은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인 거죠.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고 말하고 싶진 않군요. 사랑은 침묵으로 돌아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스며든 것이지요. 아! 제가 갑자기 시인이라도 된 기분이네요. 허허.”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바 안의 한켠 테이블에서는 마침 요란한 박수 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터졌다. 누군가의 생일파티라도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늘 그렇듯이 또 다른 화제로 넘어가고 있었다. 실내엔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고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 가 흐르고 있었다. 탁배기 한 사발을 들이킨 것 같은 그의 둔탁하고 걸찍한 목소리는 삶의 기쁨에 대해 노래하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 ‘오 에~’하는 부분은 인생의 술잔을 다 비운 자의 그윽한 만족감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나는 담배를 물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는데 벽면에 쓰인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맥주를 먹으니 오줌이 잘 나오네.’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는 자동차의 빨간 미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영원의 오솔길처럼 왼쪽으로 굽어 있었다.
나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소주를 한 병 먹었을 때의 모습이 제일 사랑스러웠다. 허수아비처럼 두 팔을 벌리고,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하곤 했다. 그러다가는 걸음을 딱 멈추고 나와 눈길을 마주치고는 말했다. “형, 품 좀 빌려줄래?” 나는 그를 안고 생각했었다. ‘내 품은 원래 네 거였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기쁨은 마음의 고통보다도 더 깊다… 모든 기쁨은 영원하려고 한다… 깊고 깊은 영원을 원한다!
죽음의 순간에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다시 한 번 생을 반복하고 싶으냐?”
한 사람이 마구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전 싫습니다.”
그는 삶이라는 바다에서 끊임없이 허우적대는 익사의 경험만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는 말했다.
“그대는 다시 삶을 반복한다.”
그는 존재의 수레바퀴 속으로 영원히 내처지고 말았던 것이다.
다시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나머지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다시 한 번 생을 반복하고 싶으냐?”
그는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때로 파도에 휩쓸려 고난을 맛보기도 했지만 헤엄을 치며 따사로운 햇살과 피부에 와 닿는 물결의 감미로운 추억에 사로잡혀 말했다.
“좋습니다. 백 번이라도 다시 살지요.”
그러나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삶은 이생 한 번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박태선 ---------------------------------------------
박태선님은 수필가,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