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4월호, 지상에서 길 찾기] 가든파티 - 김덕조
"가지는 내가 자르지 않아도 스스로 물러서는 순환을 할 것이다. 가위를 접었다. 우리 집 앵두는 하얗게 피는 꽃만 보기로 한다. 꽃자리마다 옹기종기 매달려 소곤거릴 앵두를 기다린다. 가지들은 얽힌 듯 보이지만 서로 아무런 상처를 주지 않는다."
가든파티 - 김덕조
청소기를 내려놓고 전화를 받는다. 반가운 친구의 전화는 아무래도 오래 걸린다. 수화기를 들고 벽에 기댄다. 웃음이 가득한 목소리는 내 귓속을 시원하게 한다. 새 봄에는 얼굴 좀 보잔다. 마당에서 솥뚜껑 걸어놓고 삼겹살을 굽잔다. 집 뒤 텃밭에 봄동이 파랗게 기다리고 있단다. 새삼 입맛을 다시며 지난봄을 떠올린다.
지난해 이른 봄날, 남편의 막역한 친구들이 모이자는 연락이 왔다. 남편이 모이는데 덩달아 우리 여자들이 더 바쁘다. 삼겹살은 넉넉하게 준비했고, 쌈장도 만들고 간식거리도 챙기고, 각자 맡은 재료를 두 손이 무겁도록 차에서 내린다. 시골이지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인의 시어머니 집은 우리들이 자주 애용하는 집으로 바뀌었다.
햇볕 좋은 마당에서 잔파를 다듬는다. 조갯살을 다져넣고 노릇노릇 파전도 굽는다. 파릇한 봄동으로 수육을 쌈 싸 먹던, 지난봄에는 한가하게 봄을 시작했었다.
도시와 농촌을 왕래하며 바쁘게 사는 친구는 지금이 봄을 준비하는 때라고 한다. 남편 쉬는 날은 감나무에 가지 치고, 탱자나무 울타리 손질로 하루를 다 보낸다는 전갈이다. 나무에 눈이 트기 전에 가지치기를 해야 한단다. 올 봄에도 만나야 한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끝났다. 잊고 있었던 옥상의 앵두나무가 생각났다.
아침저녁으로 아직은 겨울인데, 어느새 옥상의 앵두나무는 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늘고 새까만 나뭇가지에는 눈[目]마다 작은 봉오리를 달고 있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하얀 앵두꽃이 눈송이 얹힌 듯, 방긋방긋 웃는 탓에 마음 약한 내가 차마 가지를 자르지 못하고 말 것이다. 꽃이 피기 전에 미리 잘라내야 한다. 지난해에는 앵두가 많이도 열렸었다. 꽃이 많이 폈다고 좋아했던 때문에 앵두는 작은 알갱이로 남았다. 올해는 때 맞춰 알려준 사람도 있어, 통통하고 실한 앵두를 생각하며 전지가위 든 손에 힘을 준다.
겨울 동안 나뭇가지는 딱딱하게 굳어 있어, 건드리기만 하면 부러져 내렸는데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다. 가위를 잡은 내 손이 이건 자르고, 이건 살리고, 무작위로 원칙도 없이 잘라내는 가윗날에 파란 물이 묻어난다. 잘려나간 가지에서 원망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나는 가위질을 멈춘다.
남편의 친구 중에 병중인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의술을 찾아다니며 분분하다는 소식에 “의술이 좋잖아! 괜찮을 거야, 좋아질 거야!”하며 응원을 보냈는데, 폐암은 완치가 없다는 소식에 많이 안타까웠다.
완벽에 가깝도록 철저한 성격은 금고의 수장답게 승승장구했었는데, 응원한 보람도 없이 초췌해진 모습은 낯선 사람처럼 서먹했다. 탄력 잃은 모습에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애연가라 할 수 있다. 하루 두 갑 정도면 골초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가족력이 있다고도 했다. 가족력을 갖고도 운동을 싫어했고, 금연을 하지 않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금융계 일을 했다면, 자처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마냥 전진만 있을 것 같았던 그 사람은, 병마와 싸우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듯하다. 느슨해진 말씨며 헐렁한 옷차림을 보며, ≪논어≫의 ‘칠십이종심소욕불유거七十而從心所慾不踰距’를 실천해 보는 것일까! 한결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왜 사람들은 봄날을 간다고 할까! 여리고 부드럽고 애틋하고, 물안개 같은 그리움이라서, 봄인 것인가! 봄은 잠시 비켜서서 뒤따라 올 계절에게 길을 내 줄 뿐, 봄날은 결코 가지 않는다. 언제 만나도 반갑게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그런 친구들이 있는 한 봄날은 있다. 새 봄에도 지난 봄날 ‘가든파티’를 생각하며 웃으며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나는 앵두나무 가지를 자르지 못한다. 찬 겨울 내내 움켜진 긴장을 풀고 한결 부풀어 오른 그들의 희망을 잘라 버릴 마음이 내게는 없다. 바람과 비를 견디며 햇볕에 꽃을 보여야 한다. 따뜻하게 감싸주는 은총 같은 햇빛! 가지를 흔드는 바람의 상쾌함,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들의 몸짓으로 계절을 즐길 권리가 있다.
가지는 내가 자르지 않아도 스스로 물러서는 순환을 할 것이다. 가위를 접었다. 우리 집 앵두는 하얗게 피는 꽃만 보기로 한다. 꽃자리마다 옹기종기 매달려 소곤거릴 앵두를 기다린다. 가지들은 얽힌 듯 보이지만 서로 아무런 상처를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