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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인간과문학 2014년 여름호, 권두에세이·길 밖으로부터의 사유 ①] 경계境界, 또는 앉은부처꽃을 찾아서 / 임승빈

신아미디어 2015. 3. 3. 08:44

"오늘 나는 그렇게 경계를 섰다. 그곳은 내가 늘 다니던 길 밖이었다. 문득 돌아보니 지나온 곳엔 낙목한천落木寒天 찬바람에 펄펄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죽음의 신 하데스의 입장에서 거기는 무사와 안일의 평온이었다. 고개 돌려 다시 본 내 앞길은 이제 막 부산한 생명들의 움직임, 하데스의 입장에서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봄이었다. 그 한가운데를 나는 온몸을 휘감아 도는 긴장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두려움과 기대를 함께 한 정녕 외로운 자리였다."

 

 

 

 

 

 

 

 경계境界, 또는 앉은부처꽃을 찾아서         임승빈

 

   잠결에 문득 빗소리를 들었다. 꿈인가 했는데, 아침에 보니 이팝나무 가지가 온통 물빛이다. 내 잠결을 소리로 찾아왔던 비가 이팝나무에게는 물빛이었다.
   올핸 유난히 봄이 이르다. 무심천 벚나무들은 벌써 탱탱해진 꽃망울로 온통 붉은 빛이다. 금방이라도 무수히 흰 꽃을 터트려 날릴 기세다.
   앉은부처꽃을 찾아 가는 길이다. 눈 속에 피는 꽃이니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앉은부처꽃을 만나러 간다. 자생지가 가깝기도 하지만, 눈 속에 핀 꽃을 보면 새삼 그 어떤 긴장감이 내 몸을 휩싸고 도는 때문이다.
   앉은부처꽃은 별칭이다. 원래 이름은 앉은부채꽃이다. 그러나 나는 앉은부채꽃이라는 원래 이름보다 별칭인 앉은부처꽃으로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무생물인 부채가 앉아 있다는 것보다 부처가 앉아있다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생김새가 영락없이 부처님이 앉아계신 모습이다. 짙은 자갈색의 꽃받침도 끝이 뾰족한 게 꼭 광배의 형상이다. 그리고 그 꽃받침 속에는 끝이 동그란 원통형의 작은 꽃대가 서 있는데, 그 동그란 머리 부분에 아주 작고 노란 꽃들이 무수히 피어있어, 그것이 꼭 부처님 머리 위의 나발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전체적인 형상이 타오르는 광배를 배경으로 무심無心에 잠겨 앉아계신 부처님처럼 보이는 것이다.  
   산성고개를 넘는데 가로수로 늘어선 벚나무 가지들이 온통 흰 눈이다. 그렇구나. 어젯밤 내가 사는 곳에서는 비가 왔는데, 산에는 눈이 내렸던 거구나. 햇살에 녹아 물기 머금은 눈이 시도 때도 없이 내 머리와 어깨 위를 툭툭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나는 경계에 서 있었다. 도시와 산의 경계, 하늘과 땅의 경계인 고갯마루에서 계절적으로는 겨울과 봄의 경계에 서 있었다. 햇살 눈부신 3월 어느 아침 벚나무그늘에 서서 기분 좋게 서늘한 눈과 비를 동시에 촉감하고 있었다.
   경계는 사실 얼마나 두려운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두려움 속에는 동경의 마음 또한 없지 않다. 그러니까 경계는 이전의 자기 자신과 안일을 부정해야 하는 고통과 함께 새로운 자신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경계의 자리가 나에겐 안일한 일상으로 해서 언제나 아득히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경계가 아니면 어떻게 새로울 수 있는가. 어떻게 시가 가능할 수 있는가. 경계는 이제까지의 끝이면서 동시에 다시 새로운 시작이 아닌가. 모든 경계란 관습과 안일의 밖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개성과 창조의 문이 아닌가. 그러니까 매년 내가 앉은부처꽃을 보면서 느꼈던 그 긴장은 그 경계의 자리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주는 긴장이었다.
   앉은부처꽃은 이깔나무와 자작나무 숲 속에 있다. 이깔나무 숲이 더 가깝고, 자작나무는 조금 더 먼 거리에서 언뜻언뜻 흰빛이다.
   벌써 여기저기 앉은부처꽃이 한창이다. 어떤 것은 혼자, 어떤 것은 두세 포기가 함께 위험하게 쓰러져 있는 이깔나무 밑에, 쬐그맣게 새잎을 틔우는 국수나무 그늘에, 느닷없이 환한 초록빛 산유리누에나방고치 옆에 피어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온 세상이 고요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계신 수많은 부처님을 의식하는 순간, 앉은부채꽃이라고 할 때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고요가 천지에 가득 가득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요는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조용한 것이 곧 고요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폭풍 전야의 고요이면서 동시에 폭풍이 막 지나고 난 직후의 고요 같은 것이다. 그냥 조용한 것이 아니라, 팽팽히 긴장된 고요이다. 여름날 이 숲속을 떠나가라 울어대던 매미소리가 지금은 들리지 않지만, 이 숲속 모든 나무들의 속을 가득 채워 울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고요인 것이다.
   또한 이 고요는 귀로만 느낄 수 있는 고요가 아니다. 건너편 산기슭 밝은 햇살을 눈으로 느끼듯 앉은부처꽃의 부처님을 눈으로 느끼는 고요이고, 눈을 감아도 목덜미를 감도는 그 서늘한 감촉으로 느낄 수 있는 고요인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갑자기 고요를 생각했을까. 왜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부처님의 무심을 고요라고 생각했을까. 왜 그 고요를 폭풍 전과 후의 경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순간 여기저기 심심찮게 쓰러져 있는 이깔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이깔나무는 뿌리가 유난히 얕다. 그래서 폭풍 속에 쉽게 쓰러지고 만다.
   왜 그럴까. 모든 생명체는 어떻게든 스스로를 위해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쉽게 적응하는데, 적응할 수 있도록 진화하는데, 저렇게 무성한 숲을 이루고도 왜 이깔나무는 저토록 쉽게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직도 이깔나무는 적응 중인가.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중인가. 그렇게 이깔나무는 적응을 위해 지금도 새로운 경계를 살고 있는가.
   오늘 나는 그렇게 경계를 섰다. 그곳은 내가 늘 다니던 길 밖이었다. 문득 돌아보니 지나온 곳엔 낙목한천落木寒天 찬바람에 펄펄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죽음의 신 하데스의 입장에서 거기는 무사와 안일의 평온이었다. 고개 돌려 다시 본 내 앞길은 이제 막 부산한 생명들의 움직임, 하데스의 입장에서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봄이었다.
   그 한가운데를 나는 온몸을 휘감아 도는 긴장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두려움과 기대를 함께 한 정녕 외로운 자리였다.

 

 

임승빈  -----------------------------------------------------

   《월간문학》 신인상 시부문 당선(1983),  시집 《흐르는 말》 등 다수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