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간 여행작가 2015년 3·4월호, 신작기행문] 동굴 기행, 쉐난도 ‘룰레이’ - 강인철
"쉐난도 산마루에 빨간 노을이 산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산 넘어 산들이 지리산 노고단을 닮았다. 갑자기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축복이구나 싶어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모두가 감사한 가족과 자연과 우리 사는 세상이다. 행복하다. 물론 선인들의 걸작에 대한 무례한 입방아인줄 알면서 해보는 소리다."
동굴 기행, 쉐난도 ‘룰레이’ / 강인철
뉴욕 큰아들네 집에 갔다. 2년만인데도 가족끼리의 해후는 여전히 뜨거웠다. 그리고 2주 후 ‘우리 내외의 용감한 나들이’가 시작됐다. 집 떠난 지 사흘째, 필라델피아와 워싱턴D.C를 둘러보고 81번 하이웨이를 탔다. 차까지 내주면서 엄마랑 맘껏 드라이브해보라며 강력히 추천해준 곳이 버지니아의 ‘동굴’까지라 남으로 한참을 더 달려야 했다. 태곳적 동굴이 기가 막히게 잘 보존돼 있다는 자랑에 단양 고수동굴이나 삼척 환선굴과 다를 게 뭐 있을까 싶어 심드렁했으나 “가서 보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들 내외의 강권에 밀리고 말았다.
아내가 지도를 열심히 살펴준 덕분에 264번 출구로 정확히 나올 수 있어 기뻤다. 쉐난도 국립공원 룰레이 동굴까지 헷갈리지 않게 잘 표시된 ‘미국식 도로표지판’이 부럽고 고마웠다. 우리나라 강원도의 많은 동굴과 비슷하겠거니 하면서도 ‘미국 동굴(?)이니까, 뭐가 좀 다르려나?’ 하는 기대감으로 입장권을 사고 줄을 섰다. 금방 들어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알고 보니 20분 간격으로 1회에 30명씩만 입장시키면서 팀마다 카우보이 차림의 해설사를 겸한 자연보호요원이 인솔하고 있었다.
기다림 끝에 겨우 입장했는데 동굴 초입에서 관람요령과 주의사항 전달이 5분을 넘긴다. 절대 큰소리 내지 말 것과 보행자의 안전용 가드레일에 기대서도 안 되며 만약 담배를 피우거나 종유석을 만졌을 경우는 즉시 퇴장에 벌금이 1,000$이란다. 이 나라의 당연한 공공의식 수준이었음에도 한국적(?) 고정관념 때문에 지나친 규제와 감시가 갑갑하고 지루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동굴 속을 거닐다 보면 시간의 깊이를 엿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기 일쑤다. 겨우 100년을 살기도 어려운 우리네 인간의 삶에 비하면 동굴이 생성된 몇억 년 단위의 세월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멎을 듯 버겁다. 광속光速으로 달려도 수십 년이 걸린다는 밤하늘의 은하계를 보며 어린 시절 무한공간을 상상했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동굴 속을 거닐며 억겁의 세월이 존재하였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태초의 빛깔로 찬란한 종유석이며 석순들을 원형대로 보존 유지하기 위해 이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다.
황금색이거나 아니면 순백의 극치미가 종유석의 본래 모습이었음을 저토록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대부분의 강원도 석회암 동굴들이 시멘트를 부어놓은 듯 회색 덩어리로 존재하고 있었음은 방치된 관리 부재와 무질서로 인한 변질이 아니었을까 싶어 가슴이 먹먹했다.
한때 이 동굴에서 인간의 뼈가 화석으로 발견돼 원시 이전의 그 어떤 ‘종種의 기원’에 대한 물증이 아닌가? 매우 긴장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구 결과 신생대의 지각 변동에 의한 침몰 과정에서 파묻힌 지상의 유골로 판명되어 해프닝으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그 또한 귀히 여겨 지금은 워싱턴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전시 보관 중이라고 한다. 옛것에 대한 자료보존 의식의 철저함이 가상하다.
바깥 기온은 20도였지만 동굴 속은 12도라 조금 추웠다. 무수한 종유석이 아름드리 돌기둥에 비단 커튼을 드리운 듯 궁중 황실을 연상케 하더니 다음 코너에서는 다양한 모양의 형상들이 참 많기도 하다. 표주박이 매달린 것 같기도 하고 빛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천정이 있는가 하면 아이스크림 모양의 석순에 모래시계를 닮은 것은 자그마치 나이가 15억 년짜리란다.
어디선가 물이 졸졸 흐르더니 동글동글한 휴석休石 위로 웅덩이를 만들었고 안내판엔 ‘거울 연못’이라 쓰여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면 위로 반대편 사람이 거울처럼 비치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대형 거울이다. 그것도 너무너무 선명한 명경明鏡이다. 물이 얼마나 깨끗하면 저런 현상이 나타난단 말인가. 자연보호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머리로 하는 것은 더욱 아니며 있는 그대로를 두고 보는 것만이 최선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산소의 밀도가 다른지 공기의 질감조차 눅눅한 게 꽤나 깊이 내려온 듯 조금 갑갑하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1시간 반이 지나고 있다. 하지만 점입가경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었을까. 배구코트만 한 공간에 다다르니 턱시도 정장 차림의 말쑥한 신사가 “웰컴 투 유~” 미소로 맞이하고는 의자에 앉기를 권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며 지금부터 여러분을 VIP로 모시고 ‘환상의 피아노 연주’로 환영해드리겠습니다. 하면서 모자까지 벗어 인사를 한다. 그의 말대로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니 환하게 조명이 켜지면서 진짜 피아노가 거기 놓여 있었다. 그리고 여느 음악회와 같이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었다. 비록 3~4분 정도에 불과한 피아노 연주였지만 그것이 피아노의 건반과 크고 작은 종유석을 전선으로 연결하여 때려줌으로써 돌에서 나는 높고 낮은 자연음自然音이 경쾌한 행진곡으로 울려 퍼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신비스러운, 아니 믿기지 않는 ‘동굴 속 종유석 피아노 연주’의 진풍경이었다. 인간을 일러 생각하는 갈대라고는 하였지만 어쩜 이럴 수가…. 지구촌의 일행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른다. 단순한 동굴 구경에 그치지 않고 고차원의 아이디어로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아름다운지를 웅변해 준 산 교육장이었다.
룰레이 동굴을 품어 안고 있는 국립공원은 5시 반이 넘은 시간이라 프리패스였고 쉐난도 스카이라인 드라이브까지 덤으로 즐길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해거름이라 짝이 그리워 우는지 산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귄다. 다람쥐, 거위들도 다 바쁜데 꽃사슴은 느긋하게 삼삼오오 어슬렁대고 있다. 사슴 몇 마리가 서로 친구하자며 동방의 길손을 졸졸 따라다닌다.
쉐난도 산마루에 빨간 노을이 산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산 넘어 산들이 지리산 노고단을 닮았다. 갑자기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축복이구나 싶어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모두가 감사한 가족과 자연과 우리 사는 세상이다. 행복하다.
물론 선인들의 걸작에 대한 무례한 입방아인줄 알면서 해보는 소리다.
강인철 ---------------------------------------------
강인철님은 수필가. 《에세이21》로 등단. 현 문화유산국민신탁 홍보대사. 기행집 《5부자 라이브 인 USA》 에세이집 《동행》 수필집 《이름이 뭐길래》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