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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3월호, 나의 대표작] 사죄 - 이임순

신아미디어 2015. 3. 30. 20:45

"과수원을 다시 지렁이 천국으로 만드는 데 5년이 걸렸다. 이 글은 농사꾼의 딸이자 과수원지기가 그때 전멸한 지렁이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사건이며 많은 뉘우침도 있어 나의 대표작으로 뽑았다."

 

 

 

 

 

 사죄       -  이임순


   과수원지기인 내가 과수원을 둘러보기가 두려운 적이 있었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과수원을 일군 지 이십 년 만의 일이었다. 과수원지기로서의 한 번의 실수, 돌이키기 힘든 사건 때문에 돌아온 결과였다. 그때 왜 그랬을까? 좀 더 신중하지 못했던 행동이 후회로 남아 가슴을 파고든다.
   그해의 장마는 유난히 길었다. 비가 계속 내리자 사방이 물로 넘쳤고, 과수원의 잡초들은 때를 만난 듯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비가 내리고 날씨가 걷히기를 반복하는 사이 과수원은 결국 잡초들로 덮이고 말았다.
   애지중지하는 과수원이 잡초로 덮였으니 과수원지기로서 어찌 두고만 보겠는가. 어쩌다 비가 멎고 해가 나오면 웃자란 잡초를 제거하기에 바빴다. 잡초 제거작업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밭에는 생기가 돌았고, 풋풋한 풀냄새와 흙냄새가 좋았다.
   지루하던 장마가 물러가자 잡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예초기에 시동이 걸리고 잡초들은 무더기로 잘려나갔다. 오랜만에 흙들이 햇볕에 거무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뿐. 뿌리가 남은 풀들은 왕성한 생명력으로 잘려나간 몸뚱이를 다시 키우며 바닥을 덮었다. 과수원의 풍경이 날마다 달라졌다. 예초기가 지나간 곳의 모습이 하루 차이로 극명하게 달라 보였다. 과일나무가 먹을 거름을 대신 먹은 풀들이 세력을 무섭게 펼치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기도 전에 치르는 잡초와의 전쟁은 몸을 지치게 했다. 남편은 자르고, 나는 베어진 풀을 모았다. 이렇게 매일 사력을 다해 제초 작업을 마치고 나면 마음이 시원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잡초를 보면 언제 저것들을 또 벨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예초기로 풀 베는 일만큼은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 걱정이 클 수밖에 없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이 다른 일들을 제쳐두고 퇴근 후 날마다 제초 작업에만 매달릴 수가 없기에 나오는 걱정이었다.
   수험생 엄마라는 부담까지 안고 있던 나는 육체적인 피로까지 겹치다 보니 생활 그 자체가 무력해졌다. 전에는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하룻밤 자고 나면 거짓말처럼 몸이 가뿐했었는데, 언젠가부터 회복의 시간이 느려지더니 그 즈음에는 무력감만 더해 갔다. 그러다 보니 생활 그 자체가 짜증스러웠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고, 물기를 잔뜩 머금은 땅은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과수원은 다시 잡초들이 무릎께까지 자랐다. 눈앞에 뱀이 있다 해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만일 그런 상황이 온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그런 어느 날, 염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과수원을 조심스레 돌아보고 있을 때 가까운 곳에서 개구리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가 그려졌다. 걸음을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다. 바싹 긴장해 있는데, 내 앞으로 뱀이 보란 듯이 스르르 지나갔다. 소름이 돋았다. 오도카니 서 있을 수밖에 달리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과수원은 사방을 둘러봐도 어디 한 군데도 훤한 곳 없이 잡초가 무성했다. 풀이 무성해질수록 뱀에게 혼을 빼앗기는 횟수가 늘어났다. 과수원을 둘러보려면 겁부터 앞섰다. 유난히 겁이 많은데다 비위까지 약해서 뱀을 만나는 날이면 끼니조차 먹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존경하는 선생님의 정년 퇴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길이었다. 차를 타고 꼬불꼬불한 길을 달리는데 과수원이 나타났다. 규모가 제법 큰 과수원이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그 과수원에도 잡초가 무성했다. 굽이를 도는데 멀리서 약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계 옆에 이르러 차에서 내려 무슨 약을 치느냐고 물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는
   “풀 죽이는 약이요!”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에게 무얼 묻느냐는 투였다.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못 알아들은 양 다시 물었다.
   “아저씨 무슨 약이라고 하셨어요?”
   “농사꾼이 쓰는 약을 알기나 허것소?”
   역시 퉁명스런 대답이었다. 그때 마침 통 속의 농약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기계가 멈추었다. 나는 아저씨께 우리도 과수원을 하는데 무슨 농약을 치는지 궁금해서 여쭈었노라고 정중히 말했다.
   아저씨는 그때서야 부드러운 말투로 “제초제를 뿌리고 있소.” 하셨다. 다른 피해는 없느냐고 물었더니 “감만 따면 되는 것 아니오.” 하시며, 일손 귀한 판에 그나마 제초제가 한몫을 톡톡히 해 준다는 말도 곁들이셨다.
   퇴임식장에서도 내 머릿속은 제초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잡초투성이 과수원을 둘러볼 때마다 제초제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웃 밭의 아주머니가 자주 사용하는 약이 제초제였고, 길 건너 과수원에도 일 년에 몇 번씩 살포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래도 우리는 제초제 뿌리는 것을 기피해 왔었다. 흙에 뿌리내린 풀이 죽을 정도면 그 모체인 흙에도 피해가 따르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해처럼 장마가 길어져서 풀 속에 묻히고, 무엇보다 뱀에 놀랄 때가 자주 생긴다면 한 번쯤 쓰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낮에 보았던 광경을 이야기하고, 나의 생각을 말했다. 이튿날, 이제까지 쓰지 않던 제초제를 구입하고 농약 살포기에 시동이 걸렸다. 한해살이 잡초에는 ‘크라목손’을, 여러해살이 잡초에는 ‘근사미’를 살포했다.
   예초기에 몸이 잘려나가도 지치지 않고 자라나던 잡초들은 다음날부터 생기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자 형체만 남은 풀들은 희멀겋게 마르며 땅이 훤히 드러났다. 이제는 멀리에 어떤 물체가 있어도 금방 알아 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장화나 운동화를 싣지 않고도 과수원을 마음 놓고 활보할 수가 있었다. 마치 운동장을 활보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세상사 이치는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인가. 뱀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싶을 즈음부터 땅바닥이 갈라지고, 지렁이가 보이질 않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제초제 때문에 지렁이가 전멸되었으리라고는 것을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다. 다만 가뭄으로 인해 땅바닥이 갈라지는 줄로만 알았다. 제초제에 의한 2차 피해를 생각지 않은 데에서 온 결과였고, 원인을 알아냈을 때는 이미 물이 엎질러진 뒤였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땅에 지렁이가 득실대도록 만드는 데에 이십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지렁이는 건조하고 메마른 땅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농사에는 꼭 있어야 하는 지렁이. 그렇게 긴 시간 공들여서 살게 만든 천금 같은 지렁이를 전멸시키고 말았으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지렁이는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땅속의 쟁기다. 땅속에 지렁이가 없다는 것은 그 땅이 죽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소중한 물건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기분이 이런  것일까? 추운 겨울에 소나무 잎을 긁어모아 거름을 만들었고, 삼복더위도 아랑곳없이 풀을 베어 퇴비를 만들어 땅을 파고 묻었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식당에서 음식물 찌꺼기를 나른 것은 또 몇 해던가. 뱀을 만나면 징그럽다는 생각에 그만 제초제를 뿌린 것이 이렇게 엄청난 변화를 가지고 올 줄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지렁이가 없는 땅에서 나온 과일이라면 그 또한 안심하고 먹을 수 없지 않는가.
   제초제 살포사건으로부터 십 년. 과수원에서 지렁이를 다시 살게 하는 데에 오 년의 시간을 쏟으면서 그 전보다 훨씬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그에 대한 보답일까. 지금은 다행히 지렁이라고 하는 쟁기들이 과수원을 열심히 갈고 있다. 이제는 조용한 밤에 귀를 기울이면 지렁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토룡土龍님들께 사죄드립니다.
   십 년 전, 한 번의 약화藥禍로 몰사하신 토룡님들께
   농사꾼이요, 과수원지기로서 애끓는 마음으로 사죄를 드립니다.
   다시는 제초제로 괴로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부디, 편히 잠드소서.

 

 

 

작 가 메 모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나는 농촌에서 태어났는데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다. 아버님은 딸자식은 잠시 머물다가는 바람과 같다며 봄가을이면 내게 한약을 먹이셨다. 오만 핑계를 다 대며 먹지 않으려고 하면 아버님은
   “내 곁에 있으니 해주지 내 곁 떠나면 해주고 싶어도 못 해준다.”며 아이 어르듯 달래셨다. 그렇게 먹었건만 지금도 허약하기는 마찬가지다. 외형상으로 보았을 때는 밥 구경도 못한 사람 같다. 하지만 나는 겁나는 일이 없다. 지금도 하루쯤은 날밤을 새워도 이튿날 생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아버님이 내게 먹이신 한약은 살보다는 뼈를 강건하게 한 것 같다.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은 과수원을 일구는 것이 꿈이었단다. 결혼 이듬해 어느 날, 남편은 저녁을 먹고 난 후 바람 쐬러 가자고 했다. 달이 밝아 한참을 걸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남편은 인근의 야산으로 데리고 가더니 이 산을 사고 싶다며 내 의향을 물었다. 말이 산이지 공원에 온 느낌이었다. 그런 산이 내 발목을 잡을 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과수원지기의 운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소나무를 베어내고 감나무를 심었다. 공무원인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일은 내 몫이었다. 과수원이 꿈인 남편은 부업이고 나는 전업과수원지기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체력을 유지하듯이 나무는 흙속에서 양분을 흡수하면서 큰다. 거름을 장만하기 위해 근처 산에서 소나무 잎을 긁어모으고 한여름에도 풀을 베었다. 식당에서 음식물 찌꺼기를 가져와 짐승도 키우고 남은 것은 나무 밑에 묻었다. 거름을 한 나무와 하지 않은 나무의 차이는 열매가 말해 주었다.
   과수원 어디를 파도 지렁이가 득실댔다. 이 천금 같은 지렁이가 전멸을 했다. 과수원지기 20년 만에 무성하던 과수원의 잡초를 죽이기 위해 제초제를 쳤는데, 잡초가 고사되고 뱀의 공포에서도 벗어났지만 땅이 갈라지고 지렁이를 볼 수 없었다.
   과수원을 다시 지렁이 천국으로 만드는 데 5년이 걸렸다. 이 글은 농사꾼의 딸이자 과수원지기가 그때 전멸한 지렁이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사건이며 많은 뉘우침도 있어 나의 대표작으로 뽑았다.

 

 

이임순  -------------------------------------------
   1997년 ≪수필과비평≫ 등단. 한국문인협회, 전남문인협회, 광양문인협회, 전라수필, 까치문학 회원. 까치문학, 전라수필 회장 역임. 마터나문학상, 한국여성문학상 수상. 광주ㆍ전남 주부백일장 대상, 환경보존을 위한 주부백일장 대상. 농민신문사 생활수기 우수상. 장한 어머니 표창. 사회복지사, 보육교육사, 특수아교육치료사, 미술치료사, 상담사, 웃음치료 교육사, 레크리에이션 지도사, 동화구연 지도사,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 어린이집 근무, 전라남도 도민(주부)명예기자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