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인간과문학 2014년 여름호, 이 시인을 주목한다: 박진숙] 꽃길에서는 길을 잃어도 좋다 / 박수빈
"이번 박진숙의 신작시들은 욕망을 내려놓은 듯이 보이다가도 미궁으로 빠지는 경향이 겹쳐 있다. 문득 연꽃이 연상되고 상처가 더 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더러운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화처럼 퇴적물이 발효하는 과정 속에 박진숙의 시가 놓여있다. 추하고 흉한 세태에서 귀하고 아름다운 생의 본질과 의미를 찾는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번 신작시 5편은 깨달음의 노래이면서 알 듯 모르겠는 수수께끼 같은 생의 번뇌를 살피는 시편들이다. 통찰을 기반으로 성숙과 우아함을 동반하면서 시인 자신이 진경산수화의 꽃이다. 언어의 절제와 압축을 통하여 여백의 효과는 물론, 시적 의미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는 여러 속성들이 어우러지면서 삭힘의 과정을 거쳤다는 의미한다. 이렇게 이 시대의 〈헌화가〉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감상하고 해석할 수 있다."
꽃길에서는 길을 잃어도 좋다 / 박수빈
삶을 위하여 꽃을 노래하고 바친 기분이다. 박진숙의 이번 신작시들은 지금부터 1,300년 전 신라 시대의 〈헌화가〉가 새롭게 창조되었다고 할까. 시를 읽다 보니 시대를 넘나드는 두 편의 순례 여정이 오버랩이 된다.
먼저 7번 국도를 따라 푸른 동해가 펼쳐진다. 붉은 바위 절벽이 아스라이 솟구쳐 있는 사이로 모래 해안을 따라 길이 놓여 있다. 경주에서 강릉으로 가는 해안도로. 순정공 일행을 따라 수로부인이 간다. 그 곁에 한 노인이 망설이며 서있다. 암소를 끌고 가던 중이었는지 고삐를 잡고 있다. 마침내 결심한 노인은 고삐를 놓고 절벽으로 올라가 꽃을 따온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한다. 절절함이 가득한 목소리는 ‘4구체 향가’로 분류되며 불멸의 명곡이 된다. 꽃을 바치며 불렀다고 하여 〈헌화가〉로 이름 붙여진 이 노래는 악보도 가사도 없으나 단순하면서 심오하고 인생과 사랑에 관한 최고의 옛 노래라고 한다.
다음으로 오늘날의 수로부인이 한반도의 등줄기를 따라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고 있다. 이번에는 신임 강릉 태수 순정공과는 달리 남쪽방향으로 달린다. 물과 뭍을 동시에 보면서 가는 길은 북쪽을 지향할 때는 다사다난 했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과거의 회상 시점이 된다. 일상을 벗어나는 길이기에 무한 자유의 공간이다. 땅거미 지고 어둠이 내리며 쏟아지는 무수한 별 같은 깨달음들!
이렇게 박진숙의 시들은 난관을 살아온 아름다운 꽃들처럼 느껴진다.
꽃길이었다, 담장 너머 백일홍이 손에 잡힐 듯 붉은 북경반점 오래된
골목길이었을 것이다, 부겐빌레아 진홍빛에 한낮 햇살이 호박 속 같은
북촌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정거장도 없는 북아일랜드찻집
붓꽃 서늘한 숲길이었겠다, 아카시아 꽃잎이 눈물처럼 떨어지는 북악
스카이웨이였을 수도 있다 길 위에서는 길을 잃어도 좋았다
길 위에서는 기억을 다 잃어도 괜찮았다 깨진 무릎이 아무는 동안
길에는 꽃의 기억만이 한 가지로 남았다 북경이래도 한 가지
북촌이래도 한 가지, 북아일랜드래도 북악이래도 마치 한 가지! 꽃의
기억을 빠져나오니 달빛 높은 팔월의 맨드라미호텔 앞, 바이올린을 켜듯
디리링 디링 자전거 페달을 고요히 밟는다 꽃 그림자 귀밑머리 날린다
-〈드라이빙 홀리데이〉 전문
인생을 백년이 못가는 한 편의 머나먼 드라이브로 치환할 수 있겠다. 위의 시 제목에서 여행 중인 국가에서 일하는 워킹 홀리데이(working holiday)가 연상된다. 화자는 자신이 살아온 길들이 꽃길이었다고 회상하며 “백일홍”, “부겐빌레아”, “붓꽃”, “아카시아”, “맨드라미” 등을 떠올린다. 지나온 구비마다 거쳤을 꽃들의 상징성을 생각해 본다. “백일홍”, “부겐빌레아” 붉은 꽃들의 이미지에서 청춘과 타오르는 정념을 떠올리기도 잠시 “서늘한” “붓꽃”과 “아카시아 꽃잎이 눈물처럼 떨어”진다. 이는 삶의 포물선이 절정을 지나 하강을 그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 “북경”, “북촌”, “북아일랜드”, “북악”의 북쪽을 지향하는 단어들에 주목하다가 에벗의 《플랫랜드》와 연결지어 본다. 소설제목이 의미하듯 평평한(flat) 세계(land), 즉 2차원의 평면도형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가지고 사고를 하며 사회생활을 하는데 그 모양은 성별과 신분에 따라 결정된다. 우선 여성은 넓이가 없는 선분으로 설명한다. 양끝이 날카로운 선분이 즉 방향성이 다른 도형과 부딪힐 경우 다칠 수 있다. 이때 북쪽은 남쪽과 불가분리의 대응으로 존재하며 따뜻하거나 평온한 이미지와 달리 ‘비밀’이나 ‘미스터리’와 상관이 있다고 한다. 또한 북쪽은 일반적으로 햇빛이 적은 응달이므로 성취하기 어렵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지향점으로 감상해 본다.
“깨진 무릎”은 상처를 의미할 테고 “아무는 동안” 생을 긍정하게 되어 “길 위에서는 길을 잃어도 좋았다”는 아포리즘이 빛난다. 아프다는 것은 역발상을 해 보면 축복이다.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아플 때에는 이제까지의 삶을 총체적으로 돌아보게 된다. 이 반성이 출발의 계기점이 된다. 이 시는 생의 환희를 발산하는 꽃의 시절들을 회고하는 아름다운 시이다.
다음의 시에서도 여러 꽃들이 등장하고 있다.
나팔꽃, 봉숭아, 채송화에 민들레
오래된 씨앗들을 버리기 어려워
살면 살고 죽으면 죽고 뜰 한켠에 묻었다
불어오는 봄바람에도 기척 없어 잊은 지도 해를 넘긴
초여름 맑은 날 돌연 금강초롱이
들꽃 동무들과 함께 나타났다
해와 달이 번갈아 들여다보고
감탄하고
괜히 놀라서
시절이 다하기 전에 후광을 둘러주니
이 기이한 소식을 어떻게 님께 전할까
-〈시의 정원〉 전문
위의 시를 하나의 메타포로 해석해 본다. 화자에게는 여러 꽃씨들이 있다. “오래된 씨앗들을 버리기 어려워” 마음의 “뜰 한켠에 묻었”더니 “금강초롱” 뿐만 아니라 “들꽃”이 피어 〈시의 정원〉을 이루었다. 금강초롱은 기품이 있는 꽃이다. 연한 남보라색으로 종처럼 생긴 모습이 얼마나 고귀하고 은은한지. “들꽃”의 이미지 또한 잔잔한 아리따움에 공감이 간다.
씨앗을 “뜰 한켠에 묻”는 동안 화자는 마음을 갈고 닦았을 것이다. 수련을 하는 동안 욕심을 내려놓고 지혜를 터득했을 것이다. “나팔꽃, 봉숭아, 채송화에 민들레”는 시를 비유하는 기표들이겠다. 시는 매력적이고 아름답지만 슬럼프에 빠져 아득할 때가 있다. 어쩔 수 없는 절벽 앞에서 느끼는 한계가 있다.
여기서 “금강초롱”을 화자의 분신으로 “님”은 절대가치의 이상향으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화자는 자신의 욕망을 현실에서 이루고자 하나 마음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욕망을 현실에서 이루기 위해, ‘금강초롱’이라는 대체를 내세워 “님”께 헌화하고 싶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시대의 〈헌화가〉를 창조한 것이다. 신라시대의 노래가 노인을 주체로 비유하였다면 여기서는 화자가 “님”께 전하고픈 주체가 되고 있다.
‘꽃’은 현실적 욕망의 구현이다. 다시 말해 화자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문학적 성취를 뜻한다. 이 시에는 세계의 아름다움과 존재의 욕망, 현실과 이를 넘어서는 내용이 쉬운 표현으로 담겨있다. 즉 세계와 존재, 문학이라는 예술의 기본이 단순하면서 담담하게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화자는 왜 유독 신라시대의 ‘수로부인’처럼 꽃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감탄”할까. “시절이 다하기 전에 후광을 둘러”주기까지 어떤 과정들을 겪었을까. 다음의 시는 성찰을 실천해 보인다.
어느새 너무 길었군
목덜미까지 내려온 머리카락
잘라야 할 때를 지나친 머리칼은 머리칼이 아니지
불 꺼진 창 같은 거야
참한 가위를 찾아서 끊어낸다
툭 툭 깊은 우물 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하늘에 걸었던 삭은 동아줄
-〈싹둑싹둑〉 전문
이 시에는 자기절제의 단호한 정신이 담겨 있다.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시적 발상을 한 것 같다. 화자는 때가 되면 머리카락은 잘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 꺼진 창”처럼 소용이 없기 전에 자발적으로 단절해 버리는 내면에는 “하늘에 걸었던 삭은 동아줄”의 아픔이 있다. “하늘”을 앞의 예시에 있어 “북쪽”이나 “님”처럼 외롭고 높고 머나먼 이상세계로 짐작해 보다가 괜히 스산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삭”은 것을 어쩌랴.
돌이켜 보면 오늘날의 우리는 상당히 순리를 거스르며 살고 있다. 하늘을 찌르는 고층 빌딩에 고소득과 고이윤을 좇고, 기를 쓰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분주하며 성취에 조바심을 내지만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 작은 성찰의 씨앗 하나 품기 어렵고 자신의 성에 유폐되기 쉽다. 화자 역시 “하늘”에 “동아줄”을 걸고 고개를 위로 향하고 살았나 보다. 남과 다투며 빨리 오르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하다 보면 사는 게 지옥이다. 그런데 반어적으로 인간사의 지옥은 시의 낙원이겠다. 시기와 질투가 얼룩지고 탐욕과 비리가 들끓어 병든 세상의 상처를 꽃으로 승화하는 이들이 바로 시인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걸었던” “동아줄”에 주목해 본다. 삶이라는 “우물”을 배경으로 무한한 자유를 꿈꾸지만 현실적으로 생활을 따라야 하는 답답함이 그려진다. 드넓게 펼쳐진 무한한 공간, 방향과 거리도 공활한 절대의 세계를 향하는 화자를 헤아려 본다.
도달할 수 없는 자유, 현실의 한계를 초월할 수 없는 욕망은 화자에게는 해결이 불가능한 인생의 소망이다.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지며 도달할 수 없는 신화적 공간이라면 ”우물“은 현실적 공간이다.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과, 치명적인 위험이 있더라도 실현 가능한 욕망으로 서로 대비된다. 화자의 욕망이 변화하는 과정은 다음의 예시들에서 관찰되듯 반전하며 섞여있다.
가)
예전엔 한 슬픔 했었네 슬퍼하다 그친 적은 없었네
(중략)
키가 크고 주먹이 세지고 머리가 굵어지고 목울대가 단단해졌네
그것이 생명을 누리는 찬란한 한때의 일이었음을 그때는 몰랐네
슬픔이 생에 찍어놓은 화인들도 이제는 희미해지네
커다란 슬픔도 쉬이 지나가네 아름다운 싸움을 벌일 수 없네
-〈슬픔을 끝까지 슬퍼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하여〉 부분
나)
(전략)
머리칼이 곤두서는 서해대교 위에서 이승의 운전대를 꽉 잡고
안개에게 묻는다
어느 생에서 왔냐고 원하는 게 뭐냐고, 하얗게 얼어서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모르고 귀환한 밤, 잠속에서 듣는다
눈이고 비이고 바람이고 허공이며 침묵인 것
그 가운데서도 눈빛이고 기척이며 숨결이고 고진한 것
애련하다, 운전대를 놓치고 살벌한 꿈의 미궁으로 떨어진다
-〈안개〉 부분
가)에서 화자의 삶은 치열했다가 한 풀 꺾인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예전엔 한 슬픔”하면 “슬퍼하다 그친 적은 없”이 “키가 크고 주먹이 세지고 머리가 굵어지고 목울대가 단단”할 정도였지만 지금은 격한 행동이 멈추었다. “슬픔이 생에 찍어놓은 화인들도 이제는 희미”할 정도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오히려 “그것이 생명을 누리는 찬란한 한때의 일이었”다고 회상하는 심정이란. “커다란 슬픔도 쉬이 지나”고 “아름다운 싸움을 벌일 수 없”는 경지는 좋을 수도 있지만 어쩐지 적막하다.
나)의 화자는 운전하면서 서해대교를 지나고 있다. 안개가 잔뜩 끼어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인생이 막막하고 의문스럽다. 그래서 “어느 생에서 왔냐고” 질문을 던진다. 여전히 생은 “눈이고 비이고 바람이고 허공이며 침묵”처럼 느껴진다. 가)의 시가 가열차게 살다가 집착의 끈을 내려놓았다면 나)에서는 다시 “안개”와 같은 “미궁”이다.
이렇듯 이번 박진숙의 신작시들은 욕망을 내려놓은 듯이 보이다가도 미궁으로 빠지는 경향이 겹쳐 있다. 문득 연꽃이 연상되고 상처가 더 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더러운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화처럼 퇴적물이 발효하는 과정 속에 박진숙의 시가 놓여있다. 추하고 흉한 세태에서 귀하고 아름다운 생의 본질과 의미를 찾는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번 신작시 5편은 깨달음의 노래이면서 알 듯 모르겠는 수수께끼 같은 생의 번뇌를 살피는 시편들이다. 통찰을 기반으로 성숙과 우아함을 동반하면서 시인 자신이 진경산수화의 꽃이다. 언어의 절제와 압축을 통하여 여백의 효과는 물론, 시적 의미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는 여러 속성들이 어우러지면서 삭힘의 과정을 거쳤다는 의미한다. 이렇게 이 시대의 〈헌화가〉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감상하고 해석할 수 있다.
박수빈 ----------------------------------------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 활동, 《열린시학》 평론 등단, 시집 《청동울음》, 평론집 《스프링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