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4월호, 편집위원의 말] 머리 깎고 중이나 될까? - 이향아
"작가는 글로써 만나야 한다. 아무리 제 입으로 소문을 내고 소위 문단 정치를 하여 신문에 나오고 방송에 출연해도 그것은 일시의 소란일 뿐이다. 작품의 질적 가치는 시류를 타는 유행이 아니라 절대가치다. 정말로 좋은 작품은 설령 금세에 숨어 있을지라도, 문학사에 남아서 정당한 그 광채를 평가받을 것이다. 머리를 깎고 중 노릇을 하여도 모두 똑같은 중은 아니다."
머리 깎고 중이나 될까? - 이향아
신입생 중에 승복을 입은 학생이 있었다. 스물여덟 살이라고 했다.
학생들은 한동안 호기심으로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는 언변도 없을 뿐더러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들려줄 이야기가 별로 없다는 듯이 곧잘 “다 팔자소관이지요.”라고 자신의 입장을 짧게 변호하곤 하였다.
그는 졸업 후 해인사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있다면서,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꼭 한번 다녀가세요.”
전화를 여러 번 했었다.
생각해 보니 한 번쯤 가서 격려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갔었다.
그가 안내하는 대로 요사寮舍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정갈하게 차려온 옻칠소반을 받으면서 나는 까닭 없이 마음이 울컥하였다. 산나물, 김치보시기, 간장종지와 밥사발.
아침 식사 후에 그는 승가 대학을 졸업했다는 동료들 몇을 데리고 와서 내게 소개하였다. 우리는 함께 경사진 언덕길을 산책하였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긴 했지만 그들은 천진한 소년들 같았다. 쉬지 않고 많은 말을 주고받았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지금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것은 그들의 피부가 눈부시게 투명하고 깨끗하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때 내 피부가 탁한 것이 몹시 부끄러웠고 그것은 순전히 나의 긴 머리카락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와 박박 깎은 머리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바다 같은 것이 가로놓여 있구나,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다.
“머리 깎고 중이나 될까?”
머리만 깎으면 아무때나 중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받아줄 쪽 의향은 묻지도 않고 마음만 먹으면 문제없다는 식의 발언은 무례와 오만이다.
특히 “중이나 될까?”에서 “~이나”라는 조사는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주려고 해도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만큼 듣는 사람의 감정을 자극한다. 밥을 달라는 사람에게 “밥은 무슨 밥, 죽이나 먹어라.”, 대학에 가고 싶은 사람에게 “대학은 당치않다, 그럭저럭 있다가 시집이나 가거라.” 할 때처럼, “~이나”는 앞에 오는 체언의 무게를 아주 볼품없는 것으로 문질러 버린다.
“중이나”라는 말에도, 중을 깔보는 마음이 담겼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치고 좀처럼 머리를 깎지 못할 것이고, 혹시 깎더라도 결코 중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중이 되더라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정말로 중이 될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머리를 깎기까지 길고 긴 묵상, 피 맺힌 갈등과 정화와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퇴직을 하고 무엇으로 소일을 할까 생각하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인생에 진입하듯이 과거에 하지 않던 일, 분망한 생활 속에서 미뤄두었던 일에 도전한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나도 수필이나 쓸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의 하고많은 일 중에서 그래도 글을 써볼까 생각하다니 고맙기는 하다. 그러나 “수필이나”라니, 경솔하고도 건방진 말로 들린다. 거기에는 수필을 만만하게 여기는 당돌함이 담겨 있다. 글 가운데는 시도 있고 소설도 있고 평론도 있는데 “시나 쓸까.”, “소설이나 쓸까.”라 하지 않고 “수필이나 쓸까.”라고 하는 것은 수필이 가장 친근하고 수월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긴 할 것이다. 하기야 그렇기는 하다. 형식이 자유롭고 소재 또한 특별한 것이 아니어도 되니까. 그러나 우습게 알고 덤볐다가는 수필 몇 편도 쓰지 못하고 이내 낙담하다가 소문도 없이 시들어버릴 수가 있다.
대학 부설 사회교육원에서 문예창작반을 맡았을 때, 수강신청을 한 사람들에게 수필을 쓰려는 이유를 물었더니, 그들의 대답은 다양하였다.
“칠순 잔치를 할 때쯤 자서전을 출판하고 싶어서…….”
“자식들 논술을 지도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하여…….”
“부부싸움을 한 후 말로는 풀지 못해 억울할 때, 편지라도 잘 써서 남편에게 보내려고…….”
“학창 시절에는 백일장에서 더러 상도 타곤 했는데 그냥 포기하고 말기가 아쉬워서…….”
‘글이 쓰고 싶어서’, ‘쓰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라는 말을 기대한다는 것은 내 무리한 욕심이라 치더라도, 글을 쓰는 동기가 너무 타산적이어서 실망스러웠다.
그들 중에는 열심히 써서 신인상을 받고 수필가라는 이름을 얻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경영하던 과거의 일들에 비하면 문학이 너무 소득이 없고 응답이 더디다고 불만스러워한다. 데뷔하자마자 명함을 만들어서 “나, 수필가요.” 사방팔방에 알리고 다녀도 흡족하지 않은 모양이다.
작가는 글로써 만나야 한다. 아무리 제 입으로 소문을 내고 소위 문단 정치를 하여 신문에 나오고 방송에 출연해도 그것은 일시의 소란일 뿐이다. 작품의 질적 가치는 시류를 타는 유행이 아니라 절대가치다. 정말로 좋은 작품은 설령 금세에 숨어 있을지라도, 문학사에 남아서 정당한 그 광채를 평가받을 것이다.
머리를 깎고 중 노릇을 하여도 모두 똑같은 중은 아니다.
이향아 -----------------------------------------------
경희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업. 1963~6년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오름. ≪화음≫ 등 19권의 시집과 ≪불씨≫ 등 15권의 수필집, 그 외 다수의 문학이론서가 있다. 한국문학상, 시문학상, 미당시맥상 등 수상. 호남대학교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