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님의 수필집 『아름다운 날들』을 소개합니다.
시집살이는 축복이다.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한다.
그렇게 모질었지만 돌아보면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그리고 어찌 몇몇 날들만 아름다우랴.
어제가 아름다웠고 오늘이 아름다우니 내일도 아름다울 것이다.
이기호 수필집 《아름다운 날들》
두 사람만 좋아서 시작한 결혼이었기에 저고리 소매에 눈물 마를 날 없던 시집살이도 공부의 열정에 들떠 지내던 시간들도 이젠 과거의 속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안다. 거기서 새로운 내 시간의 알이 곧 태어날 것을...
힘든 시집살이였지만 그 과정에서 부족하나마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보면 다 후회뿐이지만 시집살이가 나를 활인活人시켜 준 것이다. 그 후회에서 사색의 균사가 자라났다.
내가 작가였던 것이 전생에 있었나, 시심詩心이 처음 나를 찾아온 아침은 정녕 아름다웠다.
고향의 언어와 시어머니의 언어와 우리말을 오래 사랑할 것이다.
- ‘책머리에’ 중에서
언젠가 또 비오는 날이었다. 우산 하나를 쓰고 또 하나는 옆구리에 끼고 남편을 만날 기쁜 생각으로 유유히 골목길을 빠져 나갔다. 그러나 오랜만의 남편 마중은 원명약국 앞에서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틈에 나가셨는지 시어머니께서 예의 그 전자대리점 앞에 잘름한 치마를 달달 떨면서 서 계셨던 것이다.
아들이 비 맞을까봐 그렇게 노심초사, 내가 나갈까봐 앞질러서 우산을 들고 나가시던 시어머니는 왜 말없이 땅속에 누워만 계신 것일까?
요즘은 차 몰고 다녀 남편 마중할 일이 없으니 그곳에 가서 시어머니의 언어들을 주워오는 것 뿐이다.
그때처럼 겨울비 추적추적 내리고 낙엽이 을씨년스럽게 뒹구는 버스 정류장에서.
-〈비 오는 날의 버스 정류장〉 중에서
이기호 --------------------------------------
충남 광천,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예사계 수필 당선(1994. 12), 《에세이문학》 신인상 당선(1995. 3), 동양일보 제16회 지용신인문학상 시 당선(2010. 6), 제2회 천강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2010. 11), 제2회 중봉조헌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2011. 10), 《현대시학》 제 24회 신인문학상 시조 당선(2011. 10), 현재 숙대문인회 회원, 정형시학 회원, 그레이스수필문우회 회원(공저 8권), 인간과문학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 차
책머리에
제1장 내 유년의 뜨락
광천 구舊장터를 아시나요 •12
내 마음의 뜰 •17
아버지 •21
어머니 •27
어머니의 노래 •32
언젠가 그날 •38
콩댐 •41
우리 올케 •46
겨울, 그리고 세루치마저고리 •50
할머니 •55
잔병치레와 비방 •59
한상섭 선생님께 •65
별 •70
제2장 고추 당추 맵다 해도
빨간 반닫이 •76
그래 나는 모른다 •79
청국장 •86
비 오는 날의 버스 정류장 •90
커피, 내 설움의 맛이여 •96
불 밝던 창 •100
베 조각보 •105
부활의 문 •109
깨를 볶다 •115
그릇 •121
가래떡 •125
송편 •130
아카시 꽃잎 필 때 •135
시어머니 오장五臟과 내 간肝 •142
형님께 •144
제3장 시집살이는 축복이다 - 하나님, 나의 하나님
너에게 비같이 축복을 내리리라 •150
환란 중의 축복 •156
제4장 내 사색의 창
북한산 •162
가을걷이 •165
유구무언有口無言? 대구무언大口無言! •169
아침 •174
신사동 옛집 •178
손자이야기 •182
새우깡 이대二代 •186
핀(pin) •190
이옥희 선생님 •194
제5장 숙명시대
만년필로 메꿔 가는 나의 꿈 노트 •198
성낙희 교수님을 추억하며 •201
토니오 크뢰거에게 •203
화장실에서 •209
새내기대학생은 외할머니 •211
슬픈 도서관 •213
여대생의 시간표를 줄줄이 꿰는 남자 •216
숙대 의무실 •219
다가오는 ‘마지막 수업’ •223
빛나는 졸업장과 책 •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