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간 여행작가 2015년 3·4월호, 신작기행문] 가슴에 ‘불꽃’ 하나 심어준 나라: 멕시코 - 글·사진 류미월
"태평양을 가르며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두 손을 모은다. 마야, 아스테카 문명의 발생지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멕시코의 땅을 밟고, 칸쿤 해변에서 영혼의 쉼터를 만난 것은 축복이다. 게다가 예술의 양대 산맥 같은 두 거장과의 만남은 마그마를 만난 것처럼 내 삶의 활화산에 부디! 기폭제가 되길 소망해본다. 어느새 나의 손길은 시상詩想에 잠겨 메모장을 꺼내놓고 펜에 힘이 가해진다."
가슴에 ‘불꽃’ 하나 심어준 나라 - 멕시코 / 글·사진 류미월
시를 쓰다가 막막해질 때 경전처럼 꺼내 읽다 보면 詩에게 공손한 마음을 갖게 하는 책이 있다. 바로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다. 삶에 지쳐 막다른 골목에 숨고 싶을 때 그녀의 자화상을 쳐다보면 삶의 용기 한 줄을 더해주는 화가 ‘프리다 칼로’다. 이 두 사람은 멕시코인이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두 예술가가 태어난 멕시코의 하늘을 나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지난겨울 퇴직 후, 나를 위한 보상 차원의 이벤트 중 제일 잘한 일이다. 16시간여 먼 하늘길은 캐나다 밴쿠버를 경유해 기내식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책을 보고 또 봐도 하늘이다. 긴 시간 끝에 멕시코 공항 착륙 직전 상공에 펼쳐지는 야경이 절창이다. 보석 한 줌을 뿌려놓은 듯 도심의 반짝이는 불빛은 검은 모래를 털고 갓 세수한 얼굴처럼 뽀송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고도를 낮추며 원경이 근경으로 바뀌는 진풍경은 잘 그린 유화 한 폭이다. 처음 땅을 밟은 멕시코는 고도가 높은 나라여서 고산증을 내심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다음날 여행길에 올랐다.
멕시코 시내 소깔로 광장 주변에는 미술의 향기가 유독 진하다.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노천에서 처음 만난 현지인이 오랜 친구처럼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든다. 멕시코 국립박물관을 둘러보고 벽화가 유명한 디에고리베라 벽화박물관을 찾았다. 꿈틀거리는 색상과 판타지 같은 큰 벽화에서 미술가들의 거친 호흡이 느껴진다. 학창시절 스케치북 한 장을 채우려 해도 벅차기만 했던 미술 시간을 떠올리면 엄청난 크기의 벽화다.
우선 낯선 그림들의 표정과 규모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내 나라 미술관에서 관람하던 규모의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이다. 관람을 마치고 긴 대륙을 달렸다. 스페인 식민지의 잔재인 듯 보이는 유럽식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는 곳마다 예상보다는 치안이 잘돼 있어 큰 불안감은 없었다. 으리으리한 건물과 대조적으로 개미굴 같은 집들이 차창을 스치며 빈부의 격차가 큼을 시사한다. 긴 시간을 달려 멕시코 중앙공원 테오티우아칸에 도착하여 태양과 달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났다. 잰걸음에 올라 정상에 서니 탁 트인 전경과 위용에 사뭇 작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이를 중심으로 도시가 뻗어 나가며 건설되었다니 우리의 경복궁만큼이나 풍수지리상 요지였나 보다. 오래된 역사의 흔적 위에 내 발자국도 더한다. 많고 많은 계단을 오르내려 종아리가 풀릴 즈음 현지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에 도착했다. 이 나라의 전통 음식과 다육식물인 용설란 수액을 채취해서 만든 테킬라 한 모금에 고단한 발이 이완되는 시간. 커피 한잔과 함께 먹는 나초의 맛은 특유의 소스 향이 톡 쏘며 피로 한 줌을 덜어낸다. 한쪽에서 경쾌한 라틴음악이 들린다. 익숙한 멜로디에 내 몸이 저절로 들썩인다. 흥이 오르자 음식 맛이 더 달게 느껴진다. 내 키보다 큰 선인장 앞에서 카우보이 복장에 장총을 들고 나도 잠시 멕시칸이 되어 기념사진도 찍었다.
다음 발걸음은 이번 여행의 백미, 칸쿤 해변으로 향했다. 해변을 걸었다. 야자수 아래 길게 펼쳐진 모래사장, 파도소리에 쿨의 ‘해변의 연인’이 들려오는 듯하다. 선베드에서 ‘모히토차’를 마시며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눈빛을 던지는 여행자…. 저게 바로 무릉도원이지 싶다.
아름다운 비경 앞에 각국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풍경이었다.
고운 모래사장과 해변에 즐비한 럭셔리풍 호텔들의 여유가 긴 비행시간을 보상해주듯 바라만 봐도 좋다. 엉켜진 근심 걱정을 바다에 뿌리고 최대한 느린 템포로 걸으며 파도가 속삭이는 말에 귀 기울여본다. 감미로운 바람과 멕시코만의 태양 빛을 고스란히 마음속 잔고에 무제한 다운로드한다. 눈이 시원해지는 바다 한쪽을 도려내서 안부를 넣고 짧은 동영상을 찍어 딸에게 보내자마자 원더풀! 답장이 바로 날아온다.
노스탤지어의 가슴 한쪽의 허기를 채워주는 끝없이 늘어선 고급스러운 호텔들…. 저런 곳에서 한 달만 묵어간다면! 걸으면서 다디단 꿈이 잠시 스친다. 현지의 풍물을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시장으로 향했다. 여행객을 맞는 각종 기념품이 가게마다 소복하다. 맘에 드는 기념품을 몇 개 골랐다. 사방 어디를 걸어도 부드러운 시간이 정지된 시계 같다.
나중에 좋은 사람과 꼭 한번 다시 오고 싶어지는 곳!
그림엽서 같은 해변 풍광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불꽃같은 삶의 흔적이 있는 곳 ‘프리다 칼로’가 자랐던 곳 코요아칸의 프리다칼로기념관에 갔다. 첫눈에 들어오는 온통 파란색 벽들이 그녀의 정신처럼 강렬하다. 화가인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고 교통사고로 등뼈가 부러졌지만 고통을 넘어선 화가다. 그녀의 그림을 볼 때 힘 있는 색채 속에 구원 같은 눈물의 언어가 들려오는 이유이다. 감기몸살만 앓아도 쉽게 포기하던 나의 글쓰기 습관이 반성되며, 이제껏 걸어온 나의 길이 얼마나 치열했었는지 물음표를 던져본다.
프리다칼로기념관을 나와서 또 하나 멕시코의 거장, 문학의 거장인 ‘옥타비오 파스’를 만나러 갔다.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1914~1998)는 문학인이라면 한 번쯤 동경하게 되는 인물이다. 그의 《활과 리라》라는 시론은 지금도 시인 지망생들이 찾는 현대의 고전 같은 책이다.
“시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판단도 아니고 해석도 아니다. 솟구쳐 오르는 리듬과 이미지가 표현하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일 뿐이다.”
멕시코를 둘러보면서 내가 얻은 소중한 선물은 예술의 두 거장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화가 ‘프리다 칼로’와 시인이자 사상가인 ‘옥타비오 파스’! 그들의 열정이 녹아있는 거리를 걸으며 치열했던 예술혼에 찬사를 보냈다. 동시에 내게 강렬한 기운이 전해졌는지 심장 한쪽에서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듯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만 태양이 아니다.
태평양을 가르며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두 손을 모은다.
마야, 아스테카 문명의 발생지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멕시코의 땅을 밟고, 칸쿤 해변에서 영혼의 쉼터를 만난 것은 축복이다. 게다가 예술의 양대 산맥 같은 두 거장과의 만남은 마그마를 만난 것처럼 내 삶의 활화산에 부디! 기폭제가 되길 소망해본다.
어느새 나의 손길은 시상詩想에 잠겨 메모장을 꺼내놓고 펜에 힘이 가해진다.
류미월 ---------------------------------------------
류미월님은 시인. 수필가. 《창작수필》, 《월간문학》으로 등단. 문학예술강사, 월드비전 강사, 문체부 인문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