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인간과문학 2015년 봄호, 이 시인을 주목한다: 석성일] 상생의식의 알레고리적 변용 - 박수빈
"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것도 아닌데 유난히 추울 때가 있다. 체감온도라는 게 저마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마음이 따듯한 사람보다 가슴이 시린 사람이 체감온도가 낮지 않을까. 상황과 심정에 따라 다르듯이 우리가 접하는 시도 따듯한 시와 차가운 시가 있을 것이다. 석성일의 시는 어린 시절 귓가에 익숙해진 노래처럼 그리움과 감성으로 따듯하게 다가온다."
상생의식의 알레고리적 변용 / 박수빈
현대인은 피곤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몸이 산뜻할 때가 별로 없어 크게 아프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병원을 봐도 진료 보는 과가 좀 많은가. 그게 다 아픈 데 아닌가. 피곤할 때면 누군가 차 한 잔 타주었으면 좋겠고 어깨도 주물러 주었으면 좋겠고 조용히 그냥 쉬게 놓아주었으면 좋겠다. 특히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럴 때 석성일의 시편들은 마음을 다독여주는 묘약 성분과 같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것도 아닌데 유난히 추울 때가 있다. 체감온도라는 게 저마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마음이 따듯한 사람보다 가슴이 시린 사람이 체감온도가 낮지 않을까. 상황과 심정에 따라 다르듯이 우리가 접하는 시도 따듯한 시와 차가운 시가 있을 것이다. 석성일의 시는 어린 시절 귓가에 익숙해진 노래처럼 그리움과 감성으로 따듯하게 다가온다.
제 때 밥 주면 밤중에도
내 손목을 꼭 잡고
왔던 길을 다시 오고
갔던 길을 다시 가던
오리엔트 야광 손목시계
어머니가 그리울 땐
이불을 뒤집어쓰고 보면
고향의 반딧불 같은
더 잘 보이던 야광 손목시계
아무리 새 길을 찾아도
이 세상 안에서의 길이다
사람도 가끔은
깨끗한 캄캄함이 필요하다
-〈야광손목시계〉 부분
몸을 덥히는 것은 난로겠지만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위의 시처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훈훈함으로부터 온다. 이 시의 화자와 야광손목시계는 서로 이심전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밤중에도/내 손목을 꼭 잡고/왔던 길을 다시 오고/갔던 길을 다시 가던” 반려의 존재를 그리워하는 심정도 읽힌다. “어머니가 그리울 땐/이불을 뒤집어쓰고 보면/고향의 반딧불 같은/더 잘 보이던 야광 손목시계”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무작위로 먹거리의 한 예를 통해 그리움을 얘기하자면, 어떤 때는 칼칼한 것이 먹고 싶고 언제는 달달한 게 좋고 새콤한 과일을 찾게 될 때도 있다. 매식을 많이 하면 이것저것 갈아먹게 되는데, 집밥과 달리 먹는 것이 신통치 않고 어쩐지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겹칠 때가 있다. 음식만이 아니라 사물에 길들여진 그리움은 또 어떤가. 위의 〈야광손목시계〉처럼 정든 기억은 그리움이 되어 늘 어느 지점에 머무르게 한다.
“아무리 새 길을 찾아도/이 세상 안에서의 길이다/사람도 가끔은/깨끗한 캄캄함이 필요하다”는 주제부분을 눈여겨본다. “이 세상 안에서의 길”을 가야한다는 표현에서는 더불어 사는 동반의식을 느낄 수 있고 “깨끗한 캄캄함”에는 인생의 나침반 같은 길을 제시하고 있어 숙연해진다. 이런 삶의 지침은 〈초승달〉에서도 동일한 맥락이다.
살찐 제 등짝을
밤마다 피를 흘리며
조금씩 조금씩 떼어내더니
마침내 어둠을 짊어집니다
-〈초승달〉 부분
“밤마다 피를 흘리며/조금씩 조금씩 떼어내”는 시어에서 덜어내고 비우는 자세가 감지된다. 이런 행위는 “어둠을 짊어”지고 희생하는 면모를 느끼게 하며 이때 초승달의 모습은 의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승달 이미지는 왜 이리 시린 걸까. 눈이 시리고 가슴이 서늘해진다. 아마도 “살찐 제 등짝”을 마다하고 각성하고 “피를 흘리며” 구도하는 결연한 모습 때문이리라.
감상의 폭을 확장하여 초승달이 뜬 하늘에 날아가는 새를 얹어 본다. 화자의 객관적 상관물이 초승달이든 감상자가 상상을 보태는 새이든 무관하다. 새는 날기 위하여 몸을 가볍게 한다. 만약 비만하여 날지 못하고 뒤뚱거린다면 이미 새의 자질을 잃은 것이다. 빈 하늘에 새가 날아간다. 새는 투명하여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상관이 없겠다. 날은 차고 길은 멀어 보인다. 저물어가는 하늘에 손잡아 줄 이 누구일까. 참으로 아릿하고 외로운 시이다. 〈야광손목시계〉의 “깨끗한 캄캄함”과 〈초승달〉의 “어둠을 짊어”지는 표현은 의미적으로 같은 심상을 대변한다. 비운다는 면에서 다음의 〈대금〉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다.
갈 곳 없는 바람 하나
달빛 밟고 찾아와서
참았던 슬픔 통곡하라고
가슴에 문을 달지 않았구나
한 채 이불도 없고
한 잔 술도 없지만
하룻밤 편히 울어 보라고
가슴을 텅텅 비웠구나
-〈대금〉 전문
석성일의 시는 대상에 대하여 화자의 감정을 이입하는 경우가 많다. “갈 곳 없는 바람 하나”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떠오른다. 방황하면서 슬픔을 무던히도 많이 참았나 보다. 달밤에 들리는 대금의 소리는 저음으로 퍼지며 고적하고 묵직한 정취를 스며들게 한다. 대금에 뚫린 구멍을 통해 시인은 “가슴에 문을 달지 않았”다거나 “가슴을 텅텅 비웠”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시를 읽다가 턱을 괴어 본다. 화자는 전생에 무슨 업業이 많았기에 본능적으로 슬픔의 습習에 익숙할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질문들이 이어지는 듯하다. 구체적으로 쌓인 슬픔이 이것이라고 시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방황한 분위기에서 묵시적으로 포착이 가능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비극의 정서는 고귀하고 귀족적이다. 생계가 막막한 경우라면 슬픔이 차고 넘쳐 감당하기 힘들 정도여도 비탄에 빠져들 여지도 없다. 애상을 박차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은은한 밤공기와 어우러져 동양화 같이 그려진다. 신비로운 정취를 자아내고 여백의 미학이 느껴지는 시이다. 이 심상을 선염법渲染法이라고 부르고 싶다. 산수운연山水雲煙의 흐릿한 여운과 달을 묘사하기 위해 화면을 어슴푸레하게 그리듯이 어느덧 화자의 마음은 바람소리 대금소리와 더불어 있다. 기분이 무상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한 석성일의 신작시들은 삶의 비정함, 불합리, 불평등을 시적 소재로 성찰과 명상을 한다.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말은 존엄성에 대한 언급일 뿐, 실제 구성원들 사이에는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해 왔다. 가까운 예를 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받는 교육의 질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전통사회에서는 주로 신분에 따른 불평등 현상이 나타났다. 허나 오늘날은 소득 격차, 남녀 간, 지역 간, 정보 격차, 소위 3D 일을 하는 노동자 같은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차별 등등 종류가 많다. 그래서 더 어수선하고 살기 힘들어지는 모습을 석성일의 시는 사유하고 반영한다.
앞에서 살펴 본 〈야광손목시계〉처럼 회상의 지점에 이르면 그의 시는 센티멘털해진다. 이러한 잠깐의 감상을 벗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핵심은 알레고리다. 다음의 예시들을 보자.
가)
꽃은 향기가 마음이다
사람은 마음을 숨기지만
꽃은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을 차별하지만
꽃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사람은 때를 알아 떠날 줄 모르지만
꽃은 때를 알아 떠날 줄 안다
사람은 꽃을 밟지만
꽃은 사람을 밟지 않는다
-〈꽃〉 부분
나)
사람들은 두 눈 때문에
봄을 보느라 봄을 보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두 손 때문에
봄을 붙잡느라 봄을 붙잡지 못하는데
능수버들은 딴 꿈을 품지 않고
제 가슴둘레로만 푸르게 가고 있다
능수버들은 딴 데를 보지 않고
타향 땅에서도 햇살과 놀고 있다
사람들은 위로만 굵어지고 싶어 하는데
능수버들은 아래로만 가늘어져 간다
-〈능수버들〉 부분
가)와 나)는 각각 “꽃”과“능수버들”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사람의 특성과 비교 대조하고 있다. 가)의 〈꽃〉에서는 사람의 “마음”, “차별”, “때”, “밟는 행위”와 견주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을 돌아보고 있다. 나)의 “사람들은 두 눈 때문에/봄을 보느라 봄을 보지 못”하며 “두 손 때문에/봄을 붙잡느라 봄을 붙잡지 못”한다는 서술에 주목해 본다. 인간은 눈과 손에 급급하여 즉 근시안적인 사고를 하지만 자연의 “능수버들”은 “딴 꿈을 품지 않고” “딴 데를 보지 않고” 궁극에는 “위로만 굵어지고 싶어 하는” 인간들에게 “아래로만 가늘어져” 겸손과 깨달음을 준다.
이와 같이 석성일의 시는 주제를 말하기 위하여 다른 주제를 사용하여 그 유사성을 적절히 암시하면서 주제를 부각하는 방법으로 은유와 유사한 알레고리 기법을 활용한다. 은유가 단어나 하나의 문장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반면, 알레고리는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법으로 문맥 사이의 관계, 대립, 긴장, 불균형 등을 통해 시적 효과를 획득한다. 단순히 의사소통만을 노린다면 가령 배가 고플 경우 1차적으로 그냥 “배 고파.”라고 발화하지만 시적 강조를 위해 2차적으로 객관적 상관물을 동원하여 빗대어 돌려서 말한다. 이때 석성일의 시에서 아포리즘(aphorism)들이 연상된다. 깊은 진리를 간결하게 전달하면서 격언이 떠올라 효율적이다.
1차적인 표현이 상식적, 일반적, 과학적이라면 당연히 후자는 이를 뒤집어 새롭고 낯설게 하는 세계로 다분히 문학적이다. 현대는 다방면에 걸쳐 참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지닌다. 그래서 질서정연하지 않고 과학적인 설명의 한계가 있다. 삶의 내밀한 영역이 세세하게 드러나고 다중의 화제가 되는 오늘날을 고려하면 문학은 더 2차적이다. 통념을 파괴하면서 근시안적이고 고식적인 인과율을 공격하는 묘미가 있다.
알레고리는 수사적인 장치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태도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가치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는데 석성일의 시세계가 그러하다. 알레고리의 방법에는 시점이나 어조를 달리해도 되고 리듬과 의미가 분리될 때 그 괴리감에서 발생하기도 하며 예로부터 중요한 수사적 기제로 사용되어 왔다. 이것이 현대에 부합되는 문학이라는 주장도 있고, 여기에 담긴 정신이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비판의식을 담보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석성일의 시에 나타난 알레고리적 변용들은 단순한 낱말, 구절, 문장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저변에 자리 잡고 있는 미의식이다.
가)
소금이 되는 사람만이
세상을 상하지 않게 견뎌낼 수 있다
순결한 침묵이다
시들지 않는 꽃잎이다
바다의 눈물이다
변하지 않는 약속이다
소금은 고향을 멀리 떠나왔어도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고향이 되어 준다
소금이 된다는 것은 사람이 되는 일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소금이 되는 일이다
-〈소금〉 부분
나)
소는 벚꽃이 흐드러져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소는 먼산을 바라보며 산을 닮다가
마침내 죽어 둥둥둥 먹지 않는 삶을 살기도 한다
칼슘을 걱정하며 소젖을 먹으면서
근육을 생각하며 소시체를 먹으면서
인간들은 너무도 똑똑해서
소의 웃음은 한 점도 먹을 줄 모른다
-〈소〉 부분
가)의 〈소금〉과 나)의 〈소〉는 인간에게 귀감이 되는 시적 대상이다. 소금은 “순결한 침묵”이며 “시들지 않는 꽃잎”이며 “바다의 눈물”이고 “변하지 않는 약속”이어서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고향” 역할을 한다. 나)의 〈소〉역시 헌신적인 표본이다. “소는 벚꽃이 흐드러져도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수행을 한다. 사람들은 “소젖을 먹”고 “소시체를 먹”지만 소의 고갱이인 “소의 웃음은 한 점도 먹을 줄 모”를 정도로 어리석다. 돌이켜 보면 삼라만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런 우주적인 질서에는 어울림이 있다. 그런데 인간의 아집과 이기심이 자연을 거스르며 상생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이다.
위의 시편들은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지혜를 배우게 한다. 금강경을 Diamond Sutra 라고 하듯이 다이아몬드처럼 가장 단단한 경전이며 불멸의 의미를 상징한다. “마음이 집착하고 머무는 바 없이 원래 근본의 마음을 드러낸다.”는 뜻의 핵심을 헤아려 본다. 사람은 이런저런 고정관념과 이기심에 쏠리기 쉽다. 고착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불교적인 측면에서 기도, 참선, 독경 공부 등의 수행으로 가능할 것이다. 위의 시편들은 일련의 연기적인 사고와 알레고리 성향이 강하다. 시의 맥을 짚어보면 참된 자아를 찾아 “소금”이 되어야 한다.
“소금이 된다는 것은 사람이 되는 일이”며 “사람이 된다는 것은 소금이 되는” 과정이므로 자기애와 집착을 버려야 할 것이다. 이는 인내를 요하고 유혹을 뿌리쳐야 하는 고통의 과정이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약한 영역이 있다. 어떤 사람은 물욕에 어둡고, 어떤 이는 식욕에 약하고, 권력욕이 지나친 사람도 있다. 탄소는 엄청난 열과 압력을 받아 다이아몬드가 된다. 열과 압력을 고통이라고 볼 때, 그 인고의 시간을 통해서 인간은 “소금”과 “소”의 미덕과 상생의 경지를 터득한다. 다음의 시는 그런 수행의 과정을 보여준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그 중이
요즘 매일 하는 일은
세월 옆에 살짝 숨어
걸망에서 꺼낸
운강석굴 대불님이 바라보던 허공을
꼭꼭 깨물어 먹으며
아무도 모르게 소화시키는 일이다
-〈밥값〉 부분
이 시의 주제와 묘미는 “운강석굴 대불님이 바라보던 허공을/꼭꼭 깨물어 먹으며/아무도 모르게 소화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다. “소화”는 일종의 구도에 해당한다. 그런데 왜 하필 “허공”을 대상으로 할까. 삶의 궁극은 무위이며 비어있다는 뜻일까. 수련은 많은 경험과 통찰을 동반한다. 이 시를 읽다보면 마음에 법당이 하나 생기고 그 사유의 공간을 향해 가는 주인공이 오롯이 보인다. 삶의 여정들을 돌아보니, 사람들은 참 많은 풍경들을 거치며 사는 것 같다. 이 시의 화자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곧 밥값하기 위해 “운강석굴 대불님이 바라보던 허공”을 수행처로 삼는다. 그렇게 절집을 향해 가는 주변에는 왜 그리 보신탕, 매운탕, 삼겹살집들이 많은지, 그 만큼 도를 닦을 일은 가까이 이웃해 있다는 것인지, 역설적으로 받아들여 볼 필요가 있다. 절집 길목에는 좌판의 졸고 있는 할머니도 있고, 동네 어귀의 평상과 그 기둥에 묶인 채 짖는 개도 있고, 구걸하는 바가지도 있고, 햇볕에 달궈진 동전 몇 닢도 있고, 이들을 지나면 드디어 세속의 경지를 넘는 일주문이 나온다. 눈을 부릅뜨며 성찰하는 사천왕을 통과하기까지, 어떤 이는 평생이 걸리기도 하고 도착하지 못하는 이가 허다할 것이다.
시를 음미하며 부지불식간에 흐르는 시간을 상기해 본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며 까무룩 청년이 중년이 되고 급기야 노인이 된다. 이렇게 가도 백 년도 못 가는 인생구비는 참으로 곡절이 많아서 각자 저마다의 법당을 찾는 일은 석성일의 시가 그렇듯이 지금 이 순간도 진행형이다.
박수빈 -------------------------------------------
광주 출생.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 활동 시작, 《열린시학》 평론 등단, 시집 《청동울음》, 평론집 《스프링 시학》. 상명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