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4월호, 테마수필: 백제를 품은 도시, 익산을 가다] 몸을 푼 석탑, 회한에 잠기다 - 김수인(광영)

신아미디어 2015. 5. 1. 09:02

"당간지주만 남은 미륵사지를 거닐어본다. 겨울바람을 등에 업고 환청을 청하자 웅장했던 경내의 모든 소리들이 일어날 것만 같다. 바람에 서걱대는 댓잎 소리,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와 불국정토를 염원하는 예불 소리, 그리고 만물을 일깨우는 범종 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허공에 번지는 듯하다."

 

 

 

 

 

 

 

 몸을 푼 석탑, 회한에 잠기다       -  김수인(광영)

   당간지주만 남은 미륵사지를 거닐어본다. 겨울바람을 등에 업고 환청을 청하자 웅장했던 경내의 모든 소리들이 일어날 것만 같다. 바람에 서걱대는 댓잎 소리,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와 불국정토를 염원하는 예불 소리, 그리고 만물을 일깨우는 범종 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허공에 번지는 듯하다.
   고대엔 동양 최대의 규모를 갖췄다는 사찰이 뼈대조차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넓디넓은 절 마당엔 마른 풀만 까칠하고, 일제 강점기 때 우리의 국보석탑에 시멘트를 발라 놓은 흔적이 분노를 일게 한다. 기이한 보물과 금제 사리 봉안기와 여태 미궁에 잠겼던 진실까지 숨김없이 드러낸 미륵사지 서西 석탑이 회한에 잠긴 듯 처연하다. “내 몸을 풀어 진실을 밝혔더니 세상이 왜 이리 떠들썩한가. 미륵사 창건 발원을 선화공주가 아닌 황당한 증언을 한 게 그리 충격적인가.”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국경을 넘은 로맨스는 고대인이나 현대인이나 모두 귀를 모은다. 만백성이 흠모하는 선화공주를 백제의 맛둥 서방이 아내로 맞았으니 그 시대 혁신적인 스캔들이 아닌가. 홀어머니 슬하에서 마를 캐서 생계를 유지하던 서동이 신라의 선화공주가 절세가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승복을 가장해 신라의 국경을 넘은 것이다. 그리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 주며 <서동요>를 부르도록 과감한 술책을 꾀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서동薯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어느 날부터 아이들이 부르기 시작한 괴이한 유행가는 서라벌 골목마다 번지더니 드디어 진평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궁궐이 벌컥 뒤집혔다. 신라의 공주가 백제의 하잘것없는 맛둥 서방과 정을 통하다니! 전혀 근거 없는 헛소문에 진평왕은 부들부들 진노했고 선화공주는 속수무책으로 화를 당해야 했다. 터무니없는 풍문이라고 애원하며 아뢰어도 아버지의 분노는 삭아들지 않아 누명을 쓰고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어머니가 챙겨 주는 금덩이를 안고 갈 곳 없어 서성이는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한 청년이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바로 <서동요>를 지어 부르게 한 백제의 서동왕자입니다. 용서하시고 나를 따라 주십시오.”
   곤경에 빠뜨려 놓고 능청스레 손을 내미는 서동을 선화공주는 밀어내지 않았다. ‘번쩍이는 지혜와 넓은 도량을 보아 범상치 않은 청년이구나. 오죽 사무치게 그리웠으면 국경을 넘어와 그런 유행가를 퍼뜨렸을까.’
   서동의 호위를 받고 백제로 넘어온 선화공주는 생면부지의 서동왕자에게 사랑의 싹을 틔웠다. 홀시어머니와 맛둥 서방 앞에 금덩이를 내놓으며 이것을 팔면 백 년은 살 수 있다고 가난한 살림살이를 위로했다. 서동왕자는 그제야 마를 캐던 산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게 금덩이란 걸 알고 날마다 수북수북 주워 모았다. 이걸 가지고 진평왕을 찾아가면 둘 사이를 정식으로 인정해 주리라. 무왕은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수송의 방책을 여쭈었고, 스님은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신라의 궁궐까지 금덩이와 선화공주가 쓴 편지를 보내 진평왕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어느 날 무왕과 선화공주가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아래를 지나치는데 연못에 미륵 삼존불이 전광석화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미륵보살은 중생이 어리석으면 5억7천만년 후에 미륵부처로 오신다옵니다. 백성이 깨달음을 빨리 얻기 위해서 이곳에 미륵사를 창건하라는 현신을 보여 주었사옵니다.” 찰나에 나타난 미륵불을 보고 불심 깊은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다고 한다. 이 연못을 메워 미륵사를 창건해서 도적도 굶주림도 없고 사람이 자비로운 미륵세상을 만들자고 간청했다는 걸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 않는가.
   하나 익산 미륵사지의 서 석탑西塔이 천사백년의 깊은 침묵을 깨고 몸을 풀던 날, 세상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떠들썩했다. 황금빛 금제 사리봉안기에 새겨진 미륵사 창건내역엔 무왕의 왕후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 발원한 것이라고 선명하게 기록되어 나타났다. 참으로 황당한 증언이 아닐 수 없다. 실화로만 알고 있던 천사백년 간의 믿음이 석탑이 해체되는 순간 희뿌연 의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선화공주와 무왕은 설화 속의 부부란 말인가. 만백성과 후대의 가슴에 무지개를 서게 했던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가 허구로 지어졌단 말인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다. 서동요의 애틋한 향가가 빛을 잃으면 어쩔까 심히 염려된다. 부정할 수 없는 기록 앞에서 어깨가 늘어지고 가슴이 출렁 내려앉는다. 서민들의 희망이며 대리만족을 시켜주던 고대의 로맨스가 맥을 못 추어 애잔하다.
   하나 반격할 근거는 충분히 있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이 무왕과 선화공주의 아들이란 게 금문석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는 학설이 있지 않는가. 허탈한 마음 추스르고 어깨를 추켜올린다. 선화공주는 무왕의 전처였는데 일찍 세상을 떴고 사후에 사택적덕의 딸이 재처로 들어왔다는 학설이 분분하니 무왕이 지었다는 서동요는 결코 설화가 아닌 실화라고 굳게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