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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인간과문학 2014년 봄호, 수필] 세뱃돈 - 윤영남

신아미디어 2015. 2. 14. 09:19

"사랑은 그 눈물만큼 젖은 가슴에 동동 뜨는 식혜의 밥풀처럼 모성애의 실체다. 제대로 삭혀진 단물이 되고도 입 안에 남아 씹히는 알맹이의 관계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단순한 세뱃돈이 아닌 그녀의 아들에게 도박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랑의 묘약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 세뱃돈은 새해의 소망이 담긴 모성애의 절실한 기다림. 비로소 그 모습은 아름답다 말하고 싶다."

 

 

 

 

 

 

 세뱃돈        윤영남

 

   ‘사랑하는 것보다 기다림이 더 아름답다’고 시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쓴 시의 한 부분이라도 언제나 절절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희로애락의 매 순간마다 누가 그렇게 아름답다 하겠는가. 하지만, 어느 때는 아린 사랑이나 따스한 이별도 아름답게 가슴에 남겨질 때도 있다. 아름답다는 것은 뜨거운 열정일 수도 있겠지만, 슬프고 애절한 감정도 진솔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설날을 기다리는 마음에도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다. 한 해를 맞이하는 새 마음에 서로의 사랑과 추억을 심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또한 명절에 만나고 싶은 반가움과 나누고 싶은 얘깃거리도 있겠다. 그 중에는 세배를 받는 보람과 세배를 하는 기쁨도 깃들어 있을 것이다. 서로에게 새해를 맞으면서 축복하고 기원하는 마음의 표현이 세배가 아닐까.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세배보다도 세뱃돈에 더 관심과 부담이 생겼다. 그래서 설날과 세뱃돈은 분리할 수도 없었다.
   어린 시절에 설날이 다가오면 내가 세배할 사람을 손꼽아 보았다. 그 중에도 머리만 쓰다듬어 주면서 덕담을 하시던 분들도 있지만, 동전을 나눠주시던 친척들도 있었다. 웬만한 어른들은 동전보다는 지폐를 쥐어주시며 넉넉한 사랑을 듬뿍 안겨주셨다. 특히, 이모부와 고모부 혹은 형부나 삼촌처럼 크게 인심을 쓰셨던 분들의 감동어린 기억이 오래 남았다. 어린 나 역시 두둑하게 세뱃돈을 주실 그 분들을 마음속으로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세배를 하던 아이가 자라서 세배를 받는 어른이 되었다. 흘러온 시간의 강물이 너무도 가파르게 줄달음쳤나 보다. 그렇다고 준비 없이 세배를 받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던 고사리 같은 손을 모으고 세배를 할 텐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를 할까. 며칠 전부터 은행에서 새 돈을 바꾸기도 했고, 봉투의 겉과 속에 붓으로 덕담을 적기도 했다. 그 해에 그들이 바라는 소망과, 내가 그들에게 하고 싶은 간단한 덕담의 문장이지만, 요약하며 맘껏 즐거웠다. 해를 거듭할수록 아이들이 자랐고, 세뱃돈의 액수도 증가되었다. 그 나이만큼 기대감도 액수에 비례했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벌써 부모가 되었다. 그들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으니, 우린 당연히 할머니와 할아버지로서 세배를 받게 되었다. 색동옷 입은 손자와 손녀들을 보면서 감회에 젖었다.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하면서 세대교체의 거창함보다 순리에 따르고자 평온함을 얻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내 자녀들에게 쥐어주던 액수보다 손주들에게 전해 준 세뱃돈엔 의미를 더욱 새롭게 부여하고 싶었다. 포옹하며 볼에 입맞춤하고, 또 안아주면서 고맙다는 응답을 온 몸으로 응답하는 녀석들에게 무엇이 아까우랴. 인색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액수의 절제는 필요했다. 그들의 나이만큼 환산하고 수용할 수 있을 것을 믿으면서….
   얼마 전, 세배를 받지는 못했지만 세뱃돈을 송금했다는 친구의 절절한 얘기를 들었다. 사연을 다 들을 수 없도록 화가 치밀어 전화를 끊고 말았다. 인터넷 도박으로 잘못된 습관을 들인 서른 살이 넘은 친구네 아들의 얘기였다. 몇 년을 부모 애간장을 태우던 그 아들의 얘기가 얼마나 가슴을 아리게 했는지. 설날을 앞두고 많은 친척들이 다녀갔어도, 그 아들의 방문은 굳게 잠근 상태로, 불러도 묵묵부답이었단다. 식사도 거른 채 식구들이 잠든 사이에 슬쩍 요기를 면하기는 했어도, 어미의 마음은 애간장이 녹았다는 것이다. 정말 그 마음이 녹고 삭아서 형체라도 남았을까. 부모와 멀리하고 잠적하고 싶은 그 아들의 심리상태를 어찌 모르겠는가. 자존감이 바닥을 쳤을 것이다. 가족을 기피하고 싶은 심정이 명절엔 방문을 걸고 두문불출하고 싶었기에, 어찌 어머니에게 세배를 드릴 마음인들 있었겠는가. 안타까웠다. 어느 정도의 짐작은 되었다. 살다보면, 그 누구라도 보고 싶지 않은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 부부도 삼남매를 키워서 모두 결혼을 시켰다. 고만고만하게 잘 살아주니 고마웠다. 귀여운 손주들을 조롱박처럼 안겨주었으니 더욱 고맙다. 후손들에게 세배를 받는 기쁨이 컸지만, 왠지 올 설에는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친구의 말에 공감을 보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기에 더욱 그렇다. 더구나 변화무쌍한 현실에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자손들이 많이 생길수록 조심스럽다는 생각이 앞선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내게만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늙을수록 늘어나는 것이 염려와 걱정이라더니, 친구의 전화 내용이 계속 젖은 목소리와 함께 내 가슴에 시린 여운을 남겼다.
   아들의 닫힌 방문만 보면서 설날을 보냈을 친구의 마음으로 되돌아가 본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조차 뜻 모를 이야기처럼 가슴이 젖는다. 세상의 어머니로서 젖지 않은 가슴이 어디 있으랴. 슬퍼서 울고 기뻐서 우는 어머니의 눈물일 것이다. 그 친구는 아들에게 세배는 못 받았어도, 어미마음의 덕담과 기도를 전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세뱃돈을 보낸다는 이메일과 함께 우편으로 송금했다는 그녀의 말끝은 흐린 날의 오후처럼 갈피를 잡지 못해 흔들렸다. 젖은 모성애가 전선으로 흘렀다. 명절이 지난 뒤지만, 내게도 세뱃돈의 의미가 더 새롭게 느껴졌다. 중첩된 뜻은 단지 돈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절절한 모성, 그 자체였으니까.
   그 어머니는 세뱃돈이란 명분으로 아들에게 모성의 끈을 간곡히 흔들며 구호하듯 간구했을 것이다. 아직도 널 포기하지 않았다는 엄마의 특별한 고백이요, 사랑의 표현이리라. 그 친구도 상당한 교육을 통해서 ‘도박 중독자에게 돈은 곧 독약 같은 것’이라는 걸 모를 리 없다. 중독이란 습관이 무서운 탓이다. 땀 흘려 벌지 않은 돈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돈을 주지는 않았겠지만. 눈 감기 전에는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처절한 사랑을 어찌하겠는가.
   세뱃돈이라는 명목으로 “엄마의 마음을 전해줄 수 있는 설날이 있어서 다행이다” 는 친구의 큰 사랑이 부러웠다. 그 하소연조차 들어주고 수용하지 못한 옹졸한 내가 아닌가. 며칠 지날수록 나의 옹졸함이 부끄럽다. 처절한 현실 앞에서 슬픔을 삭혀내는 친구를 생각하면, 마치 식혜를 만들 때 동동 뜨는 밥풀이 연상되었다. 살짝 뭉개보면 쌀알이 껍질만 남은 채 삭혀진 밥풀이 아닌가. 그 밥풀이 오래 삭고 녹아내린 물이 식혜의 맛을 돋운다. 그것은 엿기름에 삭아서 자기의 몸체만 남은 식혜의 밥풀. 결국 그 물에서만 찐득하면서 신비스러운 식혜의 오묘한 단맛을 맛볼 수 있으니까.
   정녕, 내가 얼마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기다릴 수 있는 존재이며, 그 인내로 아름다움을 승화시켰던가. 제대로 기다림의 미학을 익혀내지도 삭혀내지도 못했다. 누구보다도 매사에 더욱 조급했고, 기다려 보지도 않았다. 그 기다림을 사랑이라고 할 만큼 처절한 삶을 살아내지도 못했다. 더구나 아름답다는 표현을 함부로 쓸 정도의 시를 쓸 자격은 더욱 모자람을 알 수 있다. 아니 자격 상실이라는 말이 타당할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말은 음성 언어로 순간적이지만, 글은 문자 언어이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매체가 아닌가. 지금부터라도 작은 여유로 큰 그림을 그리며, 큰사랑으로 한 해를 보내고 싶다. 아무리 큰 사랑도 작은 가슴으로부터 감동의 물결이 출렁이는 순간부터 가능하리라.
   설날이 오면 으레 세배를 드렸고,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한 해를 어떻게 잘 보내고, 맞이하는 것에 대한 기다림과 설렘을 간과하며 소홀하지 않았던가. 이번 설날에는 자신을 되새겨 보았다. 누구나 세배할 때, 절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어른을 공경하지만, 절을 받으면서도 후손들을 귀히 여겨야 하겠다. 물론 두툼한 세뱃돈으로 그들의 마음을 풍선처럼 부풀게 할 수 있으리라. 소중한 마음이 담긴 덕담을 적어서 귀감을 삼도록 해도 좋으리라. 무언중에 진실이 교통하는 마음으로.
   오죽 자식을 사랑했으면 그토록 주고 싶은 돈이었겠는가. 그녀는 전문가들의 상담을 통해서 그것이 독이 되지 않기 위해 설날에 세뱃돈이란 명목으로 아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친구의 사연을 통해서 또 다른 삶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했다. 이젠 친구가 아들에게 받지 않고도 줄 수 있었던 그 따스함과 넉넉함도 배워두고 싶다. 무엇보다도 그녀와 그 아들에게서 큰 사랑의 동기부여를 받고 싶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 어머니의 기도는 기적의 통로가 될 것을 더욱 확신하기에.
   사랑은 그 눈물만큼 젖은 가슴에 동동 뜨는 식혜의 밥풀처럼 모성애의 실체다. 제대로 삭혀진 단물이 되고도 입 안에 남아 씹히는 알맹이의 관계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단순한 세뱃돈이 아닌 그녀의 아들에게 도박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랑의 묘약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 세뱃돈은 새해의 소망이 담긴 모성애의 절실한 기다림. 비로소 그 모습은 아름답다 말하고 싶다.

 

 

 

윤영남  ------------------------------------------

   경북 문경 출생, 숭실대학교 평생교육학 박사. 교수, 《월간문학》에 수필, 《좋은문학》에 시로 등단, 국제펜클럽, 한국문협,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강동문학회 부회장, 저서로는 《또하나의 시작을 위하여》, 《멈추고 싶은 순간들》, 《관계》, 《시와 수필》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