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2월호, 제160회 신인상 수상작] 하늘빛 열차 - 이기식
"하루하루 만날 날이 가까워져 온다. 오늘이 나머지 인생의 첫날이다. 이제 와서 내가 잘못됐다고 반성한다는 것이 부끄럽다. 그러나 내세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나, 나머지 인생을 부끄럽지 않게 보내야겠다고 다짐한다. 어두워진 역에 나가 본다. 건널목에 가까워져 오자 ‘댕댕’ 소리를 내며, 차단기가 내려져서 앞을 막는다. 때가 되면 내가 타고 갈 열차가 올 것이다. 오면 안다. 해후할 것이다. 만나면 옛날처럼 입가로 미소를 지으면서, “이제 오네…….”라고 싱긋이 웃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주 나눴던 프랑스 영화 이야기나 뮤지컬, 블랙 코미디 이야기를 신이 나게 하고 싶다."
하늘빛 열차 - 이기식
언제부터인지, 저녁이 되면 역으로 나가보는 버릇이 생겼다. 역은 열차들이 바쁘게 여러 목적지로 떠나기도 하고, 또 여러 곳에서 오기도 하는 곳이다. 그중의 하나는 틀림없이 외길로만 계속 도는 순환열차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열차는 어두워지면 이 역에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생명을 싣고 오기도 하고, 또 다른 생명을 건너편 피안으로 데려가는 하늘빛 열차이다.
역에는 항상 기다림이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누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떠나 보내기 하고, 또 내가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기다리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릴 때도 있다. 삶의 많은 부분이 기다림으로 이뤄진 것 같다.
어릴 때는 소풍 가는 날을 기다리고, 새해를 기다리고, 젊어서는 애인을 기다리고, 결혼하고 나서는 태어나는 아기를 기다린다. 즐겁고 행복한 기다림이다. 그러나 기다린다는 것이 불안하고, 두려울 때도 있다. 방학이 끝날 때까지 놀기만 하느라고 숙제를 안 했을 때의 불안함, 각종 입학시험 결과를 기다릴 때의 두려움, 그리고 커서는 부모들의 임종을 맞는 기다림 등이 그렇다.
때로는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가진 기다림도 있다. 먼저 가서 기다려야 마땅했던 기다림을 나의 잘못과 소홀함 때문에 자식이 먼저 가서 나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만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간절히 만나고 싶은 설렘이기도 하다.
철길 주변이 개나리꽃으로 온통 둘러싸여, 가로등 색깔마저 노란색으로 번져있던 따뜻한 4월의 어느 날 밤, 하늘빛 전차는, 우리의 품에 아들 준호를 안겨주었다. 까만 눈으로, 시선을 피하지도 않은 채, 제 아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조그맣고 앙증맞은 손에 내 손가락을 대보았다. 꼭 잡고 놓지를 않았다. 나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전혀 예기치 못하게, 우울증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20여 년간을 시달리기만 하다가 부모 곁을 떠났다. 유머 있고, 씩씩하고, 정말로 믿음직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불면증을 동반한 우울증 때문에 미칠 것 같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기에, 나으려고 죽을힘을 다하여 모든 시도를 다했다. 옆에서 보는 것이 너무나도 애처롭고 안타깝기만 했다.
이름 있는 병원, 의사들을 정신 없이 찾아다녔다. 아마 먹은 약만도 몇 트럭분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본인은 나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에, 책상 앞에 구부리고 앉아서 시간 맞춰 그 많은 약을 불평 없이 먹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어서 제 어머니가 “준호야, 너는 웃는 모습이 정말 멋져!”라고 말하면 아픈 중에도 입꼬리를 올리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고 나서 힘없이 물었다. “나, 낫는 거지…….” 하고. 도대체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를 몰랐다. 무관심한 신들을 원망했다. “하느님, 왜 내 아들을 버리시나이까!”라는 말만 되뇌면서 주위에 있는 절, 교회를 찾아다녔고 성당에서 영세도 받게 했다. 그때는 병만 나을 수 있다면 어느 것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 날은 아주 신통한 무당이 있다기에 찾아갔었다. 평소 같았으면 안중에 두지도 않았을 성격이었지만 아들의 병이 깊어만 가니까 성큼 따라 나섰다. 무당의 말을 열심히 따라서 시키는 대로 했다. 커다란 체격에 두 손을 모으고, 진지하게 절할 때의 기대에 찬 슬픈 눈을 나는 그때 보았다. 그러나 희망의 등불은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개운開運’ 또는 ‘운명감정’이라고 쓰여있는 점집에 가보고 싶었다. 아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정말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가까운 부천에 있는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갔다. 한참 이야기 끝에, 나이 많은 점쟁이가 손으로 그린 것 같은 옛날 그림책을 어렵게 펴 보였다. 내가 저세상으로 갈 때의 그림인 것 같다. 그런데 옆에 있어야 할 상주의 그림이 안 보였다. 다시 한 번 눈여겨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그때부터인 것 같다. 마음 한구석에서, ‘만약 아들이 없다면…….’ 내가 자유스러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가 흠칫 놀란다. 가볍고, 얕은 내가 역겹고 또 한없는 비애를 느꼈다. 후에, 막연히 무엇인가를 더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그 점집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없어졌다. 근처 이웃사람들조차 그 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죄도 없고, 착한 사람이 괴로워하고 먼저 죽는 것이 전혀 이해가 안 되었다. 내가 크게 잘못했었다. 우울증이란 약만 먹고, 병원에만 다니면 나을 수 있는 일시적인 병이 아니란 것을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병원에만 데리고 다니면서 약이나 받아 먹이고, 무의미하게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지 말았어야 했었다. 오히려 누가 말한 것처럼, 비가 올 때 우산을 씌어주는 것보다 비를 같이 맞아주는 정신적인 도움이 더 필요한 게 이 병이었다는 것을 늦게야 알기 시작했다. 충분히 운을 바꿀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한 귀중한 생명을 이 세상에 더 머물지 못하게 만든 것은 이 초라하고 못난 아비였다.
4월 개나리꽃이 핀 어느 날 밤, 하늘빛 열차가 왔다. 강원도의 어느 절에 갔을 때 사준 卐자 목걸이를 손에 꼭 쥐고 떠나갔다. 열차 속이 따뜻하게 보였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면서 서서히 달빛 속으로 사라진다. 천국으로 가듯이.
하루하루 만날 날이 가까워져 온다. 오늘이 나머지 인생의 첫날이다. 이제 와서 내가 잘못됐다고 반성한다는 것이 부끄럽다. 그러나 내세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나, 나머지 인생을 부끄럽지 않게 보내야겠다고 다짐한다.
어두워진 역에 나가 본다. 건널목에 가까워져 오자 ‘댕댕’ 소리를 내며, 차단기가 내려져서 앞을 막는다. 때가 되면 내가 타고 갈 열차가 올 것이다. 오면 안다. 해후할 것이다. 만나면 옛날처럼 입가로 미소를 지으면서, “이제 오네…….”라고 싱긋이 웃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주 나눴던 프랑스 영화 이야기나 뮤지컬, 블랙 코미디 이야기를 신이 나게 하고 싶다.
이기식 ----------------------------------------------
과학자(컴퓨터), CIO
당선소감
‘당선소감’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아주 먼 곳에나 있는 꿈과도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저에게도 이것을 쓸 꿈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글과는 거리가 먼 나는, 가끔 문학지를 읽으면서, 당선소감을 쓰는 분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항상 궁금했습니다. 무척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있고, 또 모든 것을 깊고, 새롭게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고, 나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런 분들에게 조금 더 가깝게 갈 기회가 생겨 그지없이 기쁘고, 또 새로운 용기가 생겼습니다.
좋은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에게는 쓸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날은 용기가 나다가도, 또 어느 날은 형편없이 자신이 없어지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지금까지의 빈약했던 정신세계를 더 살찌우게 하면서, 후회했던 것들을 더 후회하고, 반성하는 새로운 인생의 기회로 만들려고 합니다.
≪수필과비평≫사와 심사위원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