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5월호, 세상마주보기] 망대가 있는 골목 - 박종숙
"나는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아쉽게 돌아섰지만 금방이라도 내리막 골목길에 선 나를 누군가가 힘없이 바라보는 것 같아 자꾸 뒤가 켕겼다. 그곳 풍경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찾아와 옛 흔적을 도화지 위에 스케치하리라 마음먹으니 그제야 망대가 연민의 눈빛을 보내며 손을 흔들어 주는 듯했다."
망대가 있는 골목 - 박종숙
우후죽순처럼 날림으로 들어섰던 달동네가 도로정비를 하면서 신시가지가 되더니 케케묵었던 낡은 집들이 하나둘 새 옷을 입는다. 그러나 말끔하게 바뀐 대로변과는 달리 아직도 높은 언덕에는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사라져가는 풍물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약사동은 재래시장이 남춘천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개발 보상에 따른 이권을 놓고 말 많고 탈 많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시에서 용감하게 이를 해결하고 명동으로 나가는 중간 허리를 잘라 도로정비를 하면서 새 길을 내고 나니 막혔던 체증이 확 뚫린 기분이다.
하늘이 투명하게 맑던 날 문화예술회관에서 건너 마을을 바라보다가 문득 산책을 나섰다. 약사천 주변에는 공원을 만드는지 잘 큰 나무들을 이식하는 사람들 손길이 바쁘고 건너 언덕에서는 고개를 틀고 선 망대가 주택가에 우뚝 서 있다. 외로움을 묵묵히 견디고 있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언젠가는 한번 찾아가 보리라 별러오다가 그날은 소연 선생과 암묵적 교감을 이루고 함께 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내 고장이라고는 해도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거리를 보면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그렇다고 한가하게 옛 동네를 둘러본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낯선 골목이 좀 생뚱맞았다. 그런데 앞서가던 소연 선생이 “우리가 이 집에 살았어요.” 하고 불쑥 잡초 우거진 공지를 가리켰다.
그녀는 감회 어린 듯 잡풀 우거진 빈 땅을 한참 바라보더니 코흘리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듯했다. 딱지치기, 구슬놀이, 고무줄놀이 하며 동네 어린이들과 놀던 추억만큼 아련한 것이 또 있을까? 우리는 이내 사람이 겨우 지나 다닐 만한 좁은 골목길을 올라 둔덕에 있는 보문사를 들르기로 했다. 그런데 좁은 계단 위 대문은 굳게 잠겨있고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여 도둑괭이처럼 돌아서게 되었다. 올라갈 때와는 달리 경사진 계단 아래 풍경은 눈앞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붕괴될 듯 낡은 기와와 벽들이 가시덤불 속에 엉켜있고 사람이 얼씬 대지 않아 엉클어진 밭도 있었다. 수십 층 아파트가 하늘을 찌르듯 들어선 도시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망대로 오르는 길을 몰라 여기저기 헤매다보니 막다른 곳에 짐도 나를 수 없을 만큼 비좁은 통로가 비밀스레 나 있었다. 지반이 물러앉아 걸어 다니기도 불안한 곳을 조심조심 디디며 담과 담 사이 길을 걷자니 그 동네가 마치 늙고 병들어서 버려진 사람들만 살고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힘없는 자의 목소리는 언제나 대중 속에 묻혀버리게 마련이다. 그 마을 사람들 역시 세월의 뒤안길에서 관심밖에 있었던 소외된 사람들이지 않았을까.
막다른 골목에서는 낯선 대문이 사이좋게 마주하고, 높은 담 밑에는 납작 엎드린 녹슨 철문이 늘어진 전깃줄 아래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사람이 떠난 빈 집들도 있는데 비록 가난했지만 50년 전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의 가슴 뭉클한 풍경들이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 시절에는 담 너머로 동네 아낙 흉도 보고 떡도 돌리면서 가슴 따뜻한 인정을 나누지 않았던가. 다행히 폐허가 된 동네 같아도 더러 사람의 향기가 나는 집 마당에서는 주인이 가꾼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쪼르르 놓인 화분에서는 화초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양지쪽 햇빛을 받은 기와집 앞으로 들어섰다가 길이 막혀 몇 번을 돌다 지쳐 중간쯤에 있는 기대마트로 내려갔다.
평상에 앉아있던 주인은 친절히 망대로 오르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외롭게 춘천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망대는 일제 강점기 때 화재 감시 기능을 하였던 것인데 지금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불이 나고 재난이 일면 어김없이 사이렌을 울리며 비상사태를 알려 주던 시설이 요즘은 민방위 훈련을 알리는 소리로 바뀌어 뒷방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다. 망대는 길 마루턱 성당과 같은 수직 높이에 있건만 부와 명예를 바라는 사람들의 출입이 잦은 성당과 달리 쓸쓸한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그렇게 관심 밖으로 밀려난 망대는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운명이어서 개발계획에 묶여 쓸쓸히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세월은 많은 것을 변모시키지만 우리들 기억 속에 자리했던 소중한 추억마저 변모시키지는 못한다. 오래된 것에도 미움과 사랑이 싹트던 시절이 있고 서로가 울고 웃던 애환이 남아 있지 않는가. 도시 속의 달동네도 삶의 궤적을 쌓아 이룬 것인데 왜 사람들은 지나간 흔적을 깡그리 없애버리려는지 모르겠다. 1950년대쯤 전쟁의 포화가 끝난 뒤 박수근 화백도 이곳에서 막노동을 하며 살았고 조각가 권진규 씨도 한때 이곳에 살았다는데 가까운 시대의 발자취마저 흔적 없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는 것이다.
나는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아쉽게 돌아섰지만 금방이라도 내리막 골목길에 선 나를 누군가가 힘없이 바라보는 것 같아 자꾸 뒤가 켕겼다. 그곳 풍경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찾아와 옛 흔적을 도화지 위에 스케치하리라 마음먹으니 그제야 망대가 연민의 눈빛을 보내며 손을 흔들어 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