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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2월호, 사색의 창] 성자聖者가 된 친구 - 강명량

신아미디어 2015. 3. 2. 18:43

"섬기는 자세가 어떤 건지 몸소 보여준 친구와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하는 그의 아내가 내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조그만 일에도 호들갑을 떨며 우는소리 잘하는 나 자신과 비교하면 그들은 참 큰 어른이란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고 나서 그 친구가 과분한 대우에 고맙고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던데, 나야말로 부부의 신의를 일깨워준 그들 부부가 값진 선물처럼 고맙고, 그가 내 친구라는 게 정말이지 자랑스럽기만 하다."

 

 

 

 

 

 

 

 성자聖者가 된 친구       강명량

   남자 동창이 불쑥 전화해서는 경주에서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한다. 가족 여행을 하려는데, 휴가철이라 어디라도 숙소 예약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호텔을 알아봐 줄까 물으니 굳이 우리 병원에서 자고 싶다고 한다. 한옥 온돌방이 오래 외국 생활을 한 그 집 애들에게는 아무래도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언제 가족이 한 이불을 덮고 잘 기회가 있겠냐 싶어 흔쾌히 오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이십 년 넘게 온갖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그의 아내가 이번에 뇌종양 판정을 받았는데, 수술을 받기 전에 마음을 추스르려 여행을 계획했다고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가족을 만난다는 게 나로서는 좀 두려웠고, 그의 아내 입장에서도 처음 보는 내게 자신의 아픈 모습을 드러내는 게 썩 내키지 않을 거로 생각하니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자식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린 그의 아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골다공증으로 척추 일곱 마디가 내려앉았다더니 키가 초등학생만 하다. 최근에 쿠싱증후군이란 병에 걸려 팔다리가 점점 가늘어지며 배가 불러와 제 힘으로 혼자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똑바로 바라보기도 민망할 정도였지만 거짓말처럼 얼굴은 너무 멀쩡해 환자 같지 않았다. 내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목소리가 뜻밖으로 힘차고 밝아 깜짝 놀랐다. 내가 지레 겁먹은 것과는 달리 그녀와의 대화는 자연스러웠고, 그녀가 내 고등학교 2년 후배라는 걸 알고 나서는 분위기가 사뭇 화기애애해졌다. 그녀는 장시간의 수술을 이겨낼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상태라 척추 수술을 포기하였다는데, 마약성 진통제도 듣지 않아 척추에서 삐져나온 신경이 눌려 돌아누울 수조차 없는 통증을 그대로 견디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쿠싱증후군의 원인이 뇌종양 같다고 의사가 다시 정밀검사를 해본 후에 제거 수술을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야말로 입만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 입으로 지금까지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병든 자신을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 써주셔서 행복하다고 신앙 고백을 하는데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그동안 남편이 지극 정성으로 자신을 돌봐주지 않았더라면 살지 못했을 거라고 몇 번이고 고맙다면서 슬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여자에게 그다지 자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속으로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겉으로는 오히려 무심한 편이었다. 훤칠한 외모에, 못 하는 운동이 없고, 통기타를 튕기며 노래도 곧잘 했지만, 결정적으로 말주변이 없고 고지식해 여자들에게 별로 인기는 없었던 것 같다. 대학 내내 어울려 다녔어도 헤어질 때 손을 흔들며 돌아서면 그뿐으로 나는 정말 그를 친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어쩌면 그도 나를 여자로 보는 게 아니라 편하게 치댈 수 있는 제 누이 정도로 여겼던 게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철딱서니 없이 저도 결혼한 처지에 남편이 있는 내게 아무 생각 없이 전화해서 얼굴 좀 보게 나오라고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그는 종교적이거나 헌신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입신출세를 꿈꾸던 그 또래의 보통 남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모가 바라는 대로 법대에 들어가 졸업 전에 행정고시에 합격했고, 관운이 좋았던지 1급 공무원이 되기까지 승승장구했다. 그것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내가 알고 있던 그 친구가 아닌 것 같다. 내가 정말 그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걸까.
   교통 사고 이후 미국으로 발령이 나서 가 있는 동안에도 그의 아내가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병원비가 비싸 나흘 만에 퇴원을 하였는데, 돌봐줄 사람이 하나 없어 아침마다 아내의 수술 부위를 직접 소독해 주고 출근하는 등 손수 병시중을 들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퇴직해서 좀 자유롭지만, 공직에서 바쁘게 일할 때도 아내를 위해 될 수 있으면 퇴근 후에 다른 약속을 하지 않았다는 그는 요즘도 주일에는 아내를 안아서 차에 싣고 교회를 다니고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는데, 한두 해도 아니고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아내에게 봉사하며 참고 살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도 믿을 수 없었다. 같이 아침 식사를 하는 중에 아내가 아프니까 자연히 자신의 주식은 빵과 우유라며 이렇게 맛있는 밥을 먹어본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투 어디에도 투정이나 원망이 없었다. 자신의 고통을 위로받고 싶어 옛 친구를 찾아온 줄 알았더니 그런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이 아내에게는 너무 위험한 수술이라 고비를 잘 넘길지 그것만이 오로지 그의 관심사였다. 착하고 반듯한 사람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얄미울 정도로 제 속을 내비치지 않는 그는 그동안 진짜 바보가 아니면 성자聖者가 된 모양이다.
   “아이고, 장하고 기특해라.” 헤어지면서 장난 삼아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더니,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 나서 곁에 있던 그의 아내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녀도 나를 마주 안으며 잊지 않고 죽기까지 기도하겠노라고 하였다. “죽기까지가 뭐야? 살기까지 해요.” 하고 내가 농담을 하니까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그래요. 살기까지 할게요.” 하며 웃었다. 섬기는 자세가 어떤 건지 몸소 보여준 친구와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하는 그의 아내가 내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조그만 일에도 호들갑을 떨며 우는소리 잘하는 나 자신과 비교하면 그들은 참 큰 어른이란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고 나서 그 친구가 과분한 대우에 고맙고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던데, 나야말로 부부의 신의를 일깨워준 그들 부부가 값진 선물처럼 고맙고, 그가 내 친구라는 게 정말이지 자랑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