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인간과문학 2014년 봄호, 작가 재조명 · 소설편/작품론] 작가 체험의 노만화魯漫化 혹은 휴머니티: 김용만의 〈늰 내 각시더〉- 유한근
"한국적 휴머니즘을 이 소설 〈늰 내 각시더〉는 총체적으로 나타낸다. 사회적 배경은 소설의 행간 속에 은폐하고, 마형사와 정태수 그리고 그의 가족과 추영감이라는 인물을 통해 타락한 사회의 타락한 형태로 인간성 회복이라는 휴머니티를 보여주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작가 김용만의 자연인으로서의 노만화, 그 하나의 발로라는 점에서 이 소설을 재조명하게 하고 주목하게 한다."
작가 체험의 노만화魯漫化 혹은 휴머니티 / 유한근
- 김용만의 〈늰 내 각시더〉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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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용만은 《현대문학》신인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소설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늦깎이 작가라 자부(?)한다. 여기에서 ‘자부’라는 언어를 차용한 것은 생업을 포기하고 창작활동에 전념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첫 소설집 《늰 내 각시더》(실천문학사 간행)를 출간하면서 자연인으로서의 삶의 특이성 때문에 주목을 받지만, “정통 단편소설 미학과 독특한 향토적 문체, 이념에 함몰되지 않는 휴머니즘으로 문단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며 문제 작가”로 주목받는다. 그리고 장편 《인간의 시간》(문이당 간행)과 장편 《칼날과 햇살》(중앙일보 간행) 등 장편소설의 쓰면서 대형작가로서의 역량을 보여준다. 그리고 소설집 《아내가 칼을 들었다》(랜덤하우스 간행), 《93한국문학 작품선》(문예진흥원 선정)과 문화관광부 선정 2010년도 우수교양도서로 《춘천옥春川屋 능수엄마》(JANA문학사 간행) 등을 발표하면서 다시 문단을 주목을 받는다. 또한 산문집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과 내 허튼소리》(랜덤하우스 간행)를 발표하면서 인문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면 그 가능지평을 연다.
나는 위에서 김용만 작가의 “자연인으로서의 삶의 특이성”을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그가 경찰관이었으며, 퇴직 후 장편소설 《춘천옥春川屋 능수엄마》의 공간적 배경인 ‘춘천옥’을 경영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는 의미이다. 물론 작가에서 있어서 작품에 대한 이해의 한 방법으로 작가의 전기적 배경을 고려함으로서 그 작품을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우리가 재조명하려 하는 〈늰 내 각시더〉. 이 소설에서는 그동안 저널적인 시각이 아닌 소설미학적인 측면에서 다시 탐색하려 한다. 그러나 소설은 작가 체험의 노만魯漫화라는 점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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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소설 〈늰 내 각시더〉는 200자 원고지 140매를 조금 넘는 분량이다. 단편 분량보다는 많고 중편소설 분량보다는 적다. 그러나 우리가 편의상 분류하는 중편 소설의 특성의 척도로 볼 때 이 소설은 중편이 아닌 단편소설이다. 메인스토리만 있지 서브스토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소설을 나는 단편소설의 미학이라는 국면에서 살펴보려한다.
〈늰 내 각시더〉는 마진구 형사와 죄인 정태수의 교도소 후송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을 스토리로 한 소설이다. 강릉 경찰서에서 서울 서대문 교도소까지가 그것이다. 이 소설 스토리의 공간이동 경로는 서대문 교도소 정문 앞 구멍가게에서 시작하여, 강릉경찰서 → 다시 교도소 앞 구멍가게 →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휴게소 → [회상] 강릉경찰서 → 평창휴게소 → [회상]마진구 형사의 고향 → 정태수의 재판정 → 마장동터미널 → 또 다시 교도소 앞 구멍가게에서 끝나게 된다. 메인 스토리는 강릉경찰서에서 서대문형무소까지의 라인을 설정하고, 거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따라 과거 회상으로 시간대를 교직하는 지그재그식의 구조를 이룬 단순한 구성 미학이다. 그러나 서두와 결말 부분은 변형된 원형적인 액자 구조를 갖는다.
마진구 형사는 다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일곱 시 사십분. 약속시간인 다섯 시를 이미 까마득한 과거로 밀쳐낸 시계 침이 여덟시를 향해 앙감질을 쳤다. 교도소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본 그는 정문을 뒤로 등지고 길 건너 구멍가게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머리칼처럼 가늘고 긴 저녁햇살이 그의 지친 발길을 휘감았다.
“면회 왔군 기래?”
마형사가 가게 안에 들어서자 주인영감이 궁통 맞게 물었다. 그의 말투 속에는 다분히 당신의 속내를 건드려보고 싶소 하는 맛깔스런 재미가 묻어 있었다. 두 시간 반이 넘도록 교도소 정문 근처를 서성대다가 이쪽으로 건너온 점퍼 차림의 사내가 수상쩍어 보였던 것이다.
“아닙니다. 누굴 기다리는 중인데…. 시골서 올라올 손님이거든요.”
말짱 거짓말이었다. 만약 형사가 압송하던 살인범을 길 도중에서 풀어주고 몇 시에 교도소 정문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그 해괴스런 비밀을 털어놓는다면 주인영감은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 위에 빙빙 동그라미를 그리며, 당신 혹 이렇게 된 것 아뇨 하고 놀려댈 게 뻔했다.
“하필 교도소 앞이디?”
주인영감이 또 곰파들었다.
- 〈늰 내 각시더〉 서두부분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마포교도소 정문 앞 슈퍼의 주인인 영감과 마형사의 대화로 이 소설의 사건 발단을 암시한다. 수감자 면회가 아닌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형사를 의혹해하는 주인영감. 마형사가 만나기로 한 사람과의 ‘해괴스런 비밀’ 토로가 독자를 흥미를 자극한다. 뿐만 아니라,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는 마형사의 지친 발길과 “머리칼처럼 가늘고 긴 저녁햇살”이 감각적 표현이 흥미를 고조시킨다.
또한 작가 김용만의 작가 이전의 자연인으로서의 삶의 하나의 형태였던 ‘경찰관’이었다는 정보를 아는 사람에게는 마형사의 인물 창조가 작가의 체험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여 흥미를 배가시킨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앞서 말한 바 이 소설의 구조 미학적인 국면에서 자세하게 살펴보려 한다.
바다 쪽 하늘에 숨통이 트인다 싶었는데 어느새 수평선이 붉은 햇뭉어리를 게워냈다. 태백 계곡은 아직 갈매 빛이었다. 그 어둠발이 서서히 녹아내리자 승객들은 정류장에 세워진 직행버스 주위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용변을 마친 그들 얼굴마다에는 초가을 햇살이 그들먹했다.
“차에 오르거든 곧바로 자네 손목에 연결수갑을 채우고 교도소 인계가 끝날 때까지 절대 풀지 말게. 똥은 뉘었으니 오줌은 함께 누도록 하고 수갑은 교도소에서 그쪽 열쇠로 풀도록 하게나. 죄수와 수갑 찬 게 불편하거나 남 보기 사납대서 풀어줬을 경우 그 실수가 가져올 결과를 상상해 보라구. 거기에 대한 처벌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자네가 잘 알게 아닌가. 더구나 사람 목을 철길에 매놓고 두 동강 낸 놈인데 만약 도주할 경우 문책이 서장 선으로만 끝나겠는가. 경찰의 삼대三大사고를 알지? 그 중 하나가 도주 사건 아닌가. 옛날 자유당시절 윤치영 장관이 한 말이 있네. 내 목을 이대통령도 함부로 못 자르지만 시골 일개 지서 순경이 자를 수 있다고 말야. 내가 자다 말고 나와 본 것도 그런 걱정 때문이네.”
- 〈늰 내 각시더〉 도입부분에서
이 부분은 강릉경찰서를 출발하여 서대문형무소로 상경하는 도중, 휴게소에서의 죄수 정태수와 마형사의 상황이다. 화장실 이용을 하기 위해서는 수갑을 풀어야 하는데 편의를 봐줄 수 없음을 강변하는 마경사의 입장이 드러난 부분이다. 이런 상황을 묘사하는데 작가는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휴게소의 풍경을 감각적으로 그린다. 숨통을 트이게 하는 바다 쪽 하늘, 붉은 햇뭉어리를 게워낸 수평선, 갈매 빛의 태백 계곡, 화장실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 그들먹한 초가을 햇살 등이 수갑을 찬 죄수 호송이라는 처참한 상황을 더욱 더 긴장하게 한다.
마형사는 자기 왼팔을 지그시 당겨보았다. 정태수의 오른팔이 아무 저항 없이 끌려왔다. 억지스런 작위, 형사와 죄수가 쇠고리로 얽힌 그 우스갯짓 같은 결박을 풀기 위해 그는 안주머니에서 살그머니 수갑 열쇠를 꺼냈다. 탈출사고를 걱정한 수사과장의 얼굴이 떠오르긴 하지만 망설이지 않고 열쇠를 풀어주었다.
출발하고부터 내동 입을 다물어 온 정태수는 겹으로 채워진 자기 오른쪽 손목에서 연결수갑이 벗겨져 나가도록 겨우 컥컥 헛기침을 뱉는 게 고작이었다. 그 헛기침은 비록 당신의 얼굴을 외면하고는 있어도 적개심을 품어서가 아니며 방금 수갑 하나를 풀어준 당신의 모험적인 결단에 감사한다는 정표였다.
정태수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마형사는 풀어낸 수갑을 서류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정태수의 시선을 따라 멀리 산비탈 쪽을 바라보았다. 화전민촌 너와집 지붕 위로 굴뚝 연기가 송글송글 피어올랐다. 그 연기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계곡으로 스며들다가 금새 안개 속으로 묻혀버렸다.
-〈늰 내 각시더〉 사건발단부분
이 소설의 본 사건이 발단되는 부분이다. 죄수의 수갑을 풀어준 마형사. 두 사람의 심리 묘사와 수갑을 풀어주는 상황 묘사가 돋보인다. 두 사람의 “억지스런 작위”, “컥컥 헛기침”을 뱉는 죄수 정태수의 모습, 그리고 “화전민촌 너와집 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 묘사를 통해 이미 이 소설의 결말은 예견된다. 마형사의 인도적인 행위가 해피엔드로 끝날 것임을 암시한다. 특히, 정태수의 인간성을 엿보게 하는 부분을 읽으면 그것은 확신으로 다가온다. “텅 빈 버스 안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다시 잔잔한 긴장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긴장을 풀어볼 양인지 정태수가 연결 수갑을 다시 채워달라며 두 손목을 내밀었다”라는 행위 묘사가 그것이다.
이러한 죄수와 호송경관의 긴장 완화는 정태수가 누님 댁에 다녀오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다시 긴장구조로 들어선다. 정태수가 누님에게 다녀오고 싶다는 요청이 그것이다.
“서울 누님 댁에 잠시 들렀으면 하고요. 언제 뵐지 몰라서….”
“누님이 교도소로 면회 오면 되잖아?”
“나다닐 수 없거든요. 위독한 상태시라….”
“어디가 편찮으신데?”
“온몸이 망가졌죠. 자살 미수로….”
정태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자살 미수?”
마형사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차마 캐묻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땀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태수는 맨손으로 땀을 훔치는 마형사에게 뒷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이걸로 닦으시죠. 누나가 보내주신 거예요.”
“그런 걸 내가 쓰면 되겠나?” 마형사는 고마움을 표시하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두툼하게 접힌 감촉으로 보아 보통 손수건보다 넓고 헝겊이 두꺼워 보였다. 얼굴에 대보니 감촉이 보드랍고 새물내가 설핏했다. 그 새물내를 맡자 마형사는 고향 추억 한 토막이 떠올랐다. 그가 울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였다. 한 마을에 사는 여자애와 자주 소꿉장난을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새물내 나는 치마폭을 들썩이며 마진구에게 “늰 내 신랑이더.” 하고 각시 행세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했다.
“빨갱이가 머꼬? 느그 어매가 낼보고 빨갱이 새끼라 카며 늬캉 놀먼 패직인다 캤다.”
- 제목 ‘늰 내 각시더’ 의 근거(?)부분
위의 인용문에서 “늰 내 신랑이더”라는 마형사의 고향 여자 친구의 말에서 이 소설의 제목이 차용된 것이 그것이다. ‘새물내 나는 치마’를 입은 한 마을 사는 여자애와의 추억을 이 소설에서 에피소드로 삽입한 것은 단순한 제목 때문이 아니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고 있는 ‘서대문형무소’ 시대, 혹은 시대적 배경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80년대의 남북간 극대적인 대립 상황의 전후소설 또는 분단소설의 하나의 트렌드, 시대적 모티프를 수용하려는 작가 의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누님을 만나고 싶다는 정태수의 심정을 이해하는 심리적 배경으로 구조하기 위한 장치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설 창작 상 제목의 타당성과 심리적 상황 묘사가 디테일하지 못한 점, 그리고 정태수 누이의 사연 에피소드와의 연결성이 유기적이지 못한 점이 구조미학적인 점에서 아쉽다. “식인상어의 이빨만큼이나 표독스런 파도는 바위를 씹고 피를 삼켰다. 그러다가 냅다 절벽에 머리를 짓찧고는 차디찬 울음을 토해냈다. 뭘 포원해서 우는지, 무턱대고 부서지기만 하는 파도의 몸 앓이에서 아찔한 무섬기를 느낀 정태수는 벼랑 아래를 굽어보다 말고 선뜻 뒤로 물러섰다.”라는 정태수 누님의 사연이 시작되는 감각적 자살 미수 에피소드도, 독자를 설득시키려는 작가의 창작의도와는 달리 필연성이 약하다.
그러나 정태수의 살인 동기를 설명하는 근거로는 충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에 대한 필연성을 중시한 창작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인용문을 통해 작가 김용만의 고향 마을에 대한 아름다운 체험 혹은 ‘새물내 나는 치마’로 표상되는 소녀를 통해 과거의 체험을 노만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다.
“딸은 자살 동기를 밝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를 겁탈한 장본인의 씨를 뱄던 처지로서 어떻게 자살 동기를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딸의 가출은 다른 형태의 자살일지 모릅니다. 동생이 중벌을 저지른 사실을 몰랐던들 딸은 영원히 집에 돌아올 수 없었겠죠. 그처럼 순결한 한 인간을 단순히 동물적인 욕구만으로 짓밟아놓고도 허석주는 양심의 가책은커녕 계속 어머니를 농락했습니다. 더구나 딸이 임신을 하게 되자 자기의 체면손상이 두려워 저지른 그 야비한 수작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양심마저 저버린 행위였습니다. 지역의 유지가 착하게 살아온 모녀를 겁탈하고 딸을 임신까지 시켰다는 소문이 퍼질까봐 딸 스스로 몸을 숨기도록 유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의로 어머니와의 불륜관계를 폭로했으며, 그럴 경우 딸의 고운 마음씨로 보아 스스로 몸을 숨기리라 예상했을 겁니다. 그 도피 방조에는 자살까지도 묵인하는 저의가 숨겨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사실 누나는 바다에 몸을 던졌고요.”
-정태수 누나의 사연①
위의 인용문은 정태수 살인 동기를 변호하는 법정에서의 변호사의 말이다. 긴 대사를 통해서 사건을 진행시키는 리얼리즘 소설의 창작 방식이 전근대적 방식이라고 해도, 이 대사의 창작 구조는 사건을 압축시키고, 누님의 자살 동기와 정태수가 죽인 허석주의 불륜적인 행위와 비도덕적인 우리 사회의 삶의 단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효율적인 구성 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작가의 모티프인 인간에 대한 이해와 휴머니티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연민. 그것을 살리려는 구조미학인 셈이다. 기존의 세태소설의 창작 양식에서 일탈하려는 작가의 미학의식을 엿보게 한다. 세태소설로서 장편 혹은 중편으로 늘려 쓸 수 있는데도 단편적 미학을 최대화하고 있다.
변호인의 말을 듣는 순간 정태수는 자살 동기를 폭로하면서까지 자기를 도우려 한 누나의 애정이 숫제 원망스러웠다. 비록 극형을 당한다 해도 그 비밀만은 누나의 가슴속에만 영원히 묻혀 있어야 했다. 이제 가정의 불행은 자기의 살인이라고 하는 횡액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어머니의 삶은 무엇이며 모녀간 남매간의 상면이 어찌 떳떳할 수 있겠는가. 변호인의 말대로 어쩜 누나는 동생에 대한 변호를 마지막으로 영원히 가족과 생이별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나가 가출한 후로 이태가 넘도록 소식을 끊었던 사실로 보나 면회실에서 동생 모습을 바라볼 때의 그 겉돌던 시선으로 보나 수긍이 갈 만했다. 유치장으로 처음 면회 왔을 당시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는 누나의 눈빛은 체념의 빛이 역력했다. 누나는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세상사와는 물론 부모형제와도 격리시키고 싶어 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 죽어가고 있었다.
-정태수 누나의 사연②
이 인용문은 정태수 남매의 사랑을 엿보게 하는 부분이다. 가족의 소중함을 환기시키는 부분이다. 해체되어가는 가족 간의 정, 이미 파편화되어 버린 지도 모르는 가정의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돈 때문에 친족을 살해하는 처참한 우리 사회를 하나의 단편적 사건으로 축소하여 표상하는 내러티브다. 어머니를 겁탈하고 씨를 배게 한 허석주를 살해한 정태수와 그의 누나의 마음을 표현하므로 해서, 이들 남매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장치 미학이 도식적이긴 하지만 감동을 배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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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의 남매간의 사랑은 혈육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다. 바모우는 “연민은 여성에게 바쳐지는 치명적인 감정이다”라고 말한다. 또 한편으로 A. 쇼펜하우스는 “연민은 모든 도덕률의 기준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태수에게 있어서 어머니와 누나에 대한 사랑은 바모우의 연민에 대한 정의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가족이라는 범주로 인한 감정의 발로이다.
정태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에게서 처음 느껴보는 살의였다.
“저는 살인을 한 게 아니라 독벌레를 죽인 겁니다. 허석주는 허울만 선주일 뿐이지 배 밑창까지 파먹은 백수건달이었죠. 그는 어머니한테 이런 말을 했어요.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항상 보이지 않는 시선이 우리 집 식구들을 감시하고 있다고요. 그 감시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어머니가 고기 행상으로 장만한 집과 통장을 가로채고 나중에는 빚 독촉하는 어머니를 농락까지 한 거죠. 누나는 어촌계에 취직시켜준다는 빌미로 농락했고요.”
마형사는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숙연한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매연이 깔린 서울 거리가 우중충했다.
역시 서울은 지저분하군.....
-정태수의 살인 동기 부분
위 인용문에서 정태수의 말로 인해 마형사는 정태수의 수갑을 풀어준다. 그리고 서울이라는 공간을 생각한다. 여기에서의 ‘서울’은 도시를 표상하는 공간으로, 마형사의 고향 풍경과 ‘새물내 나는 치마’의 계집애가 은유하고 있는 시골 정취와 대립시킨다. 이 또한 긴장 구조를 만들기 위한 장치인 셈이다.
G. 피오베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살기 위해서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 이런 자기 파멸 없이 죽어가는 것, 이 역시 연민의 감정에서 나오는 행위이다”라고. 이것을 위의 인용문의 정태수 살인 동기에 대입해보면 다른 시각이 가능해진다. 피오베네의 위의 견해는 타인에 대한 연민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연민이라는 감정 코드보다는 분노라는 감정 코드가 작용한다.
분노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와 유사한 대상에게 불행을 준 사람에 대한” 감정임을 말한다. 어머니와 누나에게 불행을 준 허석주에 대한 감정이 그 분노인 셈이다. 그것으로 인해 행위는 정태수가 지닌 도덕률 때문이다. 분노와 함께 일어나기 쉬운 복수심은 “미움의 정서로 우리에게 해악을 가한 삶에게 똑 같은 미움으로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스피노자의 말)으로 극단적으로 살인을 가능하게 한다.
마형사는 담배를 꺼내 피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지저분한 서울 이미지가 새삼 떠오르자 몸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환경변화에 따라 사람의 판단기준이 달라진다는 생각이 언뜻 떠올랐던 것이다. 시골 분위기와는 달리 서울의 도시 냄새가 정태수에게 심리변화를 유발시킬지도 모르잖은가. 그러고 보니 시가지를 바라보는 정태수의 눈빛이 예민해진 것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버스의 제한된 공간과 푸르고 맑은 시골 정취가 탈출의지를 억제해왔는지는 모르지만 서울은 다르다.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 찬 도로의 열기가 안정된 정서를 흔들고 도덕률마저 파괴할지 모른다. 인간의 야비성도 그런 혼탁에서 싹트는 법인데 지금까지 정태수가 지켜준 신의 역시 술책에 불과할지 모른다. 걸레만도 못한 신의. 정태수는 진작 서울의 뒷골목을 생각해두었을 테고 그래서 일부러 신뢰감을 심어주려고 지금까지 언구럭을 떨었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공간 인식이 잘 나타나는 부분이다. 정태수를 풀어준 마형사의 내면심리를 도시와 시골이라는 공간이 인간의 심리에 영향을 어떻게 주는가를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다.
삶을 설명하고 인간의 존재를 해명하는데 있어서 고전적인 범주에서 선택하는 철학적 인식은 시간과 공간이다. 그 질서를 해명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소설에 있어서 구조 미학 또한 시간과 공간 구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소설에서 창조되는 인물을 해명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공간’을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실재로 파악하지 않고, 선험적이고 관념적인 것은 파악한다. 이것은 인간을, 인간의 인식을 선험적이고 관념적으로 파악한 그의 철학에 기반을 둔다. 이렇게 선험적이고 관념적으로 파악된 인간은 두 개의 인식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감성과 오성이다. 전자는 감정 묘사로, 후자는 심리 묘사로 표현한다. 이러한 소설의 창작 방식의 공간 이미지를 통해서 영향 받게 되는데, 소설 〈늰 내 각시더〉에서는 자연에 대한 감각적 묘사와 공간 묘사를 통해 인물의 성격 묘사에 차용한다. 위의 인용문이 그것이다. 서울과 시골, 비도덕성과 도덕성, 혼탁과 질서, 허석주와 ‘새물내 나는 치마의 계집애’의 대립 구조가 그것이다.
마형사의 그 미필적고의가 저지른 범죄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듯 추영감은 한마디를 더 보태고 나서 자리를 뜨려 했다. 이런 인간과 함부로 상종하다가는 무슨 엉뚱한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그런 눈치였다. 항상 어떤 함정에 빠질지 모를 위험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이고 보면 그 이치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서 때로는 용기와 모험으로 정면 돌파를 시도해보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사회의 법도에 기초를 두어야만 했다. 그런데 마형사의 짓은 죽도 밥도 아닌 한갓 방종일 따름이었다. 법을 집행해야 될 경찰관이 그걸 포기할 때 도둑을 잡아야 할 사람이 되레 도둑놈이 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어쩐지 거동에 미심쩍은 데가 있어 언짢게 생각해온 터인데 세상에 참 별놈을 다 보겠다는 듯 추영감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마형사가 그의 팔을 잡아 도로 주저앉혔다. 추영감은 마형사의 거친 손길이 마치 흉기처럼 불안했다.(…)
술에 젖어 의식이 몽롱해진 마형사는 그 사내의 뒷모습에 대고 한마디를 걸찍하게 내뱉았다.
“개자식! 빨갱이 자식!”
-소설의 데뉴망 부분
마형사와 추영감의 갈등을 묘사하고 있는 데뉴망 부분이다. 마형사는 술 한 잔을 먹고 그 동안의 사정을 이야기한다. 살인자를 풀어준 마형사의 범죄를 미필적고의로 보고 범죄시하는 추영감. 그리고 그런 행위를 저지른 마형사를 위험인물로 보는 추영감과 자신의 호의를 뿌리치고 이해해주지 않는 추영감을 “빨갱이 자식!”이라 욕하는 마형사. 이 둘의 갈등은 ‘적의’라는 감정으로 나타나지만 행위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마형사가 내뱉는 말이다. “개자식! 빨갱이 자식!”이 그것이다. ‘빨갱이 자식’이라는 욕설은 당대의 사회 현상을 표상하는 언어이다. 남북의 극한적인 대립관계에서, 나와는 사고가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의 욕설이다. 아직도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 지내고 있지만, 80년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남북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분단소설이 다시 고개를 쳐들든 시대였기 때문이다. 특히 마형사는 경찰공무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런 욕설은 가능했을 것이며, 일반 보통 사람들도 많이 사용했던 욕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 소설은 환기해준다.
“누나가…. 누나가 돌아가셨어요.”
마형사는 주먹을 풀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여물지 않은 별들이 멀건 물방울처럼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울음 그쳐! 개 같은 자식! 약속이 중하냐 네 누나 죽은 게 중하냐 이 개자식아!”
마형사는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산매 들린 사람처럼 까만 허공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연방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답답해진 정태수는 마형사 입 가까이로 귀를 모았다. 그때였다. 마형사의 입에서 방금 전과는 아주 다른 내용의 말이, 그것도 귀청을 쨀 듯 크게 들려왔다.
“이 새꺄, 도망치지 않고 왜 왔어!”
뜻 모를 고함소리가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정태수는 마형사의 말뜻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수갑을 채우도록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마형사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때 마형사가 또 한 번 고함을 쳤다.
“데데한 자식! 지겨운 자식!”
욕을 퍼댄 마형사는 정태수에게서 얼굴을 돌린 채 허리에 찬 수갑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정문 위에 매달린 보안등 불빛 속에서 밤안개가 야울거렸다.
-〈늰 내 각시더〉 결말 부분
위의 인용문에서 돌아온 정태수에게 화를 내는 마형사의 분노는 역설적이다. 연민에서 나오는 감정의 발로이다. 우리가 앞서 간단하게 연민에 대해서 말한 바 있지만 동정에서 인간의 연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측은지심이며, 자비며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다. 어쩌면 마형사의 행위는 L.C 보브나르그가 말한 것처럼 불행한 사람을 연민하지 않기 위해서 질책하는 행위일 수도 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병이 같으면 서로 연민하고 근심이 같으면 서로를 구원한다는 말처럼 이 둘, 마형사와 정태수의 관계는 그런 관계인지도 모른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연민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한 슬픔”이라고. 여기에서는 ‘해악의 관념’을 쓴 이유는 아마도 연민이라는 감정이 타인에게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만들 수 있는 치명적인 감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연민에서 시작된다. 많은 정서를 함유하고 있는 ‘연민’은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이해하는데 바탕이 되어야 할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연민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파멸시킬 수 있고, 자신을 잘못 이해하게 하는 함정이 됨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휴머니즘은 자연외경을 기조로 해야만 가능하다. 또한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라는 발상에서 가능해진다. 생명의 존엄성 또한 자연에 근원을 두었을 때 가능하게 된다. 이렇듯 휴머니즘은 생명과 자연의 자각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다양성을 조장하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휴머니즘의 속성은 위에서 말한바 자연과 생명존중, 메카니즘의 거부, 규제로부터의 일탈이다.
19세기 이후의 휴머니즘은 인문주의보다는 인본주의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우선으로 한다. 이런 점에서 마형사의 연민과 분노 등의 제 감정은 인간 휴머니티라는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휴머니즘은 20세기에 들어서 어밍 배빗트와 엘머 모어에 의해 고양된 신인본주의는 조화를 이룬 원숙한 인간상을 세계적인 고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자연과 인간을 구분한다. 이러한 인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진행된 한국현대소설은 50년대에 들어 소박한 휴머니티로 인간성 회복을 주창한다. 그것은 전후문학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표층적 의미 공간을 형성하고 있든, 아니면 지극히 개인적인 운명의 문제에 국한하든 간에 작품 속에 구조된 갈등체계는 휴머니티를 암시하는 장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한국적 휴머니즘은 시대상황과 맞물려 변화된다. 타락한 사회의 타락한 형태로 존재하면서 나름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후기산업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거쳐 해체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다양성이라는 속성에 따라 진행된다.
이러한 한국적 휴머니즘을 이 소설 〈늰 내 각시더〉는 총체적으로 나타낸다. 사회적 배경은 소설의 행간 속에 은폐하고, 마형사와 정태수 그리고 그의 가족과 추영감이라는 인물을 통해 타락한 사회의 타락한 형태로 인간성 회복이라는 휴머니티를 보여주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작가 김용만의 자연인으로서의 노만화, 그 하나의 발로라는 점에서 이 소설을 재조명하게 하고 주목하게 한다.
유한근 ---------------------------------------------
동아일보 신춘 평론으로 등단. 평론집 《문학의 모방과 모반》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한국수필비평》등 저서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신곡문학상 대상, 여산문학상 등 수상. 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인간과문학》 주간.